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지훈은 어제도 차를 타고 같이 퇴근하자고 권했다. 오늘 아침도 송이가 나오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차창을 쓱 내리더니 송이를 불러 타라고 권했다. 하지만 송이는 괜찮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차를 얻어 타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타는 게 양심에 걸리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이제는 회장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버리니 알 수 없는 어색함도 있었다. 차 안에서 단둘이 한 시간을 넘게 달려야 하는데… 지훈과 같이 있다 보면 계속 김 회장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목이 조여오는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했다.
“출퇴근하기에는 대중교통이 편해요.”
편도로 2시간. 왕복 4시간. 콩나물시루보다 더 빽빽하게 사람들로 들어찬 전철에 몸을 구겨 넣을 때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정말 감사할 일인가 몇 번이고 생각을 해보았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동물만이 이 전철 안에 몸을 구겨 넣을 테니까. 몸집이 큰 사람들에 둘러싸여 조금도 틈이 없을 때는 몸이 종이쪼가리처럼 짜부가 되는 모습도 상상해보곤 했다.
“뻥치지 말아요. 출근할 때마다 토할 것 같다고 최 대리님하고 하는 얘기 들었어요.”
“왜 남의 얘기를 엿들어요?”
“이상하게 선배가 하는 얘기는 더 잘 들려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진짠데.”
얘가 왜 자꾸 삐딱선을 탈까. 박경수가 회사 근처에 찾아 왔던 그날부터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타기 싫다는 사람한테 자기 차는 왜 계속 타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정말 차 안 탈 거예요? 자도 되는데. 안 놀릴게요.”
이번에는 지훈이 먼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까 진만이 약속을 하자고 할 때는 인상을 팍 쓰면서 억지로 손가락을 걸던 인간이. 같이 차를 타고 가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아침에 차가 막히니 심심해서 그런가. 상사를 무슨 자기 심심풀이 땅콩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괘씸했다.
회장 아들이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하고 싶은 대로 살았을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은 웬만하면 다 하면서 살았겠지. 김 회장이 1년 동안 회사에 겨우 묶어 두었다는 걸 보면 김 회장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을 송이가 어떻게 컨트롤 할 수 있을까. 눌러앉으라고 하여 이 회사에 계속 다닐 인간이었으면 김 회장이 송이를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제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반항을 해보는 거였는데. 꿈틀이라도 대보는 건데. 이미 깊은 늪에 발을 담가버린 기분이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빠져나올 수 없는.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송이가 지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넌지시 물었다. 나는 이미 제 정체를 다 알고 있어. 이렇게 텔레파시를 보내면서.
“있어요.”
“뭔데요?”
“오늘 진짜 차 안 탈 거예요?”
“안 탄다고!”
이게 아직도 장난질이었다. 남은 심각한데. 질문이 이상했나. 질문을 더 노골적으로 해보았다.
“나한테 안 한 말은 없어요?”
“음….”
지훈의 얼굴에 고민이 서려 있었다. 그래, 말을 해봐. 네 입으로 한번. 그래야 진짜 이 거짓말 같은 일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수석 의자 뒤로 쭉 제끼면 진짜 편해요. 특수 기능도 있는데. 제끼고 자도 돼요.”
“그런 거 말고!”
“그럼 딱히 없는데.”
송이는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봤자 속만 터질 것 같았다. 김지훈하고 말싸움이나 하다가는 점심시간도 다 날아가게 될 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진짜 편하다니까요. 제껴보기나 해보고 말해요.”
지훈은 송이의 뒤를 졸졸 따라 나왔다.
* * *
“아직까지 별다른 건 없어 보입니다.”
“계속 주시하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즉각 보고하고.”
“네, 알겠습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는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하고 회장실을 나갔다. 김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창 쪽으로 걸어가 밖을 바라보았다.
아주 햇살이 밝은 날씨였다. 밖은 찌는 듯한 더위가 한창이지만 회장실은 아주 적정한 온도로 안온하기만 했다.
밖은 아주 밝은데 왜 이 마음은 어둡기만 한 건지. 진수 식품은 대기업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성장을 했다. 이 정도면 할 만큼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키운 회사를 잘 물려주기만 하면 소임은 끝이었다. 남은 생은 여유 있게 유유자적 살면 된다고 여겼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었다. 장남인 명준은 회사를 물려주기에는 너무 불안했다. 뭘 하든 믿고 맡길 수가 없었다. 모든 능력이 부족했다. 이런 놈한테 이 큰 회사를 물려준다면 김 회장이 평생 일군 것들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그런 꼴은 죽어도 볼 수가 없었다.
