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7/44)

38화

“다 왔어요.”

눈을 뜨기 싫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게 해주면 안 될까.

“선배, 다 왔다니까요.”

응? 선배?

그 말에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고급진 차의 내부. 그제야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인지가 되었다. 잠이 확 깼다.

“안 잔다면서 제대로 꿀잠 주무시네.”

민망해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마른세수를 하는 척했다. 절대 안 잔다고 운전이나 집중하라고 말을 하던 게 조금 전이었는데 졸지에 매너 없는 인간이 되었다. 대체 언제 잠이 든 거지.

아까 조금씩 졸음이 오는 느낌은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눈을 부릅뜨며 앞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숙면에 들어갔다. 이놈의 잠귀신은 시도 때도 없었다. 어디에서든 잠을 푹 잘 수 있다는 건 복이라던데, 이럴 때는 원망스럽기도 했다. 더 민망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꿈까지 꿨다.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노란색으로 탈색을 하는 개꿈을.

“침까지 흘리시던데.”

그 말에 얼른 입가를 손으로 만지다가 핸드폰 액정으로 얼굴을 비춰보았다. 침을 흘린 자국은 없는 것 같은데. 쪽팔림에 다급하던 손길은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멈추었다. 그러고는 지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더니 그가 피식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 새끼가!

“자꾸 놀릴래요?”

바로 조수석에서 내려 지훈을 향해 소리쳤다.

“코도 골던데.”

“1절만 해요.”

“그건 진짠데. 녹음이라도 해둘걸.”

진짜 코도 골았나. 저 뻔뻔한 얼굴을 보니 거짓말인 것 같으면서도 정말 골았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졌다.

“또 속아요?”

이씨. 저게 진짜.

혼자 분한 얼굴로 노려보는데 지훈은 벌써 긴 다리로 저만이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 * *

“한송이.”

진만은 송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탕비실을 가리키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오늘은 바빠서 마음도 급한데 왜 불러내는 건지. 진만이 부를 때는 보통 쓸데없는 회사의 가십거리나 크게 의미 없는 말일 때가 많아서 생각 없이 들으면 재미있기는 했지만 바쁠 때는 시간 낭비일 때가 많았다. 송이는 슬리퍼만 갈아신고 탕비실로 향했다.

“아까 보니까 김지훈하고 같이 오더라. 차에서도 같이 내리고.”

딴 사람들한테 가질 관심을 업무에 쏟았으면 벌써 부장까지도 초고속 진급을 했을 사람이었다. 그건 또 언제 봤대. 지훈의 말로는 모든 직원이 다 회사 빌딩에 차를 댈 수가 없어서 근처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고 했었다. 그래서 주차장에서부터 지훈과 함께 회사까지 걸어왔다.

“김지훈 씨하고 같은 동네 사는데 출근하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태워준다길래 같이 타고 왔고.”

같은 오피스텔의 위아래층에 산다는 것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이 가벼운 입이 어디까지 퍼 나를지 모를 일이니.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던데. 하하호호 웃고 떠들면서 말이야.”

하하호호는 개뿔. 그냥 회사 건물까지 오면서 몇 마디 나눈 것뿐인데.

“젊은 남녀가 호감을 가지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인데 말이야. 너무 빠른 것 같아서.”

“최 대리님. 혼자 소설 좀 쓰지 마세요. 같이 차 좀 타고 온 거 가지고.”

“어허. 이 순진한 사람을 보게. 남자가 자기 차에 아무 여자나 태우는 줄 알아?”

“같은 팀 직원이니 태워줬겠죠. 아무나면 태웠겠어요?”

“그런 말이 아니지 이 양반아. 한송이, 참 똑똑하면서 가끔 맹하단 말이야.”

칭찬을 하는 척하면서 멕이는 디스에 아침부터 짜증이 올라왔다.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고.

“아무튼 내가 두 사람 주시하고 있다는 거 새겨두고 있어.”

