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그녀와 마주한 두 번의 만남.
두 우연스러운 만남은 한송이라는 여자를 지훈의 머릿속에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집안에서 무시 아닌 무시를 당하며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던 지훈에게는 누가 봐도 약자인 주제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자가 신기하게 보였다. 한편으로는 어떤 여자일지 궁금했다.
‘마케팅 3팀 한송이입니다.’
진수 식품 입사 지원을 할 때 정작 어느 부서에 지원을 할지 정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모집 요강 페이지에 적혀 있는 팀 중에서 마케팅 부서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그 여자가 속해 있는 부서였다.
망설임의 시간은 아주 짧았다. 지원하는 부서명에 마케팅 팀을 적고 지원서를 제출했다. 스펙으로는 한국의 어느 기업을 넣든 부족함이 없었다. 외국물을 먹은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이라면 서류는 합격일 것이고, 실수만 안 하면 면접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합격을 하였고, 출근 날짜를 받아둔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원래 살던 강남 집은 회사 근처였다. 그냥 거기 살면 편하겠지만 괜한 반항심에 저 먼 경기도 쪽으로 집을 잡았다. 자세히 알아보지는 않고 부동산에는 깔끔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고 먼 곳으로 잡았다. 반항조로 잡은 것이기에 어차피 6개월 정도만 단기로 있다가 나올 생각이었다.
출근을 하루 앞두고 원래 집에 있던 몇몇 짐들만 챙겨 가지고 나와 차에다 옮겨두었다. 그러고는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 가지고 나오는데 편의점 의자에 앉아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나쁜 새끼야. 니가 사람이야? 어떻게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잘 먹고 잘 살아라. 너 그날 고자 안 된 거 다행으로 생각해.’
잔뜩 취한 목소리로 상대에게 제 의사를 똑똑하게 전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했다. 여자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넘어질 뻔했다. 지훈은 입에 물려던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빠르게 여자의 몸을 받쳐주었다. 여자는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서서 지훈을 바라보았다.
‘남자 새끼들은 다 똑같아. 다 쓰레기야. 안 그래? 그런데 너는 누구세요?’
여자가 한껏 풀린 눈으로 삿대질을 하면서 묻는데 편의점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남자가 얼른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한송이! 정신 차려. 죄송합니다. 같은 직장 동료인데 술이 많이 취해서. 죄송합니다.’
덩치가 큰 남자는 여자를 부축하더니 멀어졌다. ‘4차 고고!’ 라며 여자는 4차를 가자고 외쳤고, 덩치가 남자는 황급히 여자를 택시에 태웠다.
한송이.
그 여자였다. 이번이 세 번째 마주치는 것인가. 회사 근처에서 회식이라도 했나 보다. 예전 강당에서 봤을 때의 앳된 얼굴에서 사회의 물을 먹었는지 지쳐 보이는 감이 있었다. 그리고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남자한테 제대로 덴 것 같았다.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라던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는지 몰랐다. 그다음 날에 그녀를 마주했을 때는 잠시 의심을 했다. 정말 인연이라는 게 있는 건가.
막상 출근을 하려니 회사에 가기가 너무 싫었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계속 발목을 잡힐 것 같은 불길한 느낌도 들었다. 조직 생활이라는 걸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케팅 3팀이 있는 21층을 눌렀다. 하지만 21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이후에도 내리지 않고 바로 옥상이 있는 층을 눌러 쭉 올라갔다.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었다. 구석에 앉아 담배나 피우면서 어떻게 할지 결정하려고 했다. 여기서 기분이 더러워지면 그냥 안 들어갈 생각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니 꺼는 졸라 작아서 그 여자애 만족이나 시켜줄지 모르겠다고. 그 여자애도 젊고 거기 졸라 큰 애하고 양다리 걸치고 있을 거라고.’
언제 올라왔는지 누군가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있는 것을 보니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통화 내용은 참 골 때렸다. 남자가 욕구를 잘 채워주지 못하기라도 했는지 작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그러다 통화가 뚝 끊기더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민망하기는 한가 보네. 그대로 그 여자가 사라졌다면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담배나 피우다가 집에 가버렸을지도 몰랐다. 담배를 피우는 내내 회사 생각을 하니 기분이 거지 같아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대뜸 옆으로 다가와서 앉더니 말을 붙였다.
‘어느 부서에서 근무하세요? 처음 뵙는 거 같은데.’
여자의 얼굴을 정확하게 인지한 순간, 어이가 없었다. 또 그 여자였다. 이제는 이름까지 외워버린 한송이. 왜 얘가 자꾸 눈앞에 알짱거리는 거지. 벌써 네 번째 우연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잘 몰라서 그냥 담배를 내밀었다.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담배를 받아든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폼이 영 어색했다.
‘첫 출근이면 상사분들께 인사 드리고 있어야 할 시간 아니에요?’
당연히 그렇겠지. 이 여자는 자신을 외계에서 온 생명체라도 되는 것처럼, 더러운 바이러스라도 되는 것처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여기 그렇게 쉬운 곳 아니에요.’
그 말을 내뱉고 옥상을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는데 이 회사에 다녀봐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1년은 여기에서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 회사에 다니게 된다면 이 재미있는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확률이 높았다. 여기 있는 동안 심심함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어떤 여자일까, 호기심이 갔다. 살면서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이었으니 더 궁금해졌다.
