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송이는 침을 크게 한번 꿀꺽 삼켰다.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는 동작이 아주 굼떴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는 송이를 노려보는 눈빛들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송이를 무슨 죄지은 사람 취급하는 것 같았다. 어서 안 들어가고 뭐하냐는 듯한 압박의 눈빛.
후우.
송이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내뱉고는 눈을 부릅떠 보았다.
아자아자!
이게 뭐라고 속으로 주문까지 외웠다. 땀이 살짝 배어 있는 손바닥을 비비고는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었다.
굳건해 보이는 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그 안에 있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곳이구나.
제대로 위엄이 서려 있는 공간은 발걸음 하나 떼기 쉽지 않을 정도로 송이를 압도하고 있었다. 층고도 상당히 높고 넓은 공간은 광활한 어딘가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왔으면 앉지.”
듬성듬성 하얗게 센 머리와 회색 정장이 아주 잘 어울렸다. 상석에 앉아 자리에 앉기를 권하는 손짓 하나하나가 송이를 압박해왔다.
‘회장님 비서실입니다.’
‘네?’
송이는 전화를 받고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회장님 비서실이라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수화기에 대고 너무 크게 소리를 질러서 진만이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회장님께서 긴히 보자고 하셨습니다.’
‘제대로 건 거 맞으세요?’
‘한송이 대리 아닙니까?’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회장님이 일개 사원을 찾다니. 송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 회사에 들어와서 칭찬을 받을 만큼 아주 잘한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회장이 대리 따위를 직접 불러 야단을 치지는 않을 텐데. 한가한 양반도 아닐 테고.
전화 속의 인물은 주변 사람들에게 티를 내지 말고 조용히 오라고 말을 했다. 회장실은 일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 수 없었다. 회장의 비서라는 사람이 알려주는 곳으로 갔더니 미로처럼 된 공간을 지나고 나서야 회장실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송이는 김 회장이 손짓을 하는 곳에 엉덩이를 조심스레 붙이고 앉았다. 커다란 소파는 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폭신폭신한 촉감 때문인지 쏘옥, 들어가 몸이 약간 뒤로 쏠렸다.
“윽… 죄송합니다.”
조금만 힘을 늦게 주었다면 아예 뒤로 누울 뻔했다. 이런 분위기에 의도치 않은 몸개그를 시전한 송이는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졌다. 김 회장은 피식 웃더니 다리를 꼬았다.
“편하게 앉아.”
송이는 누가 봐도 아주 깍듯한 자세로 김 회장 앞에 마주했다.
“우리 구면이지.”
구면이라… 따지고 보면 구면이 맞았다. 신입 시절 김 회장의 강연을 들을 때 겁 없이 손을 들고 김 회장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떠들어댔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런 깡이 어디서 나왔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네, 맞습니다.”
장사를 한번 크게 말아먹어 본 송이는 회사 생활을 할수록 이렇게 큰 회사를 일군 사람이라면 정말 존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송이는 그 고깃집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는데 이 거대 기업을 이끌어가는 사람이라니.
“회사 생활은 할 만한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한송이 대리.”
“네.”
“이제 대리 달아서 언제 내 자리까지 올라오려고.”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소리를 회장 앞에서 내뱉을 신입은 없었을 테니 당연히 기억에 남았겠지.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한 한낱 애송이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자수성가한 회장 앞에서 그런 소리를 했으니 얼마나 가소로워 보였을지.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너무 멋모르고 떠들어대서.”
“아냐. 아주 재미있었어. 그런 말은 들은 건 처음이어서. 내 아들놈들한테도 못 들어본 소리인데 말이야.”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회장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겠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호로자식이 있을까. 자식도 하지 못하는 소리를 일개 신입 나부랭이가 했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회사 일은 재미있나.”
일에서 재미를 찾지 못한 지 오래였다. 처음 회사를 들어왔을 때야 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 히트상품을 기획해 보겠다는 야욕에 하루하루 들뜨는 마음으로 출근을 했지만 꼰대들에게 치이고, 아이디어 강탈을 당하고, 딸랑거리는 놈들만 인정받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매달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회사를 다녔다.
“재미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회장 앞에서 재미없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 한 번 잘못해서 책 잡힐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 얼굴로 재미있다고 하면 누가 믿어.”
표정 관리가 안 되었나. 거울이라도 있으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 김 회장의 앞이니 더 표정이 굳었을 것이다.
“정말 재미 있….”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고.”
김 회장의 손가락이 소파의 팔걸이 부분을 톡톡 치고 있었다. 잠시 말을 멈춘 김 회장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다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다가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톡톡톡톡톡.
송이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김 회장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저 두드리는 소리가 중독적으로 느껴질 때쯤,
“김지훈은 어떤가?”
응? 김지훈?
“잘하고 있나.”
내가 아는 그 김지훈? 김지훈이 흔한 이름이기는 한데. 동일인물을 말하는 게 맞는 건가?
송이는 해석이 불가한 김 회장의 말을 곱씹어 보았지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같은 팀 신입사원 이름도 몰라?”
모를 리가 있나. 그런데 지금 여기서 나오는 김지훈이 그 김지훈이 맞을 리가 없는데.
“알고 있습니다. 김지훈.”
“자네가 사수면 일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 거 아니야.”
“제가 사수인지 어떻게 아세요?”
송이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이제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신입의 이름을 회장이 안다는 것도 신기한데 송이가 그의 사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왜 자꾸 느낌이 불안해지는 걸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깟 거 아는 게 대순가.”
그러니까 왜 그런 마음을 드시냐고요. 대체 왜.
송이의 부사수가 누구든, 마케팅 3팀에 신입이 누구든 회장은 상관이 없지 않느냔 말이다.
“회장이 일개 신입사원 물어보는 게 이상해?”
“네. 솔직히 이상합니다.”
송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게 안 이상한가. 회장의 앞이어서 조금 전까지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어느새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내 아들이야.”
“네에??”
송이는 단전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를 내뱉었다. 회장실이 크게 울릴 정도였다.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깨닫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럼 이게 안 놀랄 일이에요?
되묻고 싶었다.
지독한 악몽은 아닐까. 요즘 너무 김지훈을 자주 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몰라. 너무 의식을 해서 이런 생생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당연히 놀랄 일이죠. 신입이 회장님 아들이라는데.”
진만이 분명 낙하산은 아니라고 했는데. 낙하산은 다른 팀이라고 했는데. 진만의 정보가 잘못 되었다는 건가. 회장이 일개 대리를 앞에 두고 이딴 소리를 농담 삼아 할 리는 없으니까.
“참고로 낙하산은 아니야. 입사 지원한 건 나도 몰랐으니까.”
이건 더 놀라운 사실이었다. 회장 아들이 그 회사에 입사 지원을 해서 붙었다? 이건 또 무슨 경우야. 김지훈은 정말이지 색다르게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 자리에 없으면서도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그 인간은 진짜 능력자라면 능력자였다.
“왜 그런….”
“그건 몰라. 아들이지만 나도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니까.”
충분히 동의하는 바였다. 태어나서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래도 아버지 회사에 아버지 모르게 입사 지원을 해서 들어올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회장님 아들이 맞기는 한 거죠?”
“내가 한 대리하고 농담 따먹기라도 할까.”
“아, 아니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너무 믿기지가 않아서….”
송이는 아래 가지런히 내려둔 두 손을 마주 잡고 손등을 살짝 꼬집어 보았다. 아픔이 아주 생생하게 느껴지는 현실이 맞았다. 왠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