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왜 그러시는데요? 회원님이랑 무슨 문제 있었어요?”
“실은 며칠 전, 브레이크타임에 풀장에 입장하신 회원님과 약간 마찰이 있었거든요.”
“브레이크타임에 풀에 들어왔다고요? 어떻게?”
직원은 되레 사희에게 되물었다.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네, 이 사람아. 당신들이 자리를 비웠으니 들어왔겠지.
“그래서요?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시지 그랬어요.”
“그렇게 말했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 시간에 제가 개인 강습을 하잖아요. 수질 관리 시간이라고 다른 회원들 입장은 제한해놓고, 실은 특별 강습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회원님이 좀 불쾌해 하셨어요.”
“엥? 자기가 불쾌할 이유가 뭐야? 그게 센터 규정인데. 규정이라고 하지 그랬어요.”
“했죠. 했는데……. 도리어 그 점이 더 불쾌하셨던 것 같아요.”
“괜히 열폭 하는 거네. 부러워서 그런 거예요, 그거.”
사무실 직원은 입술을 삐죽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툭 대답한다.
열등감 폭발이라고? 사희는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아니, 그게 왜 열등감이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화가 치밀었다.
왜일까. 그녀 자신도 역시 VIP 회원의 개인 강습을 해주며 그들이 받는 특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왔으면서, 직원의 그 대답에 기분이 상했다.
“아뇨. 부러워하신 게 아니고 불쾌해 하셨어요. 어쨌든 회원님 입장에선 불공평한 처사니까요.”
사희는 회원의 입장을 빌어,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돈 없으면 좀 불공평할 수도 있는 거지 뭐. 억울하면 자기가 노바 주인 하라지?”
직원은 한껏 비웃으며 옆자리 동료와 ‘이름도 모르는 회원’을 헐뜯는다.
사희는 그들에게 괜히 쓸데없이 안줏거리를 제공한 것 같아 후회됐다. 그 남자, 태도가 썩 친절하다고는 볼 수는 없었지만, 아니 사실 거의 개새끼에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했던 말들이 결코 터무니없는 열등감의 발현은 아니었다. 명백하게 자기 권리를 주장했을 뿐.
그러니 그 사람이 이렇게까지 조롱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조롱을 받아야 한다면, 없는 사람은 불공평도 감수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저들의 노예근성이 대상이 되어야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강사님. 혹시라도 컴플레인 들어오면 저희가 알아서 커트할 테니까.”
“커트라고요?”
사희의 눈이 커졌다.
“막말로 컴플레인 좀 들어왔다고 VVIP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어요? 절 싫으면 중이 떠나랬다고, 싫은 사람이 나가야죠.”
“하지만 그분도 회원인데요.”
“회원이라고 다 같은 회원이 아니잖아요. 강사님, 강사님이 지도하는 아이. 혜석그룹 손자예요, 그것도 하나뿐인. 황태자라고. 일개 평회원이랑 어떻게 비교를 해요.”
하, 가슴에서 답답한 한숨이 본능적으로 치밀었다. 말을 말자. 사희는 더 이상 이야기를 섞고 싶지 않아 인사도 없이 그대로 돌아섰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에요? 혹시 그 회원 이름 알아요?”
돌아나가는 사희의 뒤통수에 대고 직원이 묻는다. 질문을 받음과 동시에 사희의 머릿속에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동하.’
지난 며칠간 수도 없이 떠올렸던 이름이라 그런지, 마치 원래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의 것처럼 익숙하게 느꼈다.
물어볼까? 어떤 사람인지?
사희는 잠시 망설였다. 회원기록에 이름을 검색하면 그에 대한 정보쯤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가슴 속에서 강한 열망이 끓어올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왜 이렇게까지 그 사람이 신경 쓰이는지 의아했다.
조금 고민하다가 사희는 끝내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그의 이름을 알려주고 그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면, 그때는 정말 어떤 다른 이유로 그를 신경 쓰여 한다고 인정하는 꼴이 될 텐데, 그건 싫었다.
“아니에요. 혹시 이후에 컴플레인이 들어오면 그때는 꼭 알려주세요.”
***
사무실을 나와 센터로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나오던 사람들과 마주쳤다. 오전 강습을 마친 센터 소속 강사들이다.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나오던 한 무리의 강사들이 사희와 마주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데면데면해 하는 강사들 사이에서 선배 강사인 정아가 먼저 사희에게 말을 붙인다. 둥글둥글하고 털털한 성격으로 강사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20대 초반의 어린 친구들과도 거리낌 없이 잘 지냈다.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희가 보기에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위계질서 의식이나 꼰대 의식이 없는 꽤 쿨한 사람이었다.
