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잔에는 얼음과 함께 커피가 가득 들어 있었다. 비서는 조용히 인사를 하고 회장실을 나갔다. 송이는 잔을 들고 목을 축였다. 갑자기 목이 바싹 탔다.
“이 정도면 많이 알고 있는 거 아닌가? 더 얘기해 볼까?”
“아니요. 충분합니다.”
차가운 커피를 빠르게 마셨더니 머리가 지잉, 하고 울렸다.
김 회장은 송이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사는 곳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그녀가 거쳐온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대학 때는 텍사스도 다녀왔던데. 장사도 하고.’
남은 목이 타는데 김 회장은 뭐가 좋은지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족관계나, 가족들에 대한 것들도 꿰고 있을 것이다. 송이의 주변에 어떤 이들이 있는지, 친구는 누가 있는지 그런 것들까지 전부 다.
그런데 이런 것까지 왜 알려고 드는 거지. 아들의 사수라는 이유만으로는 너무 과했다. 자식을 과잉보호하기 위한 부모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들이 많았다.
“얼굴이 왜 굳어 있어. 기분 나쁜가?”
“썩 좋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제가 다니는 회사의 회장님이라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건 엄연한 사생활이었다. 그리고 사람 뒤를 캐고 다닌 걸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가. 대기업 회장이면 다인가. 송이는 욱하는 마음에 속에 있는 말을 뱉고 말았다.
“왜 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으신지도 잘 모르겠고요.”
김 회장은 미지근하게 탄 차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차에서 풍기는 구수한 향이 송이에게까지 퍼졌다.
“그걸 지금부터 알려주려고.”
돌연 김 회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까부터 지금까지는 위압감이 있기는 했지만 때로는 부드러운 모습도 보여줬다면, 지금은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면서 눈빛 자체가 변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업가 같은 모습이랄까.
“자네한테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
“제안이라뇨…?”
“긴장하지 마.”
김 회장은 다시 표정을 풀고 입꼬리를 울리며 웃더니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송이는 경직된 얼굴을 풀려고 애를 썼다. ‘제안’이라는 말이 나오자 너무 어리둥절해서 이성이 잘 작동하지 않았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거지?
제안이라고 하면 김 회장이 원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송이가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김 회장은 아직 제대로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송이는 혼자 머릿속에서 회로를 돌리며 여러 가능성을 떠올렸다. 근래 들어서 가장 뇌가 팽팽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지훈이에 관한 거야. 자네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믿고.”
이게 김 회장의 목적이었던 건가. 송이를 직접 불러낸 이유였다.
지훈에 대한 제안. 송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아직 열리지 않는 김 회장의 입 안에는 엄청난 것이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가 나올지 너무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듣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상반된 생각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게 되는 순간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이유는 뭘까.
* * *
“여름엔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뜨끈한 국밥 한사바리 해줘 제맛이지.”
진만은 에어컨이 펑펑 나오고 있는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그릇째로 들어 해장국을 들이켜고 있었다.
“제대로 풀리네.”
“어제도 드셨어요?”
“인사팀 김 과장하고 한잔했어. 알지? 내 입사 동기.”
그게 자랑인가. 입사 동기는 대부분 과장까지 진급했는데 혼자 대리를 달고 있으면서도 진만은 그런 걸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 해장국집은 티비에도 몇 번 나올 정도로 아주 유명해서 전날 술을 마신 직장인들의 메카이자 핫플레이스였다. 다들 와이셔츠의 가장 윗단추는 기본으로 풀어주고 휴지로 땀을 훔치면서도 해장국을 열심히 먹었다.
이 집의 해장국은 송이도 인정했다. 숙취 때문에 오전 내내 속이 느글거리다가도 여기에서 한 그릇 뚝딱하면 알코올이 제대로 씻겨 내려가는 기분에 오후에는 좋은 컨디션으로 일 할 수 있었다.
“어때, 김지훈. 여기 괜찮지?”
“짠 것 같기도 하고. 고기가 쉬었나.”
진만의 물음에 지훈은 그릇에 대고 냄새를 맡더니 썩 좋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까탈스러움은 여전했다.
“맛만 있구만. 먹을 줄을 모르는구만. 깍두기 국물도 팍팍 넣어서 먹고 말이야.”
진만은 보란 듯이 해장국을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씹으며 얼마나 맛있냐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옆에 있는 지훈은 몇 숟가락 뜨지도 않으면서 국밥만 휘휘 저어댔다. 이런 해장국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 보이는데 대체 왜 따라온 건지.
어제 과음을 하여 해장을 하러 가겠다는 진만을 따라나섰다. 오랜만에 이 집의 해장국이 먹고 싶기도 했다. 웨이팅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는 맛집이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점심을 먹지도 않고 수면실에 짱박혀서 잠이나 자던 지훈이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배가 고파서 저러나 싶었는데 시원찮게 숟가락질을 하는 걸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뇨.”
