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6화 (7/109)

#06

이종학 회장의 VIP병실이 있는 A동의 서편은 유독 더 하얗고 조용했다. 동하와 수찬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긴 복도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병동 출입구 쪽에서 시큐리티가 수찬과 동하를 제지했다.

“가족입니다.”

수찬의 대답에 시큐리티의 얼굴에 묘한 의문의 기색이 떠오른다. 그가 전달받은 자료에는 이동하의 얼굴이 없는 것이 확실했다.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시큐리티의 질문에 동하는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조금 웃었다. 웃는 동화와는 달리 수찬은 황당한 듯 얼굴을 붉혔다.

“여기는 이종학 회장님의…….”

“됐습니다. 여기 보안 책임자가 누구시죠?”

설명하려는 수찬을 제지하고, 동하가 물었다.

“그건 왜…….”

“조명진 비서실장인가요?”

동하의 입에서 최고 책임자의 이름이 어렵지 않게 거론되자 시큐리티는 표정에 위압적이던 태도가 한결 풀렸다.

“조 실장님을 아십니까?”

“조명진 실장에게 이동하가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아, 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시큐리티가 떠나자, 수찬이 잇새로 쯧 하고 혀를 찬다. 말은 안 하지만 분한 눈치였다.

“수찬아. 그런 거에 일일이 화나면 오래 못 산다.”

“죄송해요. 그렇지만 너무 화가 나서.”

“죄송할 일은 아니야. 고마워. 내 편인 것 같아서 좋네.”

동하는 가벼운 우스갯소리를 했다. 덕분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수찬의 어깨와 목도 조금은 유연해졌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사실 진담에 가깝다. 그 누구도 자기편이 아닌 이곳에서는 더욱 더.

잠시 후, 먼발치에서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들리더니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뛸 듯이 달려왔다. 미래전략실의 조명진 실장이었다. 혜석그룹의 모든 정보가 최종 집결되는 핵심부서인 동시에 이종학 회장의 수족을 담당하는 곳의 최고 책임자인 그는 7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풍채가 좋아졌다. 그래도 빈틈없어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만은 여전했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미리 연락 주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언제 입국하셨습니까? 다음 주에 학회 참석 스케줄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조 실장은 말을 잇다가 문득 입을 뚝 다물었다. 그는 조금 전의 그 말로 그간 동하의 생활을 마킹 해왔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저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으신지 미처 몰랐네요.”

동하는 입술을 당겨 조금 웃었다.

“아, 그게……. 회장님께서 근래 작은 도련님에 대해 자주 물으셔서.”

어색하게 따라 웃는 조명진 실장의 인중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다.

“갑자기 오느라 연락 못 드렸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럼 거처는 어디로 정하셨습니까?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제가 편한 곳으로 봐 드렸을 텐데.”

“걱정 말아요. 내 앞가림은 내가 합니다.”

동하는 느슨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조 실장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요량이었는데 되레 그는 더욱 긴장하는 눈치였다. 이동하가 자기가 파악할 수 있는 영역 외에 있다는 것은 적잖이 귀찮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하는 조명진 실장의 안내에 따라 병실로 향했다. 보태 말해 중형 아파트 정도의 평형은 되는 넓은 병실의 한 가운데 이종학 회장이 잠들어 있었다.

조명진 실장이 조심스레 침대 맡으로 걸어가 이 회장을 부른다.

“회장님.”

“깨우지 마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동하가 재빨리 조 실장의 행동을 저지한다. 조 실장은 잠시 머뭇하더니 이내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저는 밖에 있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부르십시오.”

조 실장이 밖으로 나가고, 홀로 남은 동하는 이 회장의 침대가 마주 보이는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가습기에서 미세하게 들려오는 물 흐르는 소리와 심박체크기의 간헐적 기계음을 제외하곤 병실 안은 죽은 듯 고요했다.

잠이 든 이 회장의 얼굴은 7년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져있었다. 이번으로 벌써 네 번째 수술을 받은 이 회장의 심장은 이제 언제 멈추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기업총수라 해도 거듭된 병마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 남자는 환갑을 조금 넘긴 나이임에도 팔순 노인처럼 시들해져 있었다. 파리하게 마른 얼굴에, 군데군데 저승꽃마저 피었다. 세월과 병마 앞에서 인간은 이리도 속수무책으로 초라해진다.

시간이 지나 해가 눕자, 블라인드를 투과해 들어온 햇빛이 이 회장의 얼굴에 길게 드리운다. 햇빛을 받은 주름진 얼굴이 살아있는 사람의 것 같지 않다. 마치 물에 분 종이 곤죽을 붙인 탈 같았다. 그 모습을 두고 보는 것이 불편해서, 동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닫았다. 차륵, 블라인드 닫히는 소리와 함께 병실의 조도가 낮아졌다.

