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저기요. 이번 주에 온다고 하셨으면서 이러시면 안 되죠?”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수리가 너무 밀려 있어서 도저히 시간이 안 되네요.
“시간이 안 된다고 하면 끝이에요? 저는 더워서 말라 죽으라고요?”
-제가 몸이 두 개도 아니고… 어쩔 수가 없지 않습니까.
열을 내니 더운 기운이 더 올라왔다. 찜통이 따로 없었다. 차라리 찜질방 불가마가 더 시원할지도 모른다는 망상까지 들었다. 어떻게 이리 더울 수가 있을까.
“다음 주에는 정말 오실 수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갈 테니까 이번 주만 좀 봐주세요.
송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젓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분도 사정이 있으시겠지. 그렇게 생각을 해보려다가도 이 더위에 에어컨도 없이 견디는 건 정말 끔찍했다. 그냥 회사를 나갈까. 최소한 에어컨은 빵빵하게 나올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그럴 거면 차라리 동네 카페가 낫지 싶었다. 그렇다고 카페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올해는 연일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20년 만에 찾아온 더위에 시민들은 밖에 나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깁니다…]
티비에서는 날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20년 만의 폭염이라는데 에어컨은 고장이 나서 작동을 하지 않았다. 지나가 에어컨이 고장 났다고 했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자신의 일로 닥치니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바로 전화를 해서 AS를 요청했지만 한참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답변을 받았다. 언제쯤 가능할지는 기사가 연락을 줄 거라는 말만 남긴 채.
송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은지 AS 기사는 너무 바쁘다면서 계속 방문을 미뤘다. 더위에 지친 송이는 송이대로 짜증이 나고, 기사는 기사대로 바빠서 짜증을 냈다.
차라리 밖에 나가서 나무 그늘 같은 곳에 앉아 있는 게 덜 덥지 않을까. 집에만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밖에 나가면 그래도 바람도 불고 나무 그늘은 왠지 시원할 것 같았다. 샤워는 해도 그때뿐이었다. 씻을 때는 시원해도 10분만 지나면 다시 후덥지근해지고 목에 땀이 맺혔다.
‘이거 자료 정리해서 월요일 오전에 내 책상에 갖다 놔.’
조 부장은 역시나 사우나를 갔다가 오후에 들어와 송이를 불러 업무를 주었다. 금요일 오후에 업무를 주고 월요일 오전까지 해오라는 건 멕이려고 작정을 했다는 뜻이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저 혼자 다 해요?’
‘그 잘난 부사수 얻다 쓰려고. 국 끓여 먹게?’
조 부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나 지껄이면서 당장 나가라고 했다. 이건 명백히 송이와 지훈을 타깃으로 한 보복이었다.
두 사람이 조 부장의 심기를 자꾸 건드리니 엿이나 먹어보라며 주말에 일을 해오라는 것이었다. 조 부장이 건네준 자료를 보니 급한 것도 아니었다.
더워 죽겠는데 주말에 일까지 하려니 정말 불쾌지수 때문에 폭발할 지경이었다.
‘혹시 주말에 바쁘면 나 혼자서라도 할게요.’
웬만하면 혼자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혼자 할 수 없는 양이었다. 지훈에게 넌지시 말을 해봤더니 대뜸 답이 돌아왔다.
‘우리 주말에 같이 일하는 거예요?’
얘 지금 웃었나? 주말에 상사가 일거리를 주는 상황에서 웃는 또라이가 이 세상에 있을까.
일도 나눠줘야 하는데 더워서 집중도 되지 않았다. 식탁에 노트북을 펴놓고 있는데 오래된 노트북에서 올라오는 열까지 후끈거렸다. 술 먹을 돈만 아꼈어도 신형 노트북 하나 사고도 남았을 텐데.
3년을 넘게 쓴 노트북은 가끔 버벅거리기도 하면서 열기를 마구 토해냈다.
“아, 돌겠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매미 우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 소리가 더위를 더 가중시키는 기분이었다. 참지 못하고 냉장고 쪽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머리를 냉동실에 쑥 들이밀었다.
“하….”
머리 부분이나마 시원한 기운이 감싸고 돌아 조금은 살 것 같았다. 머리를 더 안쪽으로 들이밀면서 뜨거운 정수리 부근을 시원하게 해보려고 애를 썼다.
‘전기세 나가 이것아! 문 안 닫아!’
어렸을 때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너무 더울 때는 아빠와 번갈아가며 이 짓을 하다가 엄마에게 들키면 바로 등짝을 맞았다.