송이는 자신도 모르게 지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시선을 그릇으로 돌리고 해장국을 먹었다.
‘자네가 해줘야 될 건 딱 하나야. 지훈이가 이 회사에 오래 붙어있게 만들면 돼.’
어제 김 회장이 제안을 하겠답시고 내뱉은 말이었다. 처음에는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지훈이는 1년만 여기 있다가 미국으로 돌아갈 거야. 1년도 겨우 묶어두기는 했는데 이대로 보내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나는 지훈이한테 이 회사를 물려줄 생각이야. 그러려면 이 회사에 계속 있게 만들어야지.’
저 껄렁한 인간한테 이 회사를 물려준다고? 아무리 김 상무가 손을 대는 것마다 실패한다고 해도 차선책이 김지훈이라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았다. 첫날부터 회사 다니기 싫다고 티를 팍팍 내던 인간한테 이 거대한 회사를 맡긴다고?
‘자네라면 아주 잘할 수 있을 거야. 자네의 추진력과 자신감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걸세. 살아온 이력이 다 말해주지. 거기다가 회사든, 사는 곳이든 지훈이와 바로 지근 거리에 있으니 이보다 더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리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그 정도 능력이 되니 이런 회사도 일궈내지 않았을까. 송이가 살아온 이력과 지훈을 이 회사에 주저앉히는 게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성공한다면 그 공로는 섭섭지 않게 대우해주지.’
김 회장은 테이블 위에 있는 신문을 펼쳐들더니 송이의 앞에 내밀었다.
[기성세대는 물러가라! 젊은 임원들이 몰려온다]
제목이 크게 박혀 있는 신문 기사에는 임원으로 보기에는 젊은 외모의 사람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 회사의 운명이 자네의 손에 달려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인데 성공하면 내가 자리 하나 마련해주지 못할까. 바로는 마련하는 게 어렵더라도 향후 몇 년 안에 가능할 수도 있겠지.’
송이는 침을 크게 한번 삼켰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이 다 있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욕심이 나기도 했다. 김지훈 하나 회사에 주저앉히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그걸 하게 되면 저런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고?
‘제안에 응할 텐가?’
송이에게 선택할 수 있는 답이라고는 하나뿐이었다. 이미 회장에게 지훈이 아들이라는 말을 들었고, 지훈이 김 회장의 아들이라는 건 집안사람들만 아는 극비에 속한다고 했고, 송이는 그 극비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김 회장의 제안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송이의 입을 막기 위해서 무슨 협박을 할지도 모르니.
‘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생각을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하는 게 좋을걸세.’
이건 거의 반협박이었다. 송이는 응할 수밖에 없는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이게 잘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볼수록 진짜 같단 말이야. 이거 어디서 샀는지 언제 알려줄 건데?”
진만이 지훈의 손목을 들더니 시계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저건 진짜일 텐데. 저렇게 막 만질 시계가 아닌데.
지훈은 진만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대로 놔두었다. 하긴, 회장 아들인데 저런 시계가 하나밖에 없을 리는 없을 테고. 집에 몇 개는 더 있겠지.
“이 시계 구해준 친구가 연락이 지금은 연락이 안 되네요.”
“나중에 연락 오면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주는 거다.”
“그럼요.”
유치하게 진만은 새끼손가락까지 내밀며 억지로 지훈의 손가락을 끌어 당겨 약속을 했다. 그 시계를 어디에서 샀는지 알려줘도 진만은 못 살 텐데. 1년치 연봉에 가까운 돈을 거의 다 바쳐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 리가.
그나저나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허세이니 뭐니 하면서 아닌 척 능글거리더니 진짜 정체가 회장 아들이라니. 이것도 언젠가 갑자기 말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할 생각이었겠지? 혼자 그런 상상을 하면서 즐기는 변태가 분명했다.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할 지훈의 수많은 행동들이 ‘회장 아들’이라는 타이틀 하나에 의문점이 쑤욱 풀렸다.
사실 아직도 김지훈이 김 회장의 아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와닿지 않는다는 게 더 정확한 의미일 것이다. 재벌 총수의 자식이라고 하면 티비나 기사에서만 접해 봤지 이렇게 가까이 두고 볼 기회는 거의 없으니까.
“어? 윤 대리! 밥 먹으러 왔어?”
진만은 옆테이블에 아는 사람이 있었는지 알은체를 하며 다가갔다. 송이와 지훈에게는 먼저 올라가라고 말을 하면서.
지훈은 여전히 더 먹을 생각이 없는지 그릇만 숟가락으로 휘휘 젓고 있었다. 송이의 그릇에는 국이 조금 남기는 했지만 어제 김 회장을 만난 일을 생각하니 밥맛이 뚝 떨어졌다.
“일어나죠.”
송이가 일어나려고 하는데 지훈이 입이 열렸다.
“왜 내 차 안 타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