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봉투 안에는 여러 경제 기사의 사본이 스크랩된 파일이 담겨있었다.
‘(주)혜석의 지주회사 전환, 신속 투명한 경영체계 정착 선언.’
‘혜석유통 이경민 상무, 부사장 승진. 오너 일가(一家) 지배력 강화 가속화에 들어가나.’
‘이경민 부사장의 자리 굳히기에 일등공신이 된 노바 상장.’
‘(주)혜석의 친자 승계, 이변은 없나.’
기사는 이종학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사이 혜석그룹에서 일어난 일들을 나름의 해석을 달아 풀어놓고 있었다. 대부분 이종학 회장의 장자인 이경민 부사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갖가지 유추와 정보들이었다. 특별히 신선할 것도 없는 내용이었기에 무성의하게 페이지를 넘겨 가던 동하는 파일을 덮기 직전, 몇 장의 공백 뒤, 제일 마지막 장에 붙은 기사를 발견했다. 이름도 낯선 3류 경제지에 실린 칼럼이었다.
‘(주)혜석 지주회사 체계 정착화의 마에스트로, 윤재화 전무. 그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 혜석.’
그 칼럼이 혜석의 차기 주자로 주목하는 인물은 뜻밖에도 이경민 부사장이 아닌 그의 외숙부 윤재화 이사였다.
‘윤재화라고?’
하나 그게 전부였다. 봉투에 적힌 이종학이라는 친필 외에 이 회장은 다른 어떤 메시지도 적지 않았다.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는 속 모를 이 회장의 성정은 여전했다. 어쩌면 그랬기에 동하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한국을 등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났을 때에도 한마디 인사조차 덧붙인 적 없던 아버지가 돌연 뜻 모를 액션을 취해왔다는 것은 그만큼 중대하고 위급한 일이라는 뜻일 것이라는 직감이었다.
그렇다면 이 회장이 보낸 신호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이 회장의 병이 깊어지면서 일선에서 손을 놓은 지 벌써 6년째, 올해만 해도 큰 수술을 벌써 두 번이나 받은 참이다. 사실상 이종학의 시대는 끝이 났다. 이제는 후계 승계 문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 알음알음 돌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절차가 따르기는 하겠지만 종국에는 이 회장의 자식이 일련의 과정 끝에 자리에 앉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부의 세습이니 뭐니 뒷말은 있어도 결국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 요청하신 자료요.”
수찬이 잘 봉해진 서류봉투를 동하 앞으로 건넨다. 동하는 무겁게 잠겨있던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마른 얼굴을 쓸어내린다.
“기척 좀 해. 하여간 사람 놀라게 하는 것도 재주라니까.”
동하가 서류를 받아들며 괜한 시비를 건다. 어차피 감정을 담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없는 농담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수찬은 빙긋 웃기만 할 뿐이다.
서류를 꺼내 빠르게 읽어 내린 동하는 뭔가 석연찮은지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영업이익이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네.”
“네. 작년엔 평년치를 유지하면서 경쟁사보다 1.3% 차이로 앞서긴 했지만, 보시다시피 그 업체가 2%대 성장을 기록했잖아요. 그러니 사실 선방이라고 보긴 좀 어려워요.”
“혜석 유통에서 빠진 만큼 경쟁사 영업이익이 올라간 셈이네.”
“그렇죠. 사실 혜석의 기존 사업은 큰 문제가 없어요. 이 사업들이 혜석의 영업이익을 책임지고 있기도 하고. 다만 보시다시피 이경민 부사장이 취임하면서 핵심기획사업으로 진행했던 대형쇼핑몰 사업과 할인점 사업, 온라인쇼핑 사업 부분에서 계속해서 영업 손실이 감지되었고, 그 폭이 점차 커지고 있어요. 적자전환이 코앞이에요. 현재로서는 노바 정도가 체면치레를 하고 있어요.”
“위기에 대한 대처는?”
“작년에 영업 손실이 있었던 각 부문의 대표이사를 교체했어요. 혜석의 첫 외부인사 선임이었던 데다, 철저한 성과위주의 전문인 중용이었죠. 이게 혜석의 변화와 혁신 추진이라는 관점에서 주목을 받았어요.”
“반발은 없었나?”
“들리는 이야기로는 이사 선임이나, 주주 민심 달래기에서 윤재화 전무가 큰 힘을 발휘했다고요. 이경민 부사장의 경영능력을 의심하며 주주들이 동요할 때마다 늘 그랬대요.”
서류를 내려놓은 동하는 피로한 듯 눈을 감았다.
와병 중인 이종학 회장을 대신해 경영일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경민의 경영실적은 지표상으로는 긍정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위기상황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신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리스크가 발생하고는 있었지만, 현재까지는 세대교체과정에서의 몸살 정도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혜석의 기존 사업의 기저를 탄탄하게 유지하는 한, 이경민 부사장의 승계는 문제없이 진행될 것이다. 윤재화와 윤여화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등에 업고 있으니, 이경민은 안전하고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종학 회장은 무엇을 염려한 것일까. 동하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회장님, 막으라고 부르신 겁니까, 도우라고 부르신 겁니까.’
***
눈부신 조명 아래 새파란 풀장에 대비되어서일까. 아이의 피부가 유난히 더 창백해 보인다. 혜석그룹의 아이. 이 특별한 아이의 강습을 위해서 수영장은, 월요일과 수요일 오후 2시간 동안 회원들의 출입을 막는다.
