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잠깐만요!”
스포츠 타월로 몸을 닦으며 샤워장 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를 부른다. 남자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활배근과, 날갯죽지를 연결하는 근육이 아름답게 꿈틀거렸다. 공들여 빚은 조각품처럼 세밀하고, 섬세한 근육이었다. 마치 돌고래의 피부와도 같은 쫀쫀한 탄력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남자가 수영모를 벗자 젖은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살아난다. 머리칼에서 흐트러진 물방울이 사방으로 부서진다. 사희는 뺨으로 날아드는 물방울의 차가운 촉감을 느끼자 넋 놓고 감상하기를 멈추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안 들리세요? 잠깐만 서보세요!”
이번엔 보다 강한 어조다. 사희가 그나마 이 정도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이 스포츠센터의 고객들이 대부분 억 단위 연회비를 현금으로 지불할 능력이 되는 부유층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돈이 벼슬이지, 요즘은.
그러자 줄곧 직진을 하던 남자가 힐긋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한마디 할 기세였던 사희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넋 빠진 듯 자리에 우뚝 멈췄다. 사희를 향해 비스듬히 돌아서,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숨이 턱 막히도록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얼굴을 적신 물기와, 역시 젖어서 엉겨 붙은 속눈썹, 씻은 듯 맑은 눈, 그리고 물을 머금은 듯 윤기가 흐르는 유독 붉은 입술. 매끈한 피부와, 강골의 체격, 그리고 흑단처럼 까만 머리카락. 그의 얼굴은 무한히 강인한 남자 같다가도, 애련한 여인 같은 처연함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하게 빠져들게 하는 기운으로 젖어있다.
사희는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피가 빠르게 도는 것을 느꼈다.
“여긴 어…어떻게. 누… 누구… 허락을 받고… 들어오신…….”
젠장, 말까지 더듬었다. 방황하는 눈동자와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얼굴이 화끈했다.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남자는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표정이 진심인 것 같았으므로 사희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몰랐다는데 따져서 무얼 한단 말인가.
“데스크에서 안내 못 받으셨어요?”
조금 수그러든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였다.
“회원 등록하실 때는요? 그때도 안내를 따로 받지 않으셨나요?”
남자의 표정이 영 뚱했다. 사희의 반응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원래 이 시간은 외부인이 출입하면 안 되거든요. 지금은 수질관리 브레이크타임이라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요.”
그러자 남자는 의아함이 적당히 섞인 눈으로 풀장 쪽을 슬쩍 돌아본다. 외부인 출입이 안 된다면서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뭐냐는 질문이 남자의 차가운 눈에 담겨있었다. 사희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 사실대로 실토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게. 안에 있는 분들은 특별 강습을 받는 거라서.”
“수질관리 차원의 브레이크타임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사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강사님이십니까?”
남자가 묻는다.
“네.”
“강사라는 분이 회원에게 거짓말을 합니까?”
“아, 거짓말이 아니라 이건……. 센터에서 정한 사항이라…….”
“센터에서 정한 일이니까 본인은 책임이 없다는 건가요?”
묻는 태도가 날카롭다. 차라리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거나, 저를 힐난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나름의 해명이라도 해 보겠는데, 저토록 빈틈없이, 게다가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물으니 점점 더 할 말이 없어졌다. 분명 죄를 짓지 않았는데, 왜인지 엄청난 죄를 지은 기분이 된다고 해야 할까?
그때, 남자가 다시 묻는다.
“얼마나 됐어요?”
남자의 질문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사희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장신의 상대를 올려보았다.
“네?”
“얼마나 됐냐고요. 이렇게 된 지.”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왔을 때부터 이미 그래와서요.”
남자가 미간을 좁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다시금 사희의 얼굴을 눈여겨본다. 가감 없이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사희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3개월 정도 됐습니다.”
“3개월 동안 나쁜 걸 배우셨네.”
순간 적의를 잃고 있던 사희의 가슴에 불길이 치솟았다. 뭔가에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희는 상기된 얼굴로 남자를 바로 바라보았다.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내가요?”
“센터 규칙이 불만이시면 사무실에 가셔서 정식으로 항의하세요.”
“여기 강사라고 하지 않았나요?”
“네,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거고요. 불만의 방향이 아래로 향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회원님. 해결을 원하시면 방향을 위로 하세요.”