잠시 후 마케팅 3팀 사무실에 들어서고, 그 여자가 같은 팀이자 사수에 옆자리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이것은 인연일 확률이 아주 높다고 생각했다. 인연 같은 말 따위 믿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믿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우연에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데 그 여자의 얼굴은 반대로 구겨져 있었다. 완전히 똥 밟았다는 표정이었다. 저 표정을 보고 있으니 툭툭 건드려보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던지면 이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지는 마음.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결코 없었다. 지훈에게 타인이라는 건 그저 경계의 대상 정도. 그나마 가까운 사람이라면 말을 더 섞는 정도일 뿐이었다. 타인에 대한 관심 자체를 두지 않았던 삶이었다. 그만큼 따분한 삶이기도 했다.
화가 났는지 지훈을 복도로 불러낸 여자를 향해 뜬금없는 질문을 내뱉었다.
‘선배 취향이 큰 남자 맞죠?’
아까 통화의 내용을 유추하여 던져본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꽤 정곡을 찔렀는지 그녀는 누가 봐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전화를 받고 사무실로 먼저 들어가버렸다.
그날 저녁에는 이삿짐도 정리를 할 겸 빨리 퇴근을 하고 짐을 정리한 후 편의점에 갔는데 거기서도 그녀를 만났다. 여기 사는 건가. 지훈은 분명 그녀를 봤고, 그녀도 지훈을 본 것 같은데 그녀는 다급하게 몸을 숨겼다. 아까 일 때문인가.
지훈은 통화를 하면서 일부러 그녀가 있는 곳 가까이로 다가갔다. 매대의 바로 건너편에 그녀가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계속된 우연이 이제는 우연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빠르게 계산대로 움직이더니 밖으로 나가려다가 넘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녀는 쫓기는 사람처럼 그대로 널브러진 것들을 남겨두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쳤다.
다음 날, 그녀에게 카드를 건네주려고 메신저로 메시지를 건네는데 불쑥 그녀를 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심이 가는 여자를 놀리던 어린 시절의 마음이랄까. 타자를 치면서도 왜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건지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은 신입 환영회에 끌려가 따분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그녀가 밖에 나간 것을 알아채고 바람도 쐴 겸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아주 걸걸하게 전화기에 대고 욕을 내뱉고 있었다. 필시 전 남친일 것이었다.
통화를 끝낸 그녀는 담배가 고파 보였다. 담배를 내밀자 예상대로 받아들었다. 그때 전해주지 못한 카드가 생각났다. 그녀는 역시 카드를 보더니 아주 당황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것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복잡한 표정으로 여자가 담배 연기를 훅 내뱉는데 왜인지 모르게 그녀가 섹시해 보였다.
‘그런데 선배 되게 섹시하네요.’
왜 그런 말을 뱉었을까. 그 순간 천둥이 쳐 여자는 다행히 못 들은 것 같았다. 못 들은 게 다행이기는 한 건가. 차라리 들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따라나섰다.
전 남친인 남자는 그녀를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장을 다 보고 그냥 집에 들어가면 되는데 이상하게 발길이 자꾸만 그녀에게로 향했고 그날은 같이 술을 마시게 되었다.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한 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고, 한 번 바람피운 새끼는 영원히 바람을 피우는 법이었다.
그 새끼와의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게 보기 싫었다. 그냥 그 새끼하고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더 정확한 마음이었을까.
그렇게 한 잔, 두 잔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술에 취하기 시작했다. 술이 꽤 센 편이어서 잘 안 취하는데 그날은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빨랐다. 이성이 점점 잠식되어 가고 있을 무렵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는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마주쳤는지 정확하게 알까. 이 여자가 아는 것보다 더 깊은 인연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술에 취해 주절주절 떠들면서 뭐라고 하는데, 이상하게 점점 이 여자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그거 알아요?’
‘뭐?’
‘계속 보고 있으니까 귀여운 거.’
그 말을 꺼냈을 때는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여자도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잠시 멎은 듯한 시간이 다시 흐르고 여자는 다시 조잘조잘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많은 말을 했다. 그날은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고 싶기도 했다. 이 여자가 믿든 말든, 지금 하는 이야기를 기억하든 말든 그냥 다 꺼내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속에 있는 말을 하고 싶다고 느낀 것도, 해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계속 잘못 누르는 여자. 결국 지훈의 집까지 오고 말았다. 자신의 집인 것처럼 침대에서 널브러져 있는 여자를 보는데 자꾸만 중심부에 힘이 들어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여자라는 존재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집안에서는 아무도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없었고, 엄마라는 존재는 아버지에게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부유한 티는 났으니 다가오는 이들은 지훈에게 목적이 있어 보였다. 이 세상에서 고립된 느낌이었다. 누구에게 정을 주는 것은 미숙했고, 정을 받는 것은 어색했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렇게 굴곡 없이 살아가는 삶도 그다지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지루하다는 게 가장 문제이기는 했지만.
“하….”
지훈은 세상 모르게 남의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 여자를 앞에 두고 별 상상을 다 했다. 그깟 여자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자신이 병신 같았다.
바로 집 밖으로 나가 동네를 몇 바퀴 뛰었다. 그동안 여자가 깨서 그녀의 집으로 가버렸으면 차라리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1시간을 뛰고 돌아와도 그녀는 여전히 꿀잠을 자고 있었다. 지훈은 그날 잠을 소파에 앉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