#08
사희의 차가운 목소리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식어버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목소리를 높여 떠들던 강사들의 얼굴이 동시에 똥 씹은 듯 찌그러졌다.
“이사희 씨, 그거 지금 우리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왜요? 본인들이 쏟아놓는 말은 그렇게나 유쾌하시면서, 자기 귀에 거슬리는 말은 듣기가 싫으세요?”
사희가 모여앉아 낄낄거리던 강사들을 향해 냉소 섞인 말을 던졌다. 자기들이 해놓은 말이 있으니 뭐라고 반박은 못하지만, 입바른 소리를 하는 이사희가 재수 없다는 뜻만큼은 역력하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이사희 씨. 지금 자기가 가르치는 애라고 편들어?”
“네. 편들어요. 나라도 좀 들어야 할 것 같아서요.”
“VIP 가르친다고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이사희 씨가 그 사람들이랑 뭐 가족이라도 돼?”
“내가 뭐는 안 되지만, 적어도 지금 그 말들이 당사자 귀에 들어가면, 댁들이 노바에서 일하지 못할 거라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제가 어디 한번 고스란히 전해드려 볼까요?”
사희의 말에 안색이 파래진 강사들은 감히 더 받아치지 못하고 찌그러들었다. 그 꼴이 애잔하고 우스워 사희는 입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에이, 분위기가 왜 이래. 이러려고 모인 자리 아니잖아. 단합하자고 모인 거 아녜요?”
고참 강사 정아가 사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곤 각자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긴장된 분위기를 풀기 시작했다. 모두가 못 이긴 척 술잔을 드는 중에도 사희는 끝내 잔을 들지 않았다.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뒤집어 놓은 사희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화 풀고 3차에 가자며 들러붙는 남자 강사들을 뿌리치고 나와 뛸 듯이 걸어가는데 누군가 달려와 사희의 팔을 잡았다. 정아였다.
“사희 쌤. 가지 마. 이렇게 가면 어떡해.”
“선생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지만 전 안 되겠어요. 먼저 갈게요. 죄송해요.”
사희는 정아의 팔을 풀어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알았어. 알았어. 안 잡아. 근데 이렇게 가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선생님이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전 정말 괜찮으니까 들어가 보세요.”
“그럼 택시라도 타고 가.”
정아가 얼른 다가와 사희의 손에 지폐 한 장을 쥐여준다.
“아직 버스 다녀요. 버스 타면 돼요.”
사희는 억지로 손에 쥐여주는 지폐를 완강히 거절했다.
“택시 타. 술도 많이 마셨는데.”
“저도 돈 있어요.”
“누가 돈 없대? 그냥 선배가 후배한테 용돈도 좀 줄 수 있는 거지.”
“우리가 뭐 선배니 후배니 할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요.”
사희가 냉소적으로 쏘아붙이자, 정아는 잠시 뭐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서 있다가 곧 뭐가 우스운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와. 진짜 모났다. 사희 쌤. 왜 그렇게 사람한테 벽을 쳐?”
“벽 친 적 없어요.”
“가까이 오면 총이라도 쏠 기세로 그러고 있으면서, 그게 벽치는 거 아니면 뭐야? 사희 쌤. 나 전염병 같은 거 안 걸렸어. 그렇게까지 안 피해도 돼.”
민망함을 숨기려는 듯, 정아가 농담을 섞어 서운한 내색을 한다. 겸연쩍어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사희는 자신이 좀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오해하든 아무렴 어떠냐고 무시해버리곤 했던 이사희였지만, 정아에게만큼은 해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하는 거 아니에요. 다만 절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난 너 좋아하는 사람인데?”
“……!”
정아에게서 돌아온 뜻밖의 대답에 사희는 순간 방어 의지를 잃고 우물쭈물 입을 다물었다.
“싫어하는 사람 막는다는 핑계로, 그렇게 미리부터 벽 쌓고 선을 그으면 너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네 세계에 들어가?”
“…….”
“잘 생각해봐. 누가 자길 싫어하기도 전에, 미움받게 될까 봐 그게 무서워서 자기가 먼저 선을 긋고 있는 건 아닌지.”
정아의 말이 명치 깊숙한 곳에 비수처럼 박혔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또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그녀 나름의 방어를 해오던 것이 끝내는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버렸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속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당황했지만 사희는 짐짓 태연한 척 표정을 꾸몄다.
사희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자 정아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다.
“우리 좀 걷자. 술도 깰 겸.”
사희도 더 이상은 정아를 뿌리치지 않았다. 그렇게 몇 걸음 말없이 걷다가, 사희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정아를 돌아보았다.
“저한테 잘해주지 마세요. 선생님.”
“그게 무슨 말이야?”
정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뜬다.
“결국 선생님도 곤란해질 거예요. 저 그런 거 싫어요.”
사희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잠시 그 눈을 보고 있던 정아가 아무렴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라지? 그럼 너랑 나랑 둘이 놀지 뭐.”
“선생님.”
