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8/44)

39화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서는 박경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송이가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에도 답을 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핸드폰까지 동원하여 전화를 건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회사 근처에 있다고 끝나고 나서 만나자고 하면서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고 있었다.

헤어진 거나 마찬가지인 마당에 남의 직장 앞까지 와서 이렇게 행패를 부리니 더 화가 났다.

“박경수. 이건 선 넘은 거 알지?”

그냥 무시하려다가 혹시나 회사까지 들어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퇴근 후에 나갈 테니 회사 근처의 커피숍에서 기다리라고 말을 했다.

야근할 거리들이 쌓여 있었지만 일단 박경수부터 해결을 해야 일에도 집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 커피숍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연락을 왜 계속 안 받아.”

“내가 네 연락을 왜 받아야 되는데.”

“그냥 이렇게 끝내는 건 아니잖아. 무슨 얘기라도 해봐야지. 우리가 만난 시간이 얼마….”

“그 소리 지겹다, 이제. 그만해라.”

송이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커피숍에 들어서고 박경수의 얼굴이 보일 때부터 불쾌한 기분이 들며 가슴이 뛰었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몸에 열기가 돌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잘됐다. 확실하게 끝맺음을 해야 하는 인연이었으니까. 이렇게 흐지부지 지나가면 또 미련이 남을지도 모르니까.

“나 정말 반성 많이 했어.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

송이는 경수가 처절한 표정을 짓는 와중에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천천히 커피만 마셨다.

“우리 사귀면서 싸운 적도 많이 있었잖아. 그러다가 또 풀고. 또 웃고. 연인이 사귀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을 수 있잖아.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거고, 이번에는 내가 실수했어. 잘못 인정하고 있어.”

송이는 커피잔을 조용히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이제는 정말로 끝이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한송이, 너도 실수한 적 있잖아. 나한테 잘못 구한 적 있잖아. 그때 내가 안 받아줬어? 받아줬잖아. 그렇게 맞춰나가는 게 연인 사이 아니야? 너 나랑 결혼하고 싶다며. 나도 그래. 나하고 미래 그려본 적 없어?”

“할 말 다 했냐?”

“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 이 커피 다 마실 때까지. 앞으로 이런 기회가 없을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송이는 답이 없이 다시 커피잔을 들고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구수한 커피 향이 코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얘랑 마신 커피만 해도 수백 잔은 되겠구나. 그중에서 마지막 잔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박경수는 자기 엄마 얘기부터 시작해서 송이의 엄마, 여행을 갔던 이야기, 술에 취했던 이야기,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까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다 한 듯했다. 어떻게든 송이의 마음을 돌려보기 위해 이말 저말 더 꺼내고 있었다.

탁.

송이가 들고 있던 잔의 커피가 다 비워졌다.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박경수를 바라보았다.

“충분히 했지?”

어느 때보다 송이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경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이제 완전히 끝내자. 충분히 생각해 보고 하는 말이야.”

“아니, 그러지 말고….”

“내가 말하는 중이잖아.”

송이의 단호한 어투에 경수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그녀의 기운에 경수는 당황했다. 그녀가 화를 낸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단단하다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박경수, 우리가 3년을 넘게 만났고, 너하고 공유하는 기억도 많을 거야. 너하고 있으면서 좋을 때도 있었고, 네가 말한 대로 너하고 진지하게 미래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그런 시간들까지 다 부정하지는 않아. 그래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 그 시간들을 아예 없던 것처럼 하기에는 내가 너에 대해서 진심이었던 시간도 다 부정하는 것 같아서 천천히 정리할 시간이.”

“…….”

“이제는 너와 함께할 시간이 전혀 기대되지도, 궁금하지도 않아. 너는 줄 게 있어서 잠깐 그 여자애가 집에 온 거라고 했지만 너는 그날 아프다고 했고, 다음에 만나자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그 애를 집으로 들였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게 정말 사람 미치게 하더라. 그만큼 다른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는 거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다시 만나. 너를 만나면 이제는 믿지도 못할 테고 계속 이 생각만 날 텐데.”

경수는 송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맞잡고 있는 두 손을 계속 떨고 있었다. 감정이 북받치는지 입술도 자꾸만 깨물고 있었다.