사희의 빳빳한 반응을 예상치 못했는지,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뜬다. 이것 봐라? 하는 눈빛이었다. 그는 곧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쳐들었다. 비뚤어진 각도로 사희를 본 남자가 오른쪽 입술을 끌어당기며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따져볼 것도 없이, 하라면 한다?”
“을이라서요. 갑이 하는 일을 따지지 않는 게 을의 신상에 좋거든요. 그리고 이게 좋고 나쁨의 기준이 있는 일인가요? 일종의 관행이라고 보는 편이 낫지 않나요?”
남자는 또박또박 받아치는 사희의 태도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살짝 치뜬다.
“아주 재미있는 태도를 가진 강사님이시네.”
남자가 차갑게 웃는다. 그것은 미소가 아니었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것이 낫겠다 싶을 만큼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사희의 얼굴에 정확하게 꽂혔다. 그 눈에는 심연을 알 수 없는 늪처럼 사람을 빨아 당기는 힘이 있었다. 사희의 시선이 자석에 끌리듯 다시 남자에게 달라붙는다.
홀리듯 바라보고 있다가 사희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지금 한가하게 남 얼굴에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암수 다정히 서로의 호감을 확인하는 한가로운 시간이 아니니까.
“강사님 성함이 뭡니까?”
남자가 물었다.
“그건 왜 물으시죠?”
“컴플레인을 걸려면 이름을 알아둬야 하지 않을까?”
“…….”
“이름.”
말문이 막힌 사희에게 남자는 다시금 단답으로 물었다. 사희는 다시 고개를 쳐들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사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가, 볼멘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이사희입니다. 그럼 회원님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
“그걸 왜 궁금해하죠?”
“저도 알아두려고요. 없던 일까지 부풀리시면 곤란하니까.”
사희의 맹랑한 답을 들은 남자가 마치 눈이 부신 것처럼 미간을 좁히더니 피실 웃음을 터트렸다.
“이름.”
사희는 조금 전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단답으로 되물었다.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입술을 당겨 씩 웃었다.
“겁이 없는 을이시네. 근본 없는 자존심 좀 다쳤다고 아무 데나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시고.”
“뭐라고요?”
불똥이 튄 눈으로 바락 대드는 사희를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던 남자가 이내 몸을 돌렸다. 더는 그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뜻이었다. 황당하다 못해, 분해서 온몸에 빠르게 피가 돌았다. 사희의 흰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뭐 저런 개새끼가 다 있어?’
사희는 차마 뱉지 못하는 육두문자를 속으로 씹으며 이를 갈았다.
바로 그 순간, 돌아서 걸어가던 남자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돌리더니 황당해 말문을 잃은 사희를 보았다.
“내 이름은 이동하입니다. 또 보죠, 이사희 씨.”
***
사무실 문 앞에서 몇 분간 망설이던 사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와서도 바로 말을 꺼내 놓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희를 본 사무실 직원의 표정이 의아하다.
“무슨 일이세요, 강사님?”
기다리던 직원이 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말문을 연다.
“혹시 제 앞으로 컴플레인 들어온 거 없었나요?”
“컴플레인이요? 글쎄요. 그런 거 없었는데.”
직원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근처에 앉은 다른 직원에게도 그런 불만 사항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역시 모른다는 반응이었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잠잠하지. 사희는 며칠 전, 트러블이 있었던 남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낼 것처럼 굴던 남자에게서 그 어떤 리액션도 오지 않고 있다. 그뿐인가. 그 뒤로 사희는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사희의 입장에서야 조용히 넘어가 준다면 그야말로 땡큐지만, 이렇게 어영부영 넘길 것처럼 보이지 않던 남자가 잠잠한 것은 아무래도 찜찜한 일이었다. 처음 며칠은 신경이 쓰였고, 좀 지나선 궁금하더니, 하물며 나중엔 기다리게 되었다.
부인할 수 없다. 자꾸만 수영장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비슷한 체격의 사람이 지나가면 덜컥 가슴이 덜컹하는 기분이 들었다는 것은 분명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다. 그 관심의 진의까지는 불투명하지만.
헤어질 때 분명히, ‘또 보죠.’라고 인사했단 말이지. 그냥 겁이나 줘보겠다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그녀와는 달리 그는 그 날의 일을, 그리고 그녀를 완전히 잊고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홀로 마음 졸인 시간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사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직원이 혼자 생각에 빠져있는 사희를 부른다.
“강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