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았나 보네. 한 대리가 몰랐던 걸 보면.”
김 회장의 말에 송이는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사장 아들이니까 대충 살고 싶다고요. 정확하게는 회장 아들이구나.’
술자리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였다. 그게 진짜였다고? 말도 안 돼.
‘저도 반 정도만 맞는 걸로 할게요.’
술자리에서 지훈이 했던 말 중에 다 진심은 아니지 않냐는 물음에 그가 했던 대답이었다. 애매하게 말을 하던 그의 음성이 귓가에 생생했다. 그때는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 절반 중에서 하필 회장 아들이라는 말이 사실이었던 거야?
송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입은 점점 더 벌어졌다.
그 뻔뻔한 인간은 자기가 회장 아들이라는 것도 다 말을 했다. 치사한 새끼. 맨정신도 아니고 술자리에서 은근히 흘리고. 정말 뒤통수를 거하게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속인 것도 아니었다. 자기 입으로 회장 아들이라고 했으니. 송이가 믿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걸 믿을 수가 있을까. 그냥 허세가 충만하다 못해 넘치는 인간인 줄로만 알았다. 첫 등장부터 뻔뻔했으니, 그냥 뻔뻔함을 타고난 인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힌트였을지도 몰랐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는 회장 아들이요’하고 외치고 다니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시시껄렁한 태도는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당장 내일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건방진 행동들은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나온 것들이었다. 조 부장이 갔던 사우나를 찾아가고, 대놓고 조 부장에게 맛이 없다고 했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 1억이 넘는다는 차. 그리고 팔을 휘감은 금빛 시계. 부티를 풀풀 풍기던 그 분위기. 모든 것이 딱 들어맞는 조각처럼 송이의 머릿속에서 완성이 되었다.
그것들이 전부 허세가 아니라 진짜였단 말인가? 만약 진만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기함을 했을지도 몰랐다. 진만이 한 번 차보겠다고 했던 그 시계가 정말….
“다시 물어보지. 김지훈 일은 제대로 하나?”
조금 전에 같은 질문을 들었을 때와 체감이 달랐다. 아까는 회장과 일개 신입의 관계였다면, 지금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 이걸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하나. 차라리 아버지가 아닌 회장이라면 대답이 더 쉬웠을 텐데.
“솔직히요?”
“솔직하게.”
송이는 잠시 고민했다. 뭘 어떻게 말해줘야 하지.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말해.”
김 회장의 다그침에 송이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살길이었다.
“정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하는 행동들을 보면 뭐라고 해야 할까….”
송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이걸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고민 중이었다.
“고민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송이는 입을 꾹 깨물었다.
“또라이 같은…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말이 헛나와서….”
아들을 또라이라고 부르는 회사 동료를 마주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할지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냥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김 회장의 중후한 목소리에 참지 못하고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런 건 나도 아는 거고.”
“네?”
“시키는 일 같은 건 잘하나?”
아들이 또라이라는데 순순하게 동의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 대화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시키는 건 곧잘 합니다. 뺀질거리는 것 같다가도 자기 일은 잘하니 신기할 때도 있고요….”
일을 곧잘 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집중을 할 때는 아주 잘했다. 집중을 하는 시간이 아주 적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밥값은 하는구만.”
밥값?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송이는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들을 이 정도 깠으면 어느 정도는 추켜세워주는 맛도 있어야 했다. 앞에 있는 사람은 김 회장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되었다.
김 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는지 말이 없었다. 송이는 자신이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뱉고 있었다.
그런데 김 회장은 왜 자신을 불렀을까. 아들의 회사 생활이 궁금해서? 단지 그것 때문에? 아직 자식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부모의 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부모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는 행동을 보면 속을 상당히 썩였을 것 같은데 얼마나 걱정이 되었을까. 많이 궁금했겠지.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김지훈 같은 자식이 있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노심초사일 것 같았다.