문득 전기세 걱정이 되어 고개를 밖으로 빼고 문을 닫았다. 머리는 시원한데 목 아래로는 뜨거운 기운이 여전했다. 아까 머리를 저 안에 박고 있을 때는 좋았는데 하고 나니 기분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곧 다시 더워질 것은 뻔했으니까.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도 차갑지가 않았다. 최대한 파란색 쪽으로 수전을 돌려도 미지근한 물이 나왔다. 어느 나라에서는 폭염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한다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인 건가.
그렇게 생각을 해보려다가도 막상 더운 기운이 닥치면 제자리였다. 왜 에어컨을 미리 확인해두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만 물밀 듯이 밀려왔다.
Rrrrrrr.
다시 식탁에 앉아 노트북에서 작업할 자료를 찾아보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개신입’
지훈의 전화였다. 지훈에게 번호를 받고 ‘김지훈’으로 저장을 해두었는데 화장실을 간 사이에 지나가 이름을 바꿔놓았다. 나중에 알아차렸는데 딱히 나쁘지 않아서 그대로 두었다. 개 같은 신입의 줄임말이라나.
“여보세요.”
-우리 언제 작업해요? 조 부장이 준 거.
“지금 확인하고 있는 중이에요. 곧 톡으로 보내줄게요.”
얘는 왜 이렇게 보채. 일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따로 만나서 얘기할 건 없어요?
“얘기할 게 뭐 있어요. 이따 파일하고 같이 적어서 보내줄게요.”
-그래도요. 조심해야 할 부분 같은 건 직접 보고 설명해준다든가.
“그럴 필요 없는 작업이에요. 각자 하고 합치기만 하면 되니까.”
자꾸 뭘 보재. 봐 봤자 머리만 아프지. 그냥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지금은 장단을 맞춰줄 기분이 아니었다.
-추워.
춥다고? 뭔 소리야.
-이러다 감기 걸리겠네. 잠깐만요.
얘만 지금 딴 세상을 사는 건가. 누구는 매미 소리를 벗삼아 불쾌지수를 팍팍 높여가고 있는데 춥다니.
“무슨 소리예요. 춥다니?”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놔서요. 추워서 온도 높였어요.
그때 머릿속에 전광석화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대로 고개를 올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 참! 생각해 보니까 만나서 얘기할 게 있었네.”
누가 들어도 어색한 로봇 연기를 펼쳤지만 송이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 * *
“들어오세요. 제가 가면 되는데.”
“올라오는 게 뭐 어렵다고.”
송이는 문이 열린 작은 틈새로 새어 나오는 시원한 바람에 조금 전까지 치솟았던 불쾌지수가 급격히 낮아지는 것을 느꼈다.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오라는 지훈의 손짓에 송이는 조심스레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지난번 지훈의 집에서 자고 난 이후로 처음 와 보는 이곳. 그때와 지금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그때는 이곳에서 1초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면 지금은 1초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완전히 지훈의 집으로 들어와 안착하자 내부를 감돌고 있던 찬 공기가 그녀의 몸을 식혀주었다.
“하아….”
에어컨을 발명한 사람은 노벨평화상 정도는 받았겠지. 사람을 지옥에서 한순간에 천국으로 인도해준 이 발명품에 송이는 깊은 감사를 올렸다. 한껏 예민하던 사람에게 이렇게 평화를 내려주다니.
“아까는 얘기할 거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착각을 했더라고. 착각을. 하하. 요즘은 가끔 깜빡깜빡하고 그러네.”
낯짝도 두껍지. 송이는 자신이 봐도 뻔뻔한 행태에 자괴감이 들었다. 이깟 에어컨 좀 쐬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거기 앉아요.”
지훈은 소파를 가리키더니 잠깐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송이 혼자 남게 되었다. 거실 구석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에어컨. 송이의 집에 있는 중고 에어컨과는 다르게 따끈따끈한 신형이었다. 이사를 올 때도 최대한 아끼려고 이전 엄마의 가게에 있던 낡은 에어컨을 가지고 왔다.
송이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후다닥 에어컨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티의 목 부분을 앞으로 쭉 뺀 채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곳에 갖다 댔다.
“아아….”
찬 공기가 옷 안으로 쑥 밀고 들어와 아주 시원했다. 얼굴도 찬 공기로 샤워를 한번 해주었다. 이 에어컨은 향기도 나는 것 같았다. 너무 좋아서 바람을 쐬고 있다가 지훈이 다시 거실로 나오는 소리에 후다닥 소파로 뛰어갔다.
못 봤겠지.
송이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훈은 송이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다리가 워낙 길어서 순식간에 당도했다.
지훈이 바로 옆에 앉자 소파가 흔들리며 송이의 몸도 같이 흔들렸다. 그가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선배, 우리 무슨 얘기하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