주시하면 어쩔 건데.

“딴 데 가서 이상한 소리나 하고 다니지 마세요.”

“왜, 내 파급력이 두렵나?”

저 촉새 같은 입을 확. 상사만 아니었어도 한 번쯤은 저 가벼운 입을 손으로 잡아채고 이리저리 흔들면서 조심하라고 경고라도 날렸을 것이다.

“알았어. 말 안 해. 내가 딴 사람 말은 다 해도 한송이는 지켜주지. 동지애가 있는데. 그런데 말이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부장님이 요즘 상당히 빡이 쳐 있어. 요주의 두 인물 때문에.”

진만이 말하는 요주의 두 인물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송이와 지훈이었다. 지훈이 조 부장과 대판 했던 그날, 조 부장은 송이를 호출했다.

‘부사수 교육을 어떻게 시키길래 신입이 부장한테 개겨! 똑바로 교육 안 시켜?’

별로 해주고 싶은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더니 너도 반항을 하냐며, 사수가 이 모양이니 보고 배우는 거라고 노발대발했다.

‘자기 의견 낸 건데 그걸 제가 뭐라고 해요. 그럴 거면 애초에 시식을 하지 마시든가요.’

욱하는 마음에 머릿속에 있는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 참아주지,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섰다. 회의 때 남의 아이디어를 베끼느라 정신이 없던 그 모습만으로도 이미 게이지가 충분히 올라가 있던 참이었다.

‘오늘 발표한 아이디어 이번에 제가 기획하는 제품에 적용할 거니까 부장님 기획에 쓰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들이받은 거 더 내질렀다. 욕을 들어먹을 것은 뻔하니 여기에 조금 더 보탠다고 얼마나 달라질까 싶었다. 조 부장은 예상대로 노발대발하더니 어디서 시건방을 떠냐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몸 사리라고. 껀수 하나만 잡히면 뭔 짓을 해서 괴롭힐지 몰라.”

“마음대로 하라고 해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두 사람 참 대단해. 인정. 역사에 남을 최고의 콤비다.”

“비꼬시는 거예요?”

“비꼬다니. 내 애정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말이야. 솔직히 김지훈이 부장님한테 맛없다고 할 때 시원하긴 하더라. 내가 얼마나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는데.”

덩치만 컸지 쫄보인 이 사람이 그런 말을 조 부장 앞에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맞다. 그런데 차 그거 뭔데? 김지훈 차야?”

진만도 역시 그 차를 봤다. 출근길에 눈에 확 띄는 차가 눈앞에서 지나가더니 회사 근처의 주차장 쪽으로 들어갔다. 외부에 있는 주차장이어서 바로 볼 수가 있었는데 지훈과 송이가 내리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1억을 가뿐하게 상회하는 차였다.

“제 차는 아니니 김지훈 씨 차겠죠.”

“너무 평온한 표정으로 말하는 거 아니야? 그거 기본 옵션만 해도 1억 넘는 차야.”

“1억?”

비싸다고는 생각했는데 막상 금액을 들으니 더 놀라웠다. 1억이면 할부를 해도 대체 얼마야.

“…할부를 길게 했다던데.”

“할부? 기간이 얼마나 긴데.”

“그건 저도 몰라요. 할부 기간이 길다면서 감당할 정도는 된다고 하던데.”

“월급으로 감당이야 될 수도 있지. 문제는 거의 다 갖다 바쳐야 된다는 거지. 몸소 인생을 즐기는구만. 간지 난다. 간지 나.”

이제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사람이 1억 넘는 차를 할부로 지르는 용기는 뭘까.

“중고겠지 뭐. 중고여도 꽤 비쌀 텐데. 시계도 그렇고 김지훈이 허세가 심하기는 하네. 시계도 저번에 사진 찍은 거 시계 파는 친구한테 보여줬더니 진짜 정교하다고, 자기도 사고 싶다고 그러던데. 아무튼 요즘 젊은 사람들은 나 때하고는 달라.”