“궁금한 건 더 물어보셔도 됩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는 다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이렇게 자신을 불렀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대답해줄 용의도 있었다.
“자네가 지훈이 아랫집 산다던데.”
“어….”
송이는 당황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이 얘기는 또 왜 나와. 그게 지금 대화의 주제와 무슨 상관이지. 이건 어떻게 알았을까.
“맞기는 한데….”
대기업 회장인데 알려고 들면 알지 못할 게 있을까.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었다. 아들 집 근처에 같은 팀 동료가 사는 게 거슬리기라도 하는 걸까.
“거기는 동네가 어떤가. 살 만한가?”
“출퇴근하기에는 별로이기는 한데. 그래도 혼자 살기에는 괜찮습니다. 오피스텔도 많고요.”
살 만하냐고 양심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냥 쏘쏘 정도였다. 싼 맛에 젊은 1인 가구들이 많이 들어와 사는 동네였다.
그런데 김지훈은 왜 그 동네 오피스텔에 사는 거지?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아… 이건 제 기준이고요. 회장님 아드님이 살기에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도 명색이 대기업 총수 자제인데. 그런데 왜 거기서 산대요?”
“낸들 아나. 강남에 번듯한 집 놨두고 지가 지 발로 집 구해서 들어간 곳인데.”
강남에 집을 두고 경기도 그 구석진 곳으로 갔다라. 이건 정말 도저히 해석 불가였다. 도대체 왜 해석이 되는 구석이 없는 건데, 이 인간은.
“저 혹시….”
송이는 잠시 얼마 전에 보았던 막장 드라마가 떠올랐다. 대기업을 물려받을 남자와 만나는 여자가 기업의 회장을 만나는 장면. 그 자리에서 회장은 여자에게 아들과 만나지 말라고 말을 했다.
“이건 정말 그냥 드리는 말씀인데요. 저하고 아드님은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그런 게 걱정이시라면 정말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것도 걱정을 하실 것 같아서….”
송이의 목소리가 개미만 하게 쪼그라들었다. 김 회장이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훈의 회사 생활에 대해서 물어 보려면 송이 말고도 팀에 부를 만한 사람들이 많았다. 조 부장이든, 최 대리든, 진태호든.
그런데 굳이 콕 찍어 송이를 불렀다는 건,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불렀다는 건 TV에서나 보던 이유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지훈의 아랫집에 사냐고 물어본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너희 둘이 수상쩍으니 내 아들은 아예 넘보지도 말라는.
“누가 그런 걱정을 해.”
하지만 김 회장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냐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그런 반응에 송이는 민망해서 얼굴이 확 빨개졌다.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그럼 오늘 부른 이유가 단지 김지훈의 회사 생활이 궁금하기 때문인 걸까.
“걱정 안 하신다면 다행이고요….”
이곳은 에어컨도 잘 나오고 있는데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한 느낌이었다. 또 이 주둥이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내뱉어서 분위기만 이상하게 만들었다.
“다 물어보셨으면 저는 이만 가봐도….”
김 회장과 더 마주하고 있다가는 멘탈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이 진수 식품의 회장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마음만 먹으면 부서 하나 날리는 건 문제도 아닌 그런 막강한 사람이었다.
“안 끝났어.”
송이가 슬쩍 엉덩이를 떼려고 하다가 김 회장의 말에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딜 도망가냐는 듯 그의 말이 송이를 단단하게 포박했다.
이제 거의 할 말은 다 한 것 같은데. 더는 김지훈에 대해서 할 이야기도 없었다.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이야 많이 있지만 그런 걸 김 회장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내가 자네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을 것 같나.”
송이는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었다. 김 회장의 물음이 어떤 의도인지 파악해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김지훈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밝힌 것만큼이나 뜬금없었다.
“저요?”
다시 김 회장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톡톡톡 쳤다. 저 소리가 들릴 때면 불안감이 감돌았다. 아까도 저러다가 예상하지 못한 소리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