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이 회장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
“이경민이 다치는 것보다는, 제가 다치는 편이 조금 더 마음이 편하셨던 거 아니었나요?”
“동하야.”
“오해입니까?”
이종학 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을 말할 바에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저 성격. 동하 역시 고스란히 물려받은 유산이니 이 회장의 본심을 동하는 알 수 있었다. 하나 알고 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신이 반쪽 자리 자식임을 알고 있었다고 해서 아프지 않았던 것이 아니듯.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네. 어쩔 수 없었죠. 회장님 잘못 아닙니다. 제 잘못이었죠. 그땐 제가 너무 힘이 없었어요. 욕심도 없었고요.”
“동하야.”
“하지만 욕심이 없느냐는 말, 이제는 제게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
“제가 욕심내기 시작하면 이제는 저, 감당 못하십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이 회장의 눈빛이 가냘프게 흔들렸다. 그 눈을 마주해 바라보다 동하는 먼저 눈을 피했다. 태연하고 싶었지만 잘되지 않았다. 부모가 늙는다는 것, 그래서 끝내는 이런 연약해 빠진 모습을 목도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되었든 슬픈 일이다.
동하의 눈을 한참 바라보던 이 회장이 가늘게 눈시울을 좁혔다.
“날 측은한 듯 보는 눈은 꼭 네 어미를 닮았구나.”
“……!
“날 그렇게 보는 사람은 윤혜 하나뿐이었지.”
이종학 회장이 친모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동하는 느리게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으로 건조해진 목구멍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온다.
이 회장이 얼음처럼 굳어버린 동하의 얼굴과, 어깨를 쓰다듬듯 바라본다. 애련함이 묻은 눈빛이었다.
동하의 단단한 눈빛 역시 이 회장을 바라본다. 이렇듯 부자가 서로의 눈을 담담히 마주 본 때가 있었던가. 생소한 것을 보니 역시 없는 것 같다.
한참, 마치 동하의 모든 것을 외우기라도 할 것처럼 곱씹어 바라보던 이 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자식 중에 반쪽은 없어. 그게 내가 너를 부른 이유다.”
***
병실을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조명진 실장이 동하 앞으로 작은 쇼핑백을 내민다.
“회장님께서 챙겨주라고 하셨습니다.”
쇼핑백 안에는 조금 전 마신 꽃차 청이 들어있었다.
동하는 입안의 연한 살을 질근 씹다가 느리게 손을 뻗어 쇼핑백을 받았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아, 조 실장님. 내가 부탁이 좀 있는데.”
쇼핑백을 건네던 조 실장의 손가락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왜 그렇게 긴장하세요. 내가 실장님한테 어려운 부탁을 했던 기억은 없는데.”
“아,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어떤 일을 도와야……?”
동하가 입술에 잔웃음을 걸고 조 실장을 보았다. 커다란 덩치의 남자의 인중에 땀이 맺혀있다.
“별 건 아니고, 노바에 있는 시설을 좀 이용하고 싶어서요.”
“노바요?”
“그래요. 되도록 사람들 없는 시간에 자유롭게. 며칠 전 거기서 귀찮은 일이 좀 있었거든요.”
“노바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뭐, 별 건 아니고. 아무튼 부탁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용에 불편함 없으시도록 바로 조치해놓겠습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조명진 실장을 바라본다. 7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신의 몸에 묻어있던 혜석의 흔적을 지우려는 노력이 너무 완벽했던 것일까. 자신보다 열세 살 많은 중년의 남자가 이토록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히는 광경을 보는 것이 어쩐지 기이하게 느껴졌다.
“조 실장님.”
“네.”
“회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회장님께서 드물게 믿는 사람이잖아요. 조 실장님은.”
부탁의 말이었지만 그 안에 억센 가시가 담겨있었다.
조명진 실장이 잠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동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동하는 조 실장의 이마에서 흐른 땀이 구레나룻을 지나 턱에 모이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돌아섰다. 꽃차가 든 쇼핑백이 천근이나 된 듯 무겁게 느껴졌다.
병원에서 나오기 무섭게 동하는 거칠게 넥타이를 잡아당겨 풀어헤쳤다. 그로도 모자라 단정하게 목을 죄고 있던 셔츠의 단추도 풀어버린다. 성급하게 움직이는 그의 긴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린다. 동시에 강한 현기증이 일었다. 서늘한 지하주차장의 공기에도 불구, 그의 관자놀이 부근에는 차갑게 식은땀이 흐른다.
“안색이 안 좋아요.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대기하고 있던 수찬이 어느 틈에 그를 발견했는지 잰걸음으로 다가와 동하의 얼굴색을 살핀다.
“안에서 차를 한잔 마셨는데 아무래도 거기에 누가 독을 탄 것 같아.”
“네? 독이요?”
놀란 수찬이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하가 심각해진 미간으로 수찬을 바라본다.
“농담 같아?”
“아, 아니요.”
“농담 맞아.”
동하는 얼빠진 수찬을 남겨두고 앞서 걷는다. 터덜터덜 걷는 걸음에 힘이 하나도 없다.
