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6/44)

37화

평소보다 한 시간은 일찍 일어났다. 어제 야근을 제낀 여파를 오늘 다 감당해야 했다. 오후에는 외근도 있으니 오전에 최대한 일을 처리해야 되었다. 그러지 못하면 외근을 마치고 저녁에 다시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 불상사를 마주할 수 있으니. 게다가 조 부장은 제멋대로 업무를 던져주는 인간이니 그 변수까지 포함하면 오늘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이른 출근길에 피곤함 때문에 몸이 무거웠다. 이 상태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회사까지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함이 극에 달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데 주차장에 그 비싸 보이는 차가 있었다.

평소에 출근할 때는 안 보였던 것 같은데 오늘은 있네. 송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차 쪽으로 가보았다.

“고놈 참 잘 빠졌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차가 참 예뻤다. 차를 전혀 모르는 송이도 돈만 많다면 한번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러다가 잠시 누가 주변에 있는지 고개를 돌려보았다. 이른 아침이라 모두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을 시간인지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차를 살펴보았다.

돌멩이를 걷어찼다가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에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없는 거 맞지?”

차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말끔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아무것도 안 보이네.”

차창은 아주 짙게 선팅이 되어 있어서 차의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 숨길 게 그리 많다고.

‘선팅을 왜 짙게 하겠어. 그 안에서 남들한테는 보이기 싫은 뭔가를 하고 싶은 거겠지.’

길가에 주차된 차 중에서 내부가 거의 보이지 않는 차들을 가리키며 진만이 했던 말이었다. 음흉한 미소와 함께. 그 보이기 싫은 뭔가가 대충 짐작은 되었다. 굳이 그걸 차 안에서 할 필요가 있나.

“좋은 차면 그 안에서 하고 싶을 수도 있지.”

송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차창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선배는 객관적으로 귀여워요.’

어젯밤에 불현듯 김지훈이 던진 말. 그 말을 생각하니 입가가 올라갔다.

“보는 눈은 있네. 내가 빠지는 얼굴은 아니지.”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고 찌든 생활을 하다 보니 피부가 조금 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피부는 좋은 축에 속했다.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얼굴을 살펴보다가 살짝 삐져나온 머리를 매만졌다.

“이 정도 얼굴이면 괜찮지.”

머리를 대충 다 만지고 돌아서려고 하던 참이었다.

지이이이잉.

차창이 내려감과 동시에 송이는 그 상태로 얼음이 되었다.

“잘 잤어요? 선배.”

느닷없는 김지훈의 등장에 송이는 잠시 당황을 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 김지훈 씨….”

생각지도 못한 얼굴을 마주하자 송이는 머리가 멍해졌다.

“출근하는 거예요?”

“어… 빨리 가봐야겠네. 이따 회사에서 봐.”

송이는 민망하여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왜 쟤 앞에서는 쪽팔린 짓을 계속 해대는 건지. 거기서 왜 머리를 만져 만지길. 하필 그때 차에 타고 있을 건 뭔데!

“선배.”

그때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송이의 발길을 붙잡는 소리가 들렸다. 송이가 고개를 돌리자 지훈이 차를 가리키며 물었다.

“탈래요?”

이 차가 왜 김지훈의 차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처음 봤을 때 15층에 이사 온 사람의 차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처음 지훈이 15층에 사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 차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차는 왜 봤어요. 어디 긁히기라도 했어요?”

“아뇨! 그냥 봤어요. 차가 예쁘길래.”

너무 티 나게 부정을 했나. 제 발이 저리니 말에 감정이 그대로 실렸다.

지훈의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보일 법도 했다. 아침에 출근을 하다가 갑자기 차 근처에 다가와서 이리저리 훑어봤으니. 그래도 차에 흠집은 없었으니 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차가 이렇게 조용해. 예전에 동생이 구입했다던 중고차는 진짜 시끄럽던데. 이건 움직이고 있는 중에도 조용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래서 아까 밖에서 차를 둘러볼 때 안에 누가 타고 있다는 것도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이다. 내부도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에어컨 바람에서도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실제로 좋은 향이 났다. 이런 차는 얼마나 하려나.

“할부예요.”

“네?”

“어떻게 샀는지 물어보고 싶은 얼굴인 것 같아서.”

얼굴에 뭐라고 쓰여 있기라도 하나. 물어보고 싶은 걸 귀신같이 알아챈다.

“할부여도 이런 차면 비쌀 텐데.”

“기간을 길게 했어요. 그러면 어느 정도는 감당이 되거든요.”

얘는 진짜 허세가 몸에 밴 건가. 시계도 그렇고. 차도 그렇고.

