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5/44)

36화

이 동네에서 이렇게 송이에게 말을 걸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예상했던 사람이 입에 아이스크림을 문 채 서 있었다.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지.”

편의점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훈은 송이가 먹을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는 걸 간파했다. 관찰력이 좋은 건가. 은근히 사람 마음을 잘 안단 말이야.

“우리 너무 자주 보는 거 아니에요? 예전에도 이런 말 했었던 것 같은데.”

“같은 동네 주민인데 자주 보는 게 이상해요?”

이상할 건 없는데… 이 인간하고 마주칠 때면 흠칫 놀라곤 한다. 그런데 진짜 너무 자주 보는 거 아닌가. 회사야 그렇다 쳐도.

“이상한 건 아닌데… 김지훈 씨는 이 시간에 뭐해요, 밖에서.”

“산책하고 있었어요.”

산책할 시간도 있고 참 좋겠다. 송이는 원래 오늘도 야근 당첨이었지만 지나가 이번 주말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해서 오늘 저녁에 야근을 제끼고 지나와 약속을 잡았다. 덕분에 내일은 지옥 같은 일정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런데 이 인간은 이 시간에 뭐가 이리 깔끔해. 보통 직장인이라면 야근에 찌들어 하루 중 가장 보잘것없는 비주얼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시간에 지훈은 아주 멀끔했다. 옷도 흰 티를 입고 있어서 밝은 피부와 함께 어우러져 아주 깨끗해 보였다. 머리카락에는 물기도 살짝 머금고 있는 듯하여 샤워까지 말끔하게 한 모습이었다. 찌들 대로 찌들어 있는 송이의 모습과 비교하면 뽀송뽀송 그 자체였다.

저녁이 있는 시간을 제대로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산책을 왜 여기서 해요. 하려면 공원 가서 하지.”

여기는 버스정류장과 편의점이 있는 도로가 쪽이었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버스정류장을 이용하여 전철역까지 가곤 하기에 많은 이들이 이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오늘은 여기가 좋아서요. 차도 다니고 좋잖아요.”

좋긴 뭐가 좋아. 시끄럽기만 하지.

요즘 들어 부쩍 더 자주 마주치는 느낌이었다. 특히 퇴근길에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도중에.

“이거 하나 드세요.”

지훈은 손에 들고 있는 봉지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송이가 좋아하는 수박 맛 아이스크림이었다. 버스에서 먹고 싶던 것이기도 했다. 보자마자 목구멍으로 침이 절로 넘어갔다.

“까 드려요?”

송이가 머뭇거리자 지훈이 직접 포장지까지 까서 건네주었다.

“선배, 이 아이스크림 좋아하잖아요.”

언제 그걸 또 봤대. 내가 이 아이스크림을 얘 앞에서 먹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런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느낌?”

“아이스크림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 느낌은 무슨.”

“그냥 수박 좋아하게 생겼잖아요. 선배가.”

“그건 또 뭔 소리예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수박을 좋아하게 생겼다니. 수박처럼 생겼다는 말이야 뭐야.

“수박 좋아하지 않아요? 맞잖아요.”

“그건 그렇기는 한데. 진짜 어떻게 알았는데요.”

여름만 되면 수박을 찾는 수박 킬러였다. 어릴 때 하도 수박을 먹어서 잠을 못 잘 정도로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다.

“진짜 맞나 보네. 수박 안 좋아하는 사람 별로 없잖아요.”

참 상대를 어이없게 만들어 웃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지훈이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까서 막대가 있는 부분을 건네주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받아들었다. 이거 하나 먹는다고 얼마나 살이 찐다고. 수박맛 아이스크림의 초록색 부분부터 입으로 깨물었다. 이 오묘한 맛이 좋아서 언제나 빨간 부분보다 이 부분을 먼저 먹곤 했다.

“더 먹고 싶으면 말해요.”

지훈이 봉지를 벌려 보이면서 자랑하듯이 말을 했다. 그러더니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렸다. 송이도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문득 지훈의 모습을 흘긋거렸다.

회사에서는 항상 머리를 넘기는 스타일이었다면 퇴근을 한 후에 동네에서 만날 때는 차분하게 머리를 내렸다.

