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릴게요.”
송이는 전화를 끊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 부장 때문에 급하게 일정을 조정하여 난감했는데 다행히 일정을 맞출 수가 있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은 다 껐으니 안도감이 들어야 정상인데 왜 자꾸 찝찝함이 밀려오는 걸까.
분명 아깝다고 했다.
“아깝다….”
어떨 때 이런 말을 쓰게 될까. 누가 봐도 친구가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난다고 하면 네가 아까우니 만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이건 친구를 좋게 봐서 그런 걸까, 남자를 나쁘게 봐서 그런 걸까. 상황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고개를 돌려보니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지훈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복사기를 돌리며 복사 삼매경이었다. 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과 표정.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한 저 평온한 분위기. 쟤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를 좋게 봐서? 언제 봤다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지랖을 부릴 이유가 없을 텐데. 아니면 놀리고 싶었던 걸까. 평소의 행동을 보면 그게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사람을 당황시키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변태 새끼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고서는 어제의 일은 설명이 되지가 않았다.
‘그 새끼 얼굴 보고 와서 일이 되겠어요.’
그러더니 시키지도 않은 야근을 자처했다. 대체 왜. 왜.
내가 알던 김지훈이 맞나. 개과천선이라도 했나. 갑자기 사람이 바뀔 리도 없고.
박경수의 얼굴을 보고 와서 기분도 더럽고, 일할 맛도 뚝 떨어진 것이 맞기는 하지만 그걸 김지훈이 헤아려주고 대신 일을 해준다는 건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김지훈 씨가 왜 그걸 신경 쓰냐고요. 신경 쓸 일 아니잖아요.’
이 상황에서 도움을 준다고 하니 땡큐였지만, 저 도움을 그냥 받자니 왜 자꾸 불안한지 모를 일이었다. 무언가 꿍꿍이가 숨어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아니면 무슨 사고라도 쳐서 만회하려고 이러나. 그것도 아니면 사람을 그냥 혼란에 빠뜨리려고?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그러면 계속 만나게요?’
‘만나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해요.’
‘정신을 못 차렸네.’
‘뭐라고요?’
‘선배 같은 사람이 뭐가 아쉽다고.’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저 말에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멍하니 있다 보니 답을 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여 애매해졌다. 왜 박경수에 대한 이야기를 이 남자와 하고 있어야 되는지도 의문이었다. 잘못되어도 뭔가 한참은 잘못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표정은 왜 자꾸 똥 씹은 것처럼 저러고 있을까. 박경수하고 원수라도 졌나.
그 이후로 지훈은 말이 없이 일을 했다. 송이는 집중을 해보려고 했지만 박경수를 만나고 온 여파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거기에다 김지훈까지 합세를 해서 뜻 모를 말이나 해대니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그날 업무를 다 마친 후, 두 사람은 사무실 불을 끄고 함께 나왔다. 김지훈 덕분에 끝내야 할 일은 다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타고 가요.’
아침에도 차를 얻어 탔는데 퇴근할 때까지 얻어 탈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몸이 너무 축 처져서 강남에서 경기도 구석에 박힌 동네까지 그 기나긴 길을 갈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늘은 택시라도 타고 싶었지만 긴축 재정 주제에 택시는 가당치도 않았다. 결국 지훈의 차를 타고 말았다. 딱 오늘까지만 타자. 한 번만 더.
집까지 가는 동안 지훈은 말이 없었다. 송이 역시 말이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잠이라도 오면 좋을 텐데 잠도 오지 않았다.
얘가 삐치기라도 했나. 평소에는 가벼운 입을 잘도 놀리더니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저 감정선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머릿속을 파헤쳐보고 싶다는 생각은 옛날에 짝사랑을 했던 선배를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분명 뭔가 있는데 저거….”
복사한 종이들을 모아서 스테이플러로 찍고 있는 지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훈의 시선이 잠시 송이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복사한 종이를 향했다.
“진짜 삐쳤나.”
지훈은 보통 이상한 눈빛을 쏜다거나,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는데 오늘은 잠깐 송이를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하루에 커피를 몇 잔을 마셔.”
“졸려서요.”
송이는 탕비실에 들어오면서부터 하품을 크게 해대며 기지개를 켰다. 이번 주는 무리를 한 감이 있는지 점심을 먹고 들어온 이후부터 계속 꾸벅꾸벅 졸았다. 볼을 찰싹찰싹 쳐봐도 한 번 오기 시작한 잠은 떨쳐낼 수 없었다.
아침에도 이미 라지 사이즈로 커피를 마셨는데 그사이 카페인이 다 분해가 되었나 보다. 몸은 카페인을 더 주입해달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 계속 졸음이 몰려왔다.
“삼십 줄 들어서면 몸 훅 간다. 지금부터 몸 챙겨.”
“그게 말처럼 쉬우면 벌써 했죠.”