‘오피스텔에 주차된 외제차 있지? 대부분 카푸어야. 한 달에 월급의 반 이상을 꼬라박는 거지. 그런데 할부만 나가? 유지비도 생각하면 답이 안 나오지. ’인생 한 번 사냐. 폼나게 살아 보는 거지.’ 라고 허세 부리다가 거지꼴을 못 면한다 이거야.’

월급으로 할부금을 낼 수 있다고 해서 그게 진짜 감당이 되는 건가. 버는 대로 차 값으로 다 나갈 텐데.

그런데 지금 누구를 걱정할 처지인가. 장사로 날려 먹은 돈이면 이런 차 몇 대는 샀을지도 모른다. 나야말로 진정한 허세녀일지도 모르지. 자아실현을 하겠다고 그 많은 돈을 날렸으니. 제 코가 석 자인데 이깟 차 좀 끌고 다닌다고 누구를 카푸어라고 욕할 처지가 아니었다.

“보통 이 시간에 출근해요? 빨리하네.”

“차가 막혀서요. 빨리 나와야 그나마 덜 막히니까. 그래도 막히기는 해요.”

하긴, 경기도에서 강남으로 출근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을까. 버스에 지하철만 해도 미어터지는데 차라고 별수 있을까.

문득 어제 긴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그 여자가 생각이 났다. 15층으로 올라가던 그 여자. 지훈의 집으로 향하던 사람이 분명했다. 그 여자도 이 차의 조수석에 타 봤을까. 혹시 선팅을 한 게… 송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지훈이 안다면 쓰레기처럼 쳐다보지 않을까. 그런데 자꾸만 궁금해졌다. 그 여자의 존재가.

“저기 어젯밤에….”

이놈의 호기심은 주체가 되지 않는다. 그냥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려고 했는데 본능적으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어젯밤에 뭐요?”

송이가 말을 끌면서 쉽게 내뱉지 못하자 지훈이 물었다. 어젯밤에 15층으로 어떤 여자가 올라가던데 그 여자 아는 사람이에요? 이런 물음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지만 이걸 정말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이상한 눈초리를 받을 수 있었다. 니가 뭔데 그걸 궁금하냐는 듯한.

“아이스크림 잘 먹었다고요. 제대로 인사를 못 한 것 같아서.”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한다고.”

지훈은 뭐 그리 중요한 이야기라도 되는 듯이 말을 하냐고 타박하듯 피식 웃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횡단보도 앞에서 부드럽게 정차했다. 아무 생각 없이 앞을 보고 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 중에 노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여자가 보였다. 송이의 입은 주책없이 또 떠들어대고 있었다.

“요즘에도 저렇게 샛노랗게 염색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네. 저런 머리 어때요?”

지훈이 물끄러미 송이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런 느낌의 표정이랄까. 밑도 끝도 없기는 했다. 뜬금없이 노란 머리 얘기라니. 그리고 어때요는 무슨 어때요야. 방정맞은 입을 탓할 수도 없고. 입가에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은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머리가 노랗든, 빨갛든.”

“그렇죠. 그냥 자기 스타일이죠. 개성이 중시되는 시대잖아요.”

민망해서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자신이 내뱉고도 저게 무슨 개소리인지 몰랐다.

“그런데.”

지훈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얘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선배가 하면 귀엽기는 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신호가 바뀌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럴 때는 차가 조금은 시끄러워도 괜찮을 것 같았다. 쟤가 사람 놀리는 데 맛이 들렸나. 태연하게 저딴 말을 내뱉으면 듣는 사람은 죽을 맛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겠으니.

더군다나 그냥 지나가는 듯한, 혼자서 중얼거리는 듯이 말을 해서 딱히 상대에게 말을 건넨 것도 아니고, 그런데 들리기는 하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가슴은 왜 뛰는지 모르겠다. 내일모레면 서른인데 귀엽다는 말을 들으니 좋기라도 한 건가.

“피곤하면 자도 돼요. 한 시간은 더 가야 되는데.”

“매너가 있지. 어떻게 조수석에서 혼자 자요. 차 얻어 타는 것만 해도 미안한데. 절대 안 자요.”

“진짜 괜찮은데. 그런 거 별로 상관 안 해요.”

“운전이나 집중해요. 어제 푹 자서 하나도 안 피곤하니까.”

잠기운이 아직 다 떨쳐지지는 않았지만 남의 차에 조수석에 타고서 대놓고 잘 수는 없었다. 그 정도 에티켓은 갖추고 있었다.

송이는 눈을 부릅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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