회사에서는 깐깐한 직장인의 이미지라면, 동네에서는 대학생 같은 이미지랄까. 머리 스타일과 옷차림만으로도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콧대도 꽤 높고. 속눈썹도 길었다. 주기적으로 속눈썹을 붙여야 하는 자신과 달리 자연적으로 난 속눈썹이었다. 눈도 부리부리하고. 여자깨나 따랐을 것 같은 얼굴인데 말이지.

동네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면서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다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절반은 맞다고 했는데. 이 말은 사실일까. 거짓일까.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이겠지. 이 얼굴에 여자 하나 안 만나 봤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언제까지 쳐다볼 거예요?”

“…네?”

얼른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진짜 조심스럽게 흘긋거리는 정도로 쳐다봤는데 그걸 또 언제 눈치챘지.

“그렇게 쳐다보면 의심해요.”

“의심이라뇨?”

“이 여자가 나를 좋아하나.”

“허… 미쳤어요?”

“너무 그러면 더 의심받아요.”

“아니…!”

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발끈했다가는 정말 그런 거 아니냐고 계속 놀릴 게 분명했다. 그냥 얼굴 좀 본 것 갖고 뻔뻔하게 저런 소리를 잘도 내뱉었다. 태생이 뻔뻔한 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아니면 잘생겨서 본 걸 수도 있고.”

점점 더 뻔뻔하게 나왔다. 자기 입으로 저런 소리를 내뱉는 인간의 뇌 구조가 궁금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송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홀리듯 지훈의 얼굴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바로 맞받아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민망해서 시선을 다시 마주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계속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계속 쳐다봐요?”

“귀여워서요.”

켁켁.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목에 걸린 적은 처음이었다. 얘가 오늘 작정을 했나.

“선배는 객관적으로 귀여워요.”

“…….”

이런 건 어떻게 받아줘야 하지. 표정은 왜 저렇게 진지한데. 퇴근을 하기를 기다렸다가 오늘 노리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이딴 대사를 이렇게 술술 내뱉을 수는 없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 매뉴얼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살면서 객관적으로 귀엽다는 말을 들어봤을 리가 없으니까.

“장난이에요. 얼굴까지 빨개지고 그래요.”

손으로 황급히 볼을 가렸다. 이딴 수작에 말려드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뻥이에요. 안 빨개졌는데.”

“이씨. 재밌어요?”

그가 웃는 모습에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별것도 아닌 걸로 이렇게 웃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았다. 학창시절에는 몰랐는데 사회생활을 하고 보니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다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늘 조 부장 또 지랄하더라고요. 니가 나를 무시하는 거냐, 나를 가르치냐. 내가 이 회사에서 몇 년째인 줄 아냐. 그놈의 라떼는 허구한 날 찾고. 레퍼토리도 맨날 똑같아요.”

어느 새부터 송이는 지훈과 공유할 것이 생겼다. 서로 같은 적을 공유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이야깃거리도 풍성해진다는 것을 뜻했다.

“조 부장 가발 봤어요? 자기 혼자 흥분해서 뭐라고 하는데 가발이 삐뚤어져 있잖아요. 여기서 웃으면 분명 지랄할 거 뻔한데, 웃음은 나오고.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요.”

가끔 송이도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조 부장이 뭐라고 지적을 할 때는 흥분을 동반할 때가 있는데, 그러면 격한 움직임 때문에 가발이 흔들거리면서 삐뚤어질 때가 있었다. 다시 씌워주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 만큼.

지훈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오피스텔 앞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하고 이렇게 편하게 얘기를 나눠도 되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대적인 감정이 컸는데 왜 그와 단둘이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색하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었다.

“택배 온 걸 깜빡했네. 먼저 올라가세요. 경비실 들렀다가 와야겠어요.”

지훈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택배 문자가 기억이 났다. 지훈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한 후에 경비실로 향했다.

택배를 찾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타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열림 버튼을 누르니 급하게 달려왔는지 어떤 여자가 거친 숨을 내쉬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깨 아래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샛노랗게 물들인 앳돼 보이는 여자였다. 이 오피스텔에서 이렇게 눈에 띄는 비주얼은 처음이었다. 최근에는 새로 지훈 말고 새로 이사 온 집도 없었다.

14층과 함께 15층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15층?

예전에 고시생이 말하길 이곳에는 그녀의 부모님만 온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목적지는….

14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송이가 내렸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다가 엘리베이터에 15라는 숫자가 찍혀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올려 위를 바라보았다.

누구지. 누굴까.

김지훈의 집에 가는 사람인가.

“누구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얼른 생각을 접고 집으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