몸을 챙기려고 일을 대충 했다가는 조 부장에게 까여 멘탈을 챙길 수 없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든 것보다 몸이 고단한 게 낫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대리님이나 챙기세요. 지금 누구 걱정할 때가 아닌데.”
진만의 터질 것 같은 와이셔츠는 불룩 나온 배를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술을 마셔대는데 살이 안 찌는 게 이상하지.
“이 나이 되면 원래 배는 다 나와.”
진만은 종이컵에 믹스 커피 두 개를 까서 넣고는 휘휘 젓더니 휴지통에 버렸다.
“따끈따끈한 뉴스 하나 있는데. 들어 볼텨?”
“뭔데요, 또.”
진만의 이야기가 들으면서 잠도 깰 겸 커피 머신 앞에서 버튼을 누르고 그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우리 사무실에 왔던 김 상무 기억하지?”
“네. 기억하죠.”
그 껄렁껄렁한 표정을 잊었을 리가. 김지훈이 묘하게 오버랩되는 그 얼굴.
“내가 1팀 김 과장한테 들었는데. 요즘에 1팀하고 뭐 하는 게 있나 봐.”
“마케팅 1팀이요?”
“어. 그래서 지금 1팀 사람들 다 죽으려고 한다. 저 마이너스의 손이 자기 팀에서 뭔 짓을 할지 모르니. 우리 팀으로 왔으면 어휴….”
진만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명준은 손을 대는 것마다 말아먹는다고 소문이 파다했으니 사내에서는 기피 대상 1호였다. 물론 김 회장의 핏줄이라는 타이틀이 있으니 줄을 대려는 똥파리들이 있기는 했지만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컸다.
“그 사람이 1팀에 가서 할 게 뭐가 있어요?”
“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가서 신제품이라도 기획하려고 그러나. 이번에도 말아먹으면 진짜 타격이 클 텐데.”
진만은 생각에 잠겨 팔짱을 낀 채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김 상무가 1팀하고 뭘 하든, 말든 송이는 알 바가 아니었다. 하루하루 버티며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게 우선이었다.
“오, 김지훈이.”
송이가 다 내려진 커피를 보고 잔을 들려고 하는데 진만이 지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다. 진만은 필요 이상으로 지훈에게 친한 척을 하면서 어깨동무를 했다.
“사수하고 오붓하게 커피 마시고 와. 불청객은 사라져 드려야지.”
진만은 오버를 하면서 송이에게 묘한 눈빛을 쐈다.
아니라니까 그러네! 진짜.
진도가 빠르다느니, 속도 조절을 하라느니, 이상한 소리나 해대던 진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분위기만 이상하게 만들고.
진만이 사라지자 탕비실은 지독한 적막감만 흘렀다. 아까 진만하고 같이 나갔어야 했나. 타이밍이 애매했다. 지훈은 말이 없이 송이의 옆으로 가서 스틱형으로 된 아메리카노를 뜯어 컵에 탈탈 털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아.”
지훈은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으려고 컵을 들고 있었다. 정수기는 송이의 뒤에 있어 지훈은 그녀가 비키기를 기다렸다. 송이가 옆으로 몸을 비켜서자 지훈이 컵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어제는 일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송이의 입에서 나온 음성이 탕비실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생각해 보니 어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지훈이 예전에 만나던 사람이 바람을 피워 그때의 기억 때문에 바람피우는 놈만 봐도 치를 떠는 거라고. 그래서 박경수를 싫어하게 되었고, 그런 증오심 때문에 송이에게 아깝다고 한 거라고.
“그리고 어제 생각해줘서 한 얘기일 텐데. 너무 뭐라고 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좋게 생각하자. 과거의 아픔 때문에 상사가 똑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해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어제 그냥 한 얘기 아니에요.”
“…….”
“생각하고 한 얘기니까 흘려듣지 마요.”
지훈은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을 했다. 정말 트라우마라도 있었나. 맞나 본데.
어제는 머리가 복잡했지만 자고 일어나니 완전히 박경수와 헤어짐을 고했다는 생각에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을 했는데, 오히려 지금은 김지훈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얘가 진짜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나 보네.
“아, 알았어요.”
송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분위기의 김지훈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동네에서 봤을 때는 가까워진 것 같다가도 지금은 아주 어색했다.
“이것들이 탕비실 전세를 냈나.”
진태호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도 있었나. 탕비실을 들어온 태호는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한송이, 전화 왔어. 빨리 가서 받아.”
“지금 없다고 하고 메모 남겨두면 되잖아.”
“계속 바꾸라잖아. 누구냐고 물어도 말도 안 하고. 지네들이 뭔데 명령질이야. 전화나 빨리 받아!”
태호는 신경질적으로 내뱉더니 탕비실을 나갔다. 송이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화를 받으러 빠르게 탕비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