하나 있는 딸인 희정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하겠다면서 밖으로만 나돌았다. 그때는 명준이 있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하라며 밀어줬는데 이제 와서 후회를 해봤자 소용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카드는 지훈이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해서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명준의 모친인 윤정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훈을 경계하니 김 회장도 굳이 지훈을 회사에 들여 집안에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회사만 생각해도 머리가 아픈 일들이 많은데 집안까지 쑥대밭이 되는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훈이 미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도 차라리 잘됐다고 여기며 내보냈는데, 그게 패착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윤정이 뭐라고 하든간에 애초에 지훈과 명준을 경쟁 구도로 붙여놓았어야 했다.
지훈이 돌발적인 행동을 하고, 안하무인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보다 잘 해냈다. 그리고 승부욕도 있었다. 공부에서는 1등을 놓쳐본 적이 없고, 대회에 나가서도 수상을 휩쓸었다. 관심이 없거나, 하기 싫은 것은 때려죽여도 안 하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해내는 게 지훈이었다.
그런 지훈에게 이 회사를 맡긴다면 어떻게든 잘 굴려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제안은 지훈에게도 솔깃할 만했다. 대기업을 물려준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거절을 할까. 그런데 이 예측 불가능한 아들놈은 대번에 거절을 했다.
‘싫은데요.’
‘싫다니?’
‘김명준 있잖아요. 형 시켜요.’
누구는 임원 자리 하나라도 앉고 싶어서 줄을 대고, 접대를 하고, 별짓을 다하는데 이건 진수 식품을 떠서 입에다 먹여준다고 해도 걷어찼다. 처음에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했다. 자존심이 상한 김 회장은 하기 싫으면 말라고 호통을 쳤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희한했다. 지훈이 그 자리에 적격이라는 생각이 한번 들기 시작하니 아쉬워지는 쪽은 김 회장이었다. 지훈이 저렇게 뻗대고 있으니 더 회사에 눌러앉히고 싶었다. 그렇게 애원하다시피 하여 한국에 1년 동안 머물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계속 이 회사를 다니게 할 수 있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은 뚜렷하게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진수 식품을 경영하면서 그 많은 장애물을 만나고, 난관을 겪어왔음에도 항상 답을 찾아냈던 김 회장이었다. 그런데 자식놈 일만큼은 쉽게 답을 낼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자주 보이는 여자가 한 명 있습니다.’
‘누군데.’
‘한송이라고, 도련님의 사수입니다.’
한송이? 이름이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 가물거린다는 건 들어본 이름이라는 건데.
김 회장은 기억을 거듭하다가 몇 년 전에 당돌하게 강연에서 질문을 건넸던 여자를 떠올렸다. 그때의 특이함만큼이나 이력도 아주 독특했다. 그 나이에 장사를 크게 해봤다가 말아먹기까지. 초등학생 때부터 반장이든, 학생회장이든 도맡아 하고 학벌도 괜찮았다.
송이의 이력이 빽빽하게 적혀 있는 종이를 살펴보며 곰곰이 생각하던 김 회장은 한 가지 생각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라면 지훈을 휘어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라고 하던데, 둘 다 범상치 않은 것들이니 잘만 엮으면 지훈의 일도 잘 해결되지 않을까.
어떤 확실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김 회장도 답이 안 나오는 이 문제가 답답하다 보니 행복회로라도 돌리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로 한송이를 불러들이라고 했다.
처음 회장실에 들어올 때는 아주 딱딱한 얼굴이더니 대화를 할수록 다채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하고 아드님은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그런 게 걱정이시라면 정말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생각지도 않은 부분이었다.
지훈이 여자에게 관심을 둘 리가. 여자를 만난다는 얘기를 생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본인도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고.
회사에 앉히는 것도 힘든 판인데 아들놈의 여자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런데 한송이라는 이 아이는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며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듯이 고개까지 젓고 있었다.
차라리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꼬실 수 있으면 꼬셔보라고. 그놈이 넘어갈 것 같냐고.
회장이 되어서 일개 대리를 불러두고 자식 이야기를 꺼내는 게 결코 쉬운 건 아니었다. 아니, 아주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고 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이러다가 1년이라는 시간은 훅 가버리고 만다. 그때 가서 후회해봤자 이미 기차는 떠날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으려면 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했다. 그 시작이 한송이였다.
“괜한 짓을 했나.”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며.
그때는 이 결정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상상도 못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