“이제 출근해?”
“네.”
“우리 커피 마시러 나가는데, 같이 갈래?”
정아의 제안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다른 강사들의 얼굴이 구겨진다. 선배 말이니 싫다고는 못하지만, 사희와 어울려 가기 싫다는 뜻이 역력해 보였다.
사희 역시 저를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내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밥술을 뜰만큼 비위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괜찮다잖아요. 그냥 우리끼리 가요. 느지막이 출근해서 몇 시간 강습하고 돈은 기함하게 받고. 진짜 노났다, 노났어. 어디 국가대표 못 했던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올림픽도 아니고 겨우 아시안게임 선수 가지고. 무슨 메달을 딴 것도 아닌데 다들 왜 그렇게 오바인지.”
함께 있던 동료 하나가 들으라는 듯 빈정거리더니 휑하니 지나쳤다. 사희가 오기 전까지 이재민의 강습을 맡았었다는 그녀는, 다크호스처럼 등장해 자리를 꿰찬 사희의 존재가 못마땅한지 처음 보던 날부터 저렇게 삐딱선이었다.
늘어서 있던 다른 강사들 역시 인사도 없이 그녀를 쪼르르 따라갔다. 센터소속 강사가 아닌 외부 강사를 초빙했다는 것, 그리고 그 강사가 국가대표 출신이라는 것이 그들에겐 꽤 자존심 다치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적대감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므로 사희는 되도록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상처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절대로 상처받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 사희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신경 쓰지 마. 쟤가 아직 어려서 그래. 요새 애들 철이 없잖아.”
홀로 남은 정아가 겸연쩍은 듯 배시시 웃었다.
“제가 한 살 어려요.”
사희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짧게 대꾸했다.
“아! 그런가? 사희 쌤 몇 살이야? 그러고 보니 아직 나이도 몰랐네.”
“스물여덟입니다.”
“어머. 그랬구나. 근데 그 나이로 안 보인다.”
노안이란 소린가. 정황상 그런 거 같은데, 그런 평가에 무관심한 편임에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네, 제가 동안은 아니에요.”
“아니, 노안이란 소리가 아니라. 정말 그런 소리 아니야. 얼굴은 여전히 대학생 같아.”
됐거든요. 이미 늦었어요. 사희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정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사희의 굳은 얼굴을 마주한 정아가 진심으로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손까지 크게 흔들었다.
“정말 그런 뜻이 아니고. 사희 쌤은 뭐랄까. 뭔가 인생 2회차 느낌이 든다고 할까? 가볍지가 않아서. 그래서 내가 사희 쌤을 그 나이로 안 봤나 봐.”
딴에는 칭찬이라고 하는 소리 같았으나, 사희로서는 나이답지 않게 무겁다는 것이 나잇값 못하고 철이 없다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무겁고 싶어서 무거워진 것이 아니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충 이즈음에서 마무리 짓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사희는 성의 없게 대꾸했다.
“강사들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마. 이쪽 일이 워낙 텃세가 심하잖아. 사희 쌤 여기 온 지 한참이나 되었는데 사람들이랑 전혀 안 친해졌지? 불편하더라도 강사들이랑 조금 어울리려는 노력 해 봐. 말은 저렇게 해도 다들 사희 쌤한테 관심 많아. 진짜루.”
“네.”
사희는 심심할 만큼 짧게 대꾸하고 배낭끈을 잡았다. 이제 그만 가보겠다는 신호였다.
“말 나온 김에 내일 강사 회식 참여해라. 사희 쌤.”
정아가 사희의 신호를 무시하고 다시 말을 붙였다. 은근히 치밀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동안 몇 번이나 회식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이곳 사람들과 굳이 필요 이상의 친분을 맺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를 노골적으로 싫어하고 경계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억지로 어떻게, 어떻게 친해지기라도 하면 그다음부터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사람들은 친해지면 쉽게 선을 넘곤 한다. 사희는 정말이지 그게 싫었다. 선 너머에 숨기고 싶은 것이 많아서인지도 모른다.
“응?”
정아는 오겠다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요량인 듯 보였다.
“응? 올 거지?”
“생각해 볼게요.”
사희는 조금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미적지근하게 대답했다.
“생각을 뭘 더해. 무조건 오는 거다. 안 오면 벌금 10만 원. 아니 20만 원이야.”
정아의 정성을 마냥 퇴짜를 놓을 수는 없는 일이고. 어차피 이곳에서 계속 물밥을 먹어야 한다면 싫어도 한번은 응해야 할 일이다.
사희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참여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