송이의 상식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기는 했다. 차와 시계가 뭐라고 그렇게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 건지. 그런데 이상한 건, 지훈을 볼 때면 그런 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돈이 없는 사람이 아끼고 아껴서 그런 것을 샀다면 부자연스러워 보이거나, 위화감이 들 텐데 그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원래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특이사항 있으면 언제든 보고 하고. 속도 조절도 좀 하고.”

진만은 송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탕비실을 먼저 나섰다. 속도 조절은 무슨. 역시나 쓸데없는 소리의 향연이었다. 어서 업무를 시작하려고 송이도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 * *

“저 사람이 이번에 들어왔다는 신입이야?”

“네.”

“훤칠하다. 여직원들한테 인기 좀 많겠는데?”

“뭐, 그냥.”

인기는 개뿔. 지훈이 조 부장을 들이받은 날부터 시작해서 벌써부터 또라이라고 사내에 소문이 쫙 퍼졌다. 그 시발점은 말하지 않아도 진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지훈이 입사한 이후에 마케팅 팀 근처에 와서 흘끔거리는 여자 직원들도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발길이 끊겼다.

“왜, 저 정도면 초 훈남인데?”

“그러면 과장님이 꼬셔보세요.”

“내가 10년만 젊었으면 이미 들이댔지. 송이 씨는 남친 있다고 했지?”

송이는 그냥 웃고 말았다. 아픈 이야기를 굳이 꺼내고 싶지가 않아서.

“내년에 서른이면 이제 슬슬 결혼 생각도 해야겠네. 남친하고 그런 얘기도 해봤어?”

“안 해봤어요. 벌써부터 그런 얘기 해봤자 부담만 되고.”

이렇듯 박경수의 흔적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툭 터져 나올 만큼 송이의 삶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진짜 오래 만날 생각이기는 했나 보다. 진 과장한테도 이야기를 했던 걸 보면.

“앞으로 신입 자주 데려와. 눈 호강 좀 하자. 여기는 다 아저씨들밖에 없어서.”

오늘은 연구소에 들러 출시 계획 중인 면에 들어갈 스프를 체크해 볼 생각이었다. 외근을 다녀온다고 하니 지훈이 사무실에 있기 따분하고 답답하다며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하는 통에 같이 오게 되었다. 어차피 한 번 데려오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잘됐다 싶었다. 지훈과 같이 연구소에 다녀온다고 하니 조 부장의 눈초리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농땡이 피울 생각 하지 말라며 끝나면 바로 사무실에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지훈은 사무실에 있을 때는 죽을상이더니 무슨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웃는 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사무실이 싫은가.

연구소에 들러서 개발되고 있는 스프의 맛을 보았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착착 진행이 되고 있었다. 옆에서 지훈이 역시나 딴지를 걸기는 했지만.

‘맛이 조금 센데요.’

저 까다로운 입맛을 누가 맞출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맛있는 게 있기는 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입맛도 까다로운 것 같던데, 데려와서 테스트도 해보고.”

“저 입맛으로 테스트 하다가는 출시될 제품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 정도로 까다로워?”

송이는 말없이 웃고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이만 가볼게요. 사무실에 바로 복귀해야 되어서요.”

“바로 퇴근 아니고? 그쪽 팀은 되게 빡빡하네.”

송이는 진 과장에게 인사를 하고는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지훈에게 다가갔다.

“사무실로 복귀하죠. 지금 가면 딱 맞겠네.”

지훈은 송이의 말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나섰다.

Rrrrrr.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인은 없고 번호만 찍혀 있었다. 누구지? 개인 핸드폰 번호로 온 걸 보니 개인적인 용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바로 받아보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말씀을 하세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말이 없었다. 잘못 걸었나 싶어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음성이 흘러나왔다.

-송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