“그날부터 이미 우리 사이에 신뢰는 깨졌어.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실수에 대해서 인정하고,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할 수도 있어. 그런데 이건 실수가 아니잖아. 네가 고의로 저지른 일이지. 말은 바로 하자, 이 나쁜 새끼야. 너는 그 여자를 너희 집에 들였을 때부터, 아니 나한테 거짓말을 했을 때부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야. 네 잘못을 인정하고, 이미 건넜으면 그냥 그렇게 살아. 다시 돌아올 생각하지 말고.”

송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이야, 잠깐만. 내 얘기 좀 더 들어봐, 응?”

“나는 들을 얘기 다 들었고, 할 얘기도 다 했어. 그런데 아직도 왜 분이 안 풀리는지 모르겠다. 후우….”

송이는 깊게 숨을 내쉬더니 카운터로 걸어갔다. 알바생은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누가 봐도 헤어지기 직전의 남녀였다. 그런데 그 테이블에 있던 여자가 카운터 쪽으로 걸어오니 당황했다.

“걸레 있나요?”

“걸레요?”

“네. 바닥 닦는 걸레요.”

“제가 닦을게요. 말씀해주세요.”

“아뇨. 제가 필요해서 그래요.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알바생은 송이의 분위기에 압도 당하여 청소실에 가서 밀대를 하나 꺼내어 송이에게 건네주었다. 혹시 저걸로 때리려는 건 아니겠지? 알바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송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박경수. 네가 개 같이 굴어서 지금 이 꼴이 난 거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

“무슨 소리야?”

경수는 밀대를 들고 온 송이를 보면서 두려운 눈빛으로 물었다. 저걸로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송이가 밀대와 함께 가져온 물컵을 경수의 정수리에 부어버렸다. 얼음이 들어 있던 차가운 물이 그의 정수리에서부터 몸을 타고 발끝까지 쭉 흘러내렸다.

“그렇다고 널 때릴 수는 없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네. 너 따위 때문에 알바생을 귀찮게 할 수는 없잖아.”

그러더니 경수의 주변으로 흐른 물을 밀대로 쓱쓱 닦아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입을 벌렸다. 다른 이에게 물을 붓고 그냥 가면 모를까, 직접 그 물을 닦는 광경은 본 적이 없을 테니.

“저리 비켜.”

송이가 밀대로 닦다가 경수의 발이 자꾸 걸리자 비키라고 툭툭 쳤다. 경수가 몇 발자국 옆으로 물러나자 그 주변을 말끔하게 닦아냈다.

“영원히 내 눈앞에서 꺼져. 그년이랑 잘 먹고 잘 살아.”

송이는 밀대를 다시 카운터로 가져가 알바생에게 건네주고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카페를 나섰다.

* * *

“뭐 하고 있어요?”

사무실로 돌아온 송이의 눈에 아직도 일을 하고 있는 지훈이 들어왔다. 벌써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야근을 한 적이 없던 지훈이기에 송이는 놀라서 물었다.

“야근하고 있는데요.”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요? 왜 안 하던 야근을 하는 건데요.”

“오늘은 야근할 게 있어서요”

“원래 업무 시간에 다 처리하는 스타일이라면서요. 집중해서 일하면 야근할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됐어요.”

지훈은 송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빠르게 손을 놀리며 업무에 한창이었다. 이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거지. 송이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여 지훈의 모니터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보던 자료였다. 오늘 송이가 정리해야 할 자료들이었다.

“김지훈 씨가 그걸 왜 하고 있어요?”

송이가 묻든 말든 지훈의 손가락은 쉬지 않고 타자를 치고 있었다. 오늘 일이 많냐고 묻길래 어떤 일이 있다고 말해준 것뿐인데, 그걸 정리하고 있었다.

“김지훈 씨.”

“그 새끼가 뭐래요.”

“네?”

“그 새끼가 또 사정해요? 다시 만나자고?”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조용히 다녀왔는데.

“만나지 마요. 선배가 그 새끼 만나는 거 싫어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계속 늘어놓는 지훈은 평소와 달라 보였다. 그리고 만나는 게 싫다니. 이건 무슨 소리인지.

“대체 무슨 소리예요.”

“만나지 말라고요. 쉬운 말인데 왜 못 알아들어요.”

“그걸 김지훈 씨가 왜 신경을 써요?”

지훈은 순간 타이핑하던 것을 멈추었다. 둘만 남아 있는 사무실에 적막감이 흘렀다.

“선배가 아까우니까.”

그제야 지훈은 송이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뭐라 설명을 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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