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4/44)

35화

지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맥주 500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숨도 쉬지 않고 마셔대는 게 목이 많이 탄 모양이었다.

벌써 올해도 반이 지나가고 7월에 접어들었다. 진정한 여름이 시작된 만큼 날씨도 푹푹 쪘다. 올해는 20년 만의 혹서가 예상된다는 뉴스와 함께 에어컨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기사가 하루에 수십 개씩은 쏟아졌다. 낮에는 더워도 밤에는 선선하던 날씨가 이제는 서서히 밤에도 뜨거운 공기를 머금고 있을 만큼 계절은 여름의 한가운데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집 큰일 났어. 에어컨 고장 나서 as 불렀는데 다음 주나 되어야 온대. 그때까지 어떻게 버티냐.”

지나가 조금 전까지 맥주를 마시면서 짓고 있던 미소를 거두고 징징거리듯이 말을 했다. 우리 집 에어컨은 괜찮으려나. 지난달에는 긴축정책을 몸소 실천하느라 에어컨도 켜지 않고 선풍기로만 버텼다. 올해는 에어컨을 켠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슬슬 가동을 시켜봐야 할 때였다. 체질상 더위를 덜 타는 편이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7월을 에어컨 없이 버티는 건 무리였다.

“우리 집도 에어컨 한번 켜봐야겠네. 안주도 먹어.”

송이는 단골 가게인 이곳의 대표 안주인 치즈폭탄감자튀김을 지나 쪽으로 밀어주었다. 이 메뉴는 특히 지나가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메뉴였다. 감자튀김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지나를 위해서 맥주와 함께 미리 시켜둔 것이었다.

“…나는 뻥튀기나 먹을래.”

안주빨 하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변지나가 그것도 감자튀김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송이는 이상 기운을 바로 감지했다.

“뭐야, 너 연애 하냐?”

연애만 시작하면 갑자기 체중 관리를 빡세게 하는 지나의 습관을 누구보다 송이는 잘 알았다. 치즈와 감자튀김의 조합은 엄청난 칼로리를 자랑하기 때문에 맥주에 이 안주까지 먹으면 칼로리가 무한대로 급상승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연애할 때냐.”

“누굴 속여, 이것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고무줄로 대충 질끈 묶고 나오더니 오늘은 목 부근까지 내려올 정도로 커트를 했다. 며칠 전부터는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는 말도 들었다. 지금까지 백수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오면서도 연애를 할 때는 꼭 단기 알바라도 구했다. 결정적으로 며칠 전에 취업 자료 때문에 선배 어쩌고 저쩌고 하던 게 떠올랐다. 모든 정황을 종합하면 99.9% 연애를 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라고, 그냥….”

“누군데.”

지나는 대답이 없이 남은 맥주를 원샷해 버리고는 추가로 맥주를 주문했다. 벌써 500을 한 잔 다 비워놓고 또 목이 타는지 물까지 들이켰다.

“누구냐니까?”

“그런 거 아니야.”

계속 피하는 게 뭔가 이상했다. 연애를 하든, 썸을 타든 쿨하게 말을 하던 지나가 자꾸만 답을 피하는 게 영 찝찝했다.

“전에 선배라고 하지 않았어? 너 조사하면 바로 나와.”

송이는 과대표도 했기에 발이 아주 넓었다. 선배라면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남자 선배일 확률이 높았고, 전화 몇 통만 돌려보면 금방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전에 만난다고 했던 그 선배지?”

“귀신 같은 년.”

“빨리 불어. 니가 아는 선배면 나도 다 아니까.”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게 안 하던 짓을 하네. 너 유부남 만나냐?”

“미친. 돌았냐?”

“아니면 왜 말을 못 해.”

“정주현. 정주현! 됐냐?”

“정주현…? 내가 아는 그 정주현?”

송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주현이라면 누군가. 지나가 2년 전에 헤어졌다고 울고불고 하던 그 정주현이었다. 꽤 오래 만났기에 지나는 아주 힘들어했었다. 다시는 정주현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더니 이렇게 다시 만나고 있을 줄이야.

그때 헤어진 이유까지 정확히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많이 힘들어했던 걸 생각하면 다시 만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그 정주현. 그 새끼가 한 달 전에 연락을 하더라고. 오랜만에 잘 지내냐고.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해서 그냥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까 하고 나갔는데….”

지나는 새로 나온 500을 다시 벌컥벌컥 들이켰다.

“천천히 마셔. 맥주 마시다가 체하겠네.”

“잤어.”

“뭐?”

“잤다고. 그 선배나 나나 서로 많이 외로웠나 봐. 전에도 속궁합은 좋았거든. 그날 외박했다가 엄마한테 뒤지게 맞았다.”