수찬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동하의 뒤를 따른다.
“진짜 괜찮은 거죠?”
여전히 믿지 못하는 수찬을 보며 동하는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면서 웃었다.
“걱정 마. 나 안 죽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죽고 싶어도 못 죽어.”
“…….”
수찬의 얼굴이 금세 걱정으로 일그러진다.
“농담이야. 농담.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정말 괜찮겠어요?”
동하의 얼굴에 번져있던 웃음기가 사라진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스산한 가을바람처럼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괜찮지 않으면. 울기라도 할까?”
***
수영강사들끼리 하는 회식이라고 해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회식이란 것은 어느 곳에서 누가 하든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위계질서가 매섭기론 해병대 뺨을 치고도 남는다는 소위 운동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는 마땅히 서열이 생기기 마련. 그리고 서열의 확인에는 언제나 폭음이 동반되는 법이다.
대부분이 이십 대이고, 몇몇만이 삼십 대인 젊은 강사들은, 혈기왕성한 체력에 정비례하는 주량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원수라도 진 듯 술을 마시기 시작하니 나중엔 술을 마시는 것인지, 술에 먹히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뭐야, 사희 씨, 안 마셔?”
“네, 더 마시면 취할 것 같아서요.”
“술은 원래 취하려고 마시는 거야. 다 같이 취해야 재미있지. 마셔, 마셔!”
짓궂게 잔을 권하는 남자 강사의 억지에 못 이겨, 사희는 맥주잔 가득했던 폭탄주를 결국 비워내야 했다. 여기저기서 강권하는 잔을 연거푸 받아내다 보니 어느새 알싸하게 취기가 돌았다.
“사희 씨, 그러고 보니까 생각난다. 얼짱 수영선수라고 TV에서도 한참 떠들썩했었잖아.”
혀가 꼬부라지기 시작한 강사 하나가 굳이 민망한 이야기를 꺼낸다. 딴에는 관심의 표현일 것이지만 사희는 그 관심이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십팔 세 때, 이야기는 왜 또 꺼내고 난리야, 십팔.
“아, 예… 뭐…….”
“뭐 그게 대수인가. 그래봤자 결국엔 다 똑같이 수영강사나 하는걸.”
사희에게 은근히 못마땅한 티를 내던 문제의 구 동료 강사가 볼멘소리를 한다.
“그냥 수영강사는 아니지. 혜석그룹 황태자님을 위해 모셔 온 특채 강사인데.”
“특채는 무슨. 그 애가 여기 있는 강사들한테 다 돌아가며 강습받았어도 당최 실력이 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죠.”
“그래, 그러니까 이사희가 와일드카드라는 거지. 넌 못하는 걸 이사희는 하고 있잖아.”
“걔 엄마가 참을성이 없었던 거예요! 세상에 강습 두 번 만에 때려치우는 게 어디 있어요?”
여자가 술잔을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놓으며 발끈한다.
“참을 필요가 뭐가 있냐? 원래 부자는 인내를 할 필요가 없어.”
그러자 곁에서 듣고 있던 이가 촉새같이 툭 끼어든다.
“인내는 하겠지. 듣자니 소박맞은 신세나 다름없다던데.”
“맞아. 나도 들었어. 그 여자 남편, 혜석 부사장인가 뭐가 아주 개망나니라며?”
“안 봐도 비디오지, 뭐. 나랑 좀 아는 사모님이 그러시는데 이쪽 세계에서는 혜석그룹이랑은 절대로 혼사 얽히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대. 아들들이 하도 개차반이라. 그래서 부사장도 결국 이름 없는 집안 여자랑 결혼 한 거라더라. 그 여자 출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대.”
“어머, 정말? 난 세상 도도하게 굴어서 무슨 대단한 집안 외동 따님이라도 되는 줄 알았네.”
“원래 가진 것 없는 인간들이 자존심만 센 거야. 그 여자가 자존심 말고 가진 게 뭐가 있겠어. 그나마 유일한 방패인 애도 정상이 아닌데.”
이야기의 불똥이 다른 방향으로 튄다.
사희의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시점부터였다. 되도록 말을 섞지 않으려고 멀찍이 물러나 있던 사희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한 인간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적대감이 얼마나 무자비할 수 있는지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근데 그 애는 왜 그래요? 자폐인가?”
“자폐는 아니래. 심리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다나 뭐라나. 걔 잠깐 가르칠 때 유 선생인가 하는 여자한테 얼핏 뭐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정상은 아니야.”
“난 걔 무섭더라. 갑자기 괴성 지르고, 자해하고. 솔직히 돈 아니었으면 난 안 가르쳤어.”
“나도, 나도.”
뭐가 즐거운지 맞장구를 친 강사들이 조심성 없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술잔을 쥔 사희의 손에 점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앞에선 둘도 없이 상냥하게 굴면서, 뒤에서는 이토록 추잡스러운 입방아라니. 그것도 모자라 어린아이까지 들먹여가며 심심풀이를 하고 있는 꼴에 절로 혀가 차졌다.
“정말 못 들어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