“이사희, 내가 이 나이에 어린 것들에게 왕따 당하는 거 무서워서 나 하고 싶은 것도 못할까 봐? 사람 무시하지 마. 나 황정아야! 나도 옛날부터 저것들 저렇게 함부로 떠드는 거 듣기 싫어서 언젠가 한마디 해야지 벼르고 있던 참이라구. 사희 쌤이 나 대신 한 방 먹이는데 속이 다 시원하더라. 뭐.”
“…….”
“그래도, 사희 쌤. 너무 그러지는 마. 그럼 적 생겨. 자꾸 적 만들면 나중에 외톨이 된다. 진짜 외로워진다구.”
사희는 왠지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사희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예요. 그리고 전 외로움 안 타요. 그게 뭔지도 몰라요.”
“외로움 안 탄다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외로움 제일 많이 타더라, 뭐.”
“진짜 아니라니까요.”
사희는 정말 억울하다는 듯 발끈했다.
“아니면 말구. 아니면 아닌 거지 왜 민감하게 반응할까? 꼭 그런 것처럼.”
사희를 바라보는 정아의 표정은 이미 사희를 간파했다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숫제 철모르고 까부는 꼬마를 귀여워하는 어른의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가 얄밉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친근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사희는 제 팔에 살갑게 팔짱을 끼는 그녀의 행동을 더 이상은 피하지 않았다.
“사희 쌤, 남자친구는 있어?”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정아가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왜 갑자기 이야기 방향이 그쪽으로 흐르는 건데요?”
사희는 정색을 하며 정아를 돌아본다.
“반응을 보니 없구만?”
“…….”
“누가 사희 쌤 남자친구 있는지 좀 물어봐달라고 해서. 내가 그 소리를 못 해도 다섯 번은 들었을 거다. 너는 몰랐지? 사람들이 너한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사희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몇 번 깜박이다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
“됐다고 봐요.”
“되긴 뭐가 돼. 그러지 말고 남자친구 없으면 한번 만나나 봐. 예쁜 얼굴 왜 그냥 썩히니? 아깝게.”
“관심 없어요.”
“아, 왜. 혹시 남자친구가 있어서 그래?”
“그딴 거 없지만. 없어도 됐어요.”
“왜 그렇게 시니컬 하냐? 좀 가볍게 살아라. 그렇게 외로이 있기엔 너, 너무 예뻐. 그래서 아까워.”
정아의 표정과 말투에 따듯한 온기가 묻어있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따스한 관심을 받아본 것은 참 오랜만인 것 같아 낯설다. 정아는 사희의 팔을 끌어안듯 잡으며 속삭인다.
“누가 물어봤는지 알려줄까?”
“글쎄, 전 남자 안 키워요. 돼지는 키우면 고기라도 남지, 남자 그거, 키워서 뭐해요?”
“이쯤 되면 키워본 적은 있는지가 궁금한데?
사희는 진실이 의심스럽다는 듯 빈정거리는 정아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뜬다. 아니, 이 여자가 사람 무시하나. 누굴 모태솔로로 보는 거야?
“그야 당연히 있죠?”
사희가 발끈해 소리쳤다.
“진짜?”
“진짜요.”
“몇 번?”
선수촌에 있을 때, 적극적으로 구애해오던 선배와 짧지만 연애란 것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게 도통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서 그만두곤 다시 한 적 없긴 하지만. 단 한 번뿐이라고 말하는 게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서 사희는 어영부영 뭉뚱그렸다.
“그야……. 뭐 많지는 않지만 어쨌든 있긴 있어요.”
정아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린다.
“이사희, 선수인 줄 알았더니 영 숙맥이네? 안 되겠다, 너. 얼짱 호칭 반납해라.”
“으, 제발 그 얼짱 소리 좀…….”
사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진저리를 친다.
“왜? 얼짱을 얼짱이라 하는 게 뭐가 어때서?”
“누가 들으면 웃어요. 아시안게임이네, 올림픽이네 뭐 그런 거 있을 때마다 급조해서 만드는 얼짱들, 나중에 길에서 보면 거들떠도 안 볼 것들인 경우가 태반이잖아요. 개나 소나 다 받는 그 호칭, 전 사양입니다.”
사희는 단호하게 대꾸하곤 오리처럼 입술을 뚜 하니 내민다.
“칭찬을 칭찬으로 듣는 연습부터 해. 예뻐서 예쁘다는데 뭘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 혹시 그것도 일종의 작전인가? 도도하게 굴어서 남자들을 휘어잡는 미인계?”
“우웩. 미인 다 죽었네.”
사희가 정말 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하며 몸을 크게 굽혔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난데없이 괴성을 지르는 여자를 힐끔 보더니 곧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멀어졌다.
어디선가 킥, 하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정아가 먼저였는지 사희가 먼저였는지 알 수 없지만 종래엔 두 사람 모두가 크크크큭, 사이다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한번 터진 웃음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그쳤다가 또 터트렸다가 그렇게 한참을 낄낄거리며 배를 잡았다.
웃음의 힘일까. 정아를 향해 쳐두었던 사희의 경계심이 경쾌한 웃음소리를 타고 저 멀리로 훌쩍 밀려났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