수질 점검을 위한 브레이크타임이라고 명명한 이 시간에는, 심지어 다른 강사들도 출입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출입할 수 없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다. 권력과 돈을 가진 자의 피라는 것, 참으로 대단한 벼슬이 아닐 수 없었다.
“재민아, 몸에 힘을 조금 더 풀어볼래?”
사희는 빳빳하게 굳어있는 아이의 어깨 밑으로 팔을 넣어 부드럽게 이끌었다. 아이는 대답도 반응도 없이 그저 마른 어깨를 조금 더 움츠렸을 뿐이다.
두 달 반이라는 시간 동안 사희는 아이에게서 대답다운 대답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올해 여덟 살이 된 이 아이는 비단 과묵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입술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닫혔기 때문이다.
“자, 내가 옆에 있으니까 겁먹지 말고 한번 앞으로 조금씩 나가보는 거야. 알겠지?”
말을 마친 사희가 아이의 어깨를 받치고 있던 손을 살며시 뺐다. 그와 동시에 아이는 바로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아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며 레인에 매달린다. 사희는 얼른 다가가 아이의 팔을 잡았다. 사희의 손을 잡은 뒤에야 아이는 조금 진정이 되는 눈치였다. 오늘 하루만도 벌써 오십 번도 넘게 반복하고 있는 일이었다.
“재민아, 괜찮니?”
풀 밖에 있던 여자가 깜짝 놀라 풀 가까이로 다가온다. 40대로 보이는 단정한 인상의 여자는 재민이를 돌보는 도우미 여성이었다. 그들끼리는 유 선생이라고 칭했다.
“둬요, 그대로.”
메마른 목소리로 유 선생을 말린 사람은 아이의 엄마다. 사희는 아이의 엄마를 슬쩍 보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유 선생과는 다르게, 벤치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아이 엄마는 아까부터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는 오늘도 언제나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숨은 쉬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여자의 이름은 차세령. 하지만 사희는 여태껏 그녀를 그 이름으로 부른 적도 없었다. 그녀와는 최대한 주어를 생략한 짧은 문장으로만 대화한다. 굳이 호칭을 불러야만 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는, 적당히 사모님이라고 얼버무렸다.
이재민의 상태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이 수영장 소속 강사들이 아이를 지도하는데 난색을 표했다던 것이 전혀 무리가 아니다.
“재민아, 우리 조금 쉬었다가 할까?”
사희는 아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아이를 풀 가장자리로 이끈다. 아이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제 엄마를 슬쩍 보더니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턱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강하게.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놀랐었지만, 이런 일이 워낙 반복된 탓에 사희는 익숙한 듯 아이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한참 동안 건조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던 차세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무리하세요.”
유 선생에게 일말의 지시를 남긴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 재민이의 표정이 쓸쓸해 보였다.
‘찬바람 쌩쌩 부네. 남도 저렇진 않겠다.’
사희는 도에 지나치게 냉정한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들키지 않게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첨벙. 그때, 어디선가 크게 물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2 레인의 끝에서 하얗게 부서진 물거품이 출렁이는 것이 보였다. 분명 이 시간에는 누구도 출입이 안 되는데, 대체 누가?
“거기 누구세요?”
사희의 목소리가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천장을 웅웅 울린다.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밖으로 나가던 차세령도 놀랐는지 사희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굳어있었다.
사희는 의문의 존재가 물 위로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오랜 잠영 끝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흰색 수영모를 쓴 남자였다. 긴팔을 쭉 뻗어 빠르게 물살을 가르는 남자의 자유형 속력은 얼핏 보아도 상당히 빨라 보였다. 사희는 저도 모르게 입 속으로 숫자를 센다. 1, 2, 3, 4…….
반환점을 돌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약 56초. 잠영을 했던 시간까지 얼추 더해보면 59초 정도의 속도이다. 전성기 시절, 그러니까 아시안 게임에 나갔던 그해, 사희의 100미터 자유형 기록이 58.99초였던 것을 생각하면 남자의 실력은 꽤 놀랄만한 수준이었다.
남자는 연속해서 다섯 번 정도 레일을 돌더니 천천히 물 밖으로 나왔다. 사희는 물 밖으로 드러난 남자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광활한 어깨와 등판이야 수영강사들의 전유물이지만, 머리끝부터 발꿈치까지의 스크롤이 상당한 저 장신(長身)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몸 좋기로 소문난 이곳의 강사 중에서도 저렇게 장대한 골격은 본 적이 없다.
분명 낯선 이였다.
저 사람, 대체 이곳에 어떻게 들어온 거지? 괜히 사람을 잘못 들였다간 오해를 받거나, 사고가 생길 수도 있으니 확인이 필요했다.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하세요.”
멍하니 서 있는 사희를 향해 유 선생이 작고 빠르게 속삭였다.
유 선생의 반응을 보아하니 고용인이 지금의 이 상황을 몹시 달갑지 않아 한 것이 분명했다. 차세령은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다. 사희는 마음이 조금 더 급해졌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고용인의 심기를 거슬러 보았자 좋을 것이 없었다.
사희는 물 밖으로 훌쩍 튀어 나가 남자가 사라지는 쪽을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