“왔구나.”

그때 등 뒤에서 쉰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이종학 회장이 희미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썹 새에 말라붙은 눈곱 때문에 눈을 뜨기가 힘들어 보였다.

“깨셨습니까?”

“응.”

“좀 일으켜 드릴까요?”

“그래.”

동하가 베드를 세우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이 회장의 목구멍 안쪽에서 그릉그릉,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천천히.”

비스듬히 누워서 한참 헐떡거리던 이회장이 뭐가 우스운지 픽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심장이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이 폐가 더 말썽을 일으켜. 조금만 뭘 어째도 헐떡헐떡하게 되니 사람이 사람 꼴이 아니게 되지. 보잘것없어. 그사이에 내가 병신이 다 됐다.”

“수술 받으셨으니 괜찮을 겁니다.”

“수술 그까짓 거 받아봤자지. 고작 1, 2년이나 더 살겠나. 하늘이 부르면 가야 하는데 욕심을 부리니 이렇게 추해지는 거야. 그래도 죽기 전에 널 보는구나. 귀신 되어서나 보려나 했더니.”

이 회장의 굳은 입술이 조금 달싹이더니 웃는 듯 마는 듯 희미하게 번졌다. 그 말이 마치 동하를 오래도록 그리워했다는 말처럼 들렸다. 생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죽음에 가까우니 천하의 이종학 회장도 유연해지는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왔으니 됐다. 앉아라.”

동하가 자리에 앉자, 곧 호출을 받은 조명진 실장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아랫것들 입단속 시켜라. 엄한 소리 흘러나가지 않게.”

“네. 알겠습니다.”

“마실 것도 좀 내오고.”

잠시 후, 탁자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다과들이 놓였다. 손 데기 아까울 정도로 곱게 만들어진 떡과 정과들 그리고 꽃차였다. 투명한 노란빛을 내는 차 안에 꽃 한 송이가 그림처럼 피어있다.

“마셔 봐. 병원장 안사람이 보냈다는데 향이 제법 좋더라.”

“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니 입안에 그윽한 꽃 향이 가득 번진다. 이 회장은 동하가 차를 마시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자 바로 물었다.

“어때?”

“좋습니다.”

“그래, 좋으면 조 실장에게 말해놓을 테니 가져다 먹어라.”

“괜찮습니다. 두고 드세요.”

“나보다야 네가 마실 날이 더 많지 않겠나?”

씁쓸한 농담을 마친 이 회장이 가슴이 답답한 듯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조금 고쳐 누웠다.

“한국엔 언제 들어온 거야?”

고치처럼 웅크려 누운 이 회장이 쇳소리가 섞인 힘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얼마 안 됐습니다.”

“미국서 교수 됐다지 않았던가. 경제학을 전공한다고.”

“교수까지는 아니고, 그냥 시간 강사 정도 급입니다.”

“하던 공부 중도에 멈춰서 어쩌누?”

“언제든 돌아가면 됩니다.”

“그 나이쯤 됐으면 이제 한 곳에 뿌리 내려야지. 결혼도 하고. 아무렴 서양 사람보다는 내 나라 아가씨가 더 마음이 맞지 않겠나?”

동하는 한쪽 입술을 당겨 희미하게 웃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동하야.”

잠시 후, 이 회장이 다시 동하를 불렀다. 이 회장의 목소리가 단호한 듯 다정했다.

“네.”

“가지 마라. 이제는 여기 있어라.”

찻잔을 쥔 동하의 손이 멈칫했다. 잠시 후, 동하는 느리게 숨을 들이마시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래.”

“이경민에게 그룹을 승계하시겠다는 건 회장님의 뜻 아닙니까?”

“맞다.”

“그런데 이제 와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동하의 질문에 이 회장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이 회장은 잠깐 동하의 얼굴을 쏘아보듯 하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욕심 없어?”

“제가 욕심을 낸다고 가질 수 있는 자리입니까?”

“못 가질 이유는?”

“저는 반쪽 자리 자식이지 않습니까.”

이 회장과 동하의 눈빛이 다급하게 부딪혔다.

일평생 한 번도 소리 내 말한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소리 내 말하고 나니 너무나 흔해 빠진 서사 같아 동하는 조금 허무해졌다. 다시 차 한 모금을 음미하듯 마신 동하가 느린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서 7년 전 제가 떠날 때 아무 말 하지 않으셨던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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