2년 전에 헤어진 두 사람이 오랜만에 다시 만나 밥을 먹다가 바로 자다니. 송이의 상식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저마다 연애의 방식은 다를 테니까.

“다시 만나기로 했어. 나도 모르겠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면 또 비슷한 이유로 헤어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람이 변하면 얼마나 변한다고. 똑같은 두 사람이 만나니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같은 문제로 헤어짐의 위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서로에 대한 미련. 그리고 헤어짐을 만든 이유.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크냐에 따라서 다시 시작한 두 사람의 연애는 성공적일지, 아니면 실패를 거듭하게 될지 결정될 것이다. 지나는 일단 두 가지의 갈림길에서 상대방에 대한 미련이 더 강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박경수가 생각이 났다. 나도 그 어딘가에서 방황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찾아온 경수를 보니 머리가 복잡했다.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까 다른 건 생각 안 하려고.”

지나가 쉽게 말을 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 송이가 박경수와 헤어짐의 기로에 서 있으니 헤어진 이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얘기를 하기가 애매했을지도 몰랐다.

‘그냥 잠깐 우리 집에 왔던 거야. 자료 줄 게 있어서.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너를 두고 왜 딴 여자를 만나.’

카페에서 울먹거리며 했던 박경수의 말이 떠올랐다. 실컷 욕을 내뱉고 있는데 그딴 소리를 해서 사람 마음을 흔들었다.

“내가 너희 연애에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지만 박경수는 정말 나쁜 새끼야. 지가 잘못해 놓고 왜 다시 찾아와서 질질 짜고. 그게 사람 마음 얼마나 뒤집어 놓는 건지 그 새끼는 몰라. 지가 왜 울어? 누가 피해잔데. 진짜 이기적인 새끼.”

지나도 예전에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지나 쪽에서 헤어짐을 고했지만 남자는 계속 찾아왔다. 그때는 지나에게 절대 받아주지 말라고 그랬는데 당사자가 되니 그게 말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박경수에게 문자나 전화가 오고 있었다. 물론 다 씹고 있었지만.

“기왕 주현 선배 다시 만나기로 한 거 잘 만나. 나중에 셋이 한번 밥이나 먹자.”

둘은 말없이 웃고는 건배를 하고는 맥주를 마셨다. 남녀가 만나서 하는 연애만큼 어려운 것도 없었다.

“그 또라이 신입은 잘 있냐?”

지나는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해보려고 화제를 돌렸다. 송이의 말을 들어보면 역대급 또라이였다.

“잘 다니고는 있는데 얼마 전에 사고 한번 쳤어. 조 부장 완전 들이받았거든.”

“조 부장이 팀장이잖아. 이제 갓 들어온 신입이 팀장을 들이받아?”

“나도 걔가 무슨 생각으로 회사를 다니는지는 모르겠다. 회사를 다니기 싫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회사를 당장 때려치울 생각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무서운 게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둘이 얘기 좀 많이 해봤어? 같이 술이라도 마셨나?”

지나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회식 때 잠깐 얘기 좀 했어.”

단둘이 동네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까다가 지훈의 집에서 잠까지 자게 되었다는 말은 당연히 할 수 없었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다. 쓸데없는 오해만 발생할 뿐이었다.

“둘이 아주 잘 만났네. 특이한 것들끼리.”

송이는 지금까지 평범한 길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 반장을 하든, 학생회장을 하든, 과대표를 하든 어디에서든 무슨 직책이라도 맡았고, 앞장서는 역할을 했다. 어느 집단에서든 유명 인사였기에 특이하다면 특이한 길을 걸어왔지만 김지훈 역시 특이한 인간이었다.

지금까지 지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허세가 많고, 깡이 세고, 가끔 미친 짓을 하고, 비꼬기는 선수고, 웃는 게 음흉할 때가 있고, 윗집에 살고, 개념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런데 일은 곧잘 하는 것 같고.

그래도 은근히 아는 게 많았다. 진짜 이 인간은 정체가 뭘까. 도대체가 살아온 흔적이 어땠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 * *

아이스크림이나 먹을까.

요즘은 배에 군살이 조금 붙은 느낌이 들어 너무 늦은 시간에는 먹는 것을 자제하려고 했지만 밤에도 후덥지근한 날씨는 아이스크림의 유혹을 참아내기 힘들게 했다.

이게 뭐라고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계속 고민을 했다. 편의점 근처에 다다랐을 때는 고민이 절정에 달했다. 오늘은 지나와 맥주까지 먹었으니 아이스크림은 자제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악마의 속삭임이 자꾸만 귓가에 울렸다. 그거 하나 먹는 게 뭐 대수라고.

그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을 했다.

“에이, 먹지 말자.”

아이스크림에 대한 생각을 접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뭘 그렇게 고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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