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오랜만에 한국 오니까 좋지 않냐?”
“좋으면 여기서 눌러살아.”
시크하게 답하는 지훈의 말에 형준이 멋쩍게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가끔 오면 좋다는 거지.”
지훈의 얼굴에는 권태로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1년이라는 시간이 금방 갈 거라 생각하고 가볍게 왔는데 막상 오니 지루했다. 아버지의 협박 아닌 협박 때문에 오게 되었는데 1년이 지난다고 해도 아버지가 쉽게 놔줄지 의문이었다. 그 여우 같은 노인네는 분명 조건을 더 걸거나, 무슨 수를 쓰려고 할 것이다.
홧김에 입사 원서를 쓰고 합격하여 한국까지 오게 되었지만 막상 와 보니 김 회장의 덫에 걸려든 기분이었다. 그냥 손을 놓고 있다가는 여기에 발목을 잡히게 생길지도 몰랐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두어야 했다.
“1년 후에 미국으로 돌아오는 건 확실한 거지?”
“그러면 돌아가지. 계속 여기 짱박혀 있냐.”
“아니, 여기 있다 보면 네가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미쳤냐.”
“견물생심이라고 솔직히 그냥 회사도 아니고 대기업인데 그걸 두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너도 솔직히 욕심나지 않아?”
“그랬으면 내가 애초에 미국으로 갔겠냐. 한국에 어떻게든 개기고 있었겠지.”
지훈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일군 회사가 아주 큰 기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버지의 자식들도 셋밖에 없기에 회사를 물려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런데 커가면서 이 집안사람들에게 신물이 났다.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많은 명준은 시시때때로 지훈을 견제했다. 그나마 여동생은 예체능 쪽으로 관심을 두어서 처음부터 명준과 지훈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지훈은 만약 명준을 제끼고 회사를 물려받게 된다고 해도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아득했다. 명준과 그의 모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훈을 괴롭혀댈 것이었다. 그 외에도 명준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견제를 당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 그깟 회사 안 받는 게 속 편했다. 그래서 폭탄선언을 하고 미국으로 간 것이었다. 그것은 회사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참, 그거 알아? 요즘에 명준이 형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거? 얼마 전에 애들 모임 할 때도 오더니 네 얘기 물어보고 갔다던데.”
“김명준, 그 새끼는 여전하네. 찌질한 새끼.”
다 예상된 수순이기는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면 지훈을 가장 반기지 않을 사람은 명준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끊이지 않고 시샘을 해댔다. 거의 발작 수준이었다. 한국을 떠난 이유도 그 인간의 지분이 컸다. 그렇게 회사를 갖고 싶다는데 그냥 너나 많이 해 먹어라, 하는 심정으로 떠났다.
“SNS에 한국 들어왔다고 올리니까 귀신같이 바로 쪽지 보내더라. 스토커인 줄.”
형준은 핸드폰을 꺼내어 실제로 명준이 보낸 내용을 보여주었다.
“한번 만나자고 하면서 너랑 친하게 지내지 않았냐고 물어보면서 꼬치꼬치 캐묻는 거야. 그래서 요즘에는 잘 안 만난다고 잘 모른다고 했지.”
“내가 말했지. 그 새끼 분명 연락할 거라고.”
“그래서 소름 돋았잖아. 어떻게 알았냐?”
“하는 짓거리가 너무 뻔해.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멍청해 가지고는. 그러니 손대는 것마다 족족 말아먹지.”
“이건 너한테 그냥 떠먹여주는 건데. 그것도 진수 식품을. 이렇게 걷어차도 되는 거냐?”
“먹으면 체할 게 뻔히 보이는데 그걸 미련하게 왜 먹어. 너 줄까? 먹을래?”
“미친놈. 너희 아버지가 순순히 주시겠다, 참.”
얼마 전부터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서 주변을 둘러보니 수상한 인간 하나가 들러붙었다. 김 회장이 붙였나 했는데 하는 짓이 영 어설펐다. 아버지는 철두철미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게 어설픈 사람이면 아예 붙이지도 않는 성격이었다. 그렇다면 뻔했다. 명준의 끄나풀이었다.
뒤를 따라붙으려면 티라도 내지 말든가. 내가 지금 당신 뒤를 밟고 있어요, 라고 광고라도 하듯이 이 더운 날씨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까지 챙겨서 걸치고 있으니 티가 안 날 수가 있나. 하는 짓이 딱 김명준 따까리였다.
가서 뭐라고 하려다가 날도 덥고, 짜증도 나서 그냥 뒀다. 어차피 감출 것도 없었다. 저러다가 제풀에 지쳐서 관둘 게 뻔하기도 했고.
“회사는 다닐 만하냐?”
“다닐 만하겠냐. 꼰대 천지인데. 그냥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짜증 나서 들이받았어.”
“그래도 아버지 회산데 그렇게 깽판 쳐도 되냐?”
“몰라. 팀장이랍시고 꼰대짓 하는데 눈에 거슬리잖아.”
형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저러다 1년이나 버티려나 싶었다.
“마케팅 팀은 왜 간 거야? IT 쪽 말고는 배워본 적도 없으면서.”
처음부터 마케팅 쪽으로 지원할 생각은 없었다. 인터넷으로 모집 요강을 검색하다가 마케팅 쪽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에 봤던 여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안 됩니다.’
‘내놓으라면 내놓지 말이 많아!’
‘저 아세요? 왜 반말을 하세요?’
‘할 만하니까 하는 거야.’
‘그럼 나도 할 만하니까 반말할게. 자료 그냥 못 주니까 공식적으로 요청해.’
‘너 지금 나한테 반말했어? 미쳤냐? 너 내가 당장 자를 수도 있어.’
‘자를 수 있으면 잘라 봐. 너만 욕할 줄 알아?’
한국에 잠깐 들어왔다가 아버지를 뵙고 명준에게 할 말이 있어 명준을 찾으러 가려던 길이었다. 그런데 명준이 어떤 여자와 대치하고 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다.
얼마 전에 봤던 동영상이 떠올랐다. 커다란 대형견과 작은 소형견이 마주 보고 으르릉거리던 그 장면. 몸집의 차이가 꽤 났지만 소형견이 바락바락 짖어대니 끝내 대형견이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던 모습이었다.
저 자그마한 체구에서 어찌 저리도 쩌렁쩌렁한 소리가 나오는지 그 성격이 더럽다는 명준도 쉽게 기를 펴지 못했다. 여자는 평사원으로 보였는데 상무인 명준에게 저렇게 개겨도 되나 싶기도 했다. 저러다 진짜 짤리면 어쩌려고.
명준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다가 기어코 여자의 멱살을 잡았다. 남자 망신을 다 시키는 저 새끼. 가서 말려야 하나 싶다가도 여자의 반응이 자못 궁금해졌다. 분명 뭔가 액션을 취할 거라는 기대감이 들게 하는 여자였다.
‘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호신술이라도 배웠는지 멱살을 잡고 있는 명준의 손을 그대로 잡아 손목을 돌려버렸다. 명준은 손목과 함께 반대로 몸이 돌아가 팔을 팡팡 치며 말했다.
‘놔, 안 놔! 그만해! 아프다고!’
잠시 후 경비들이 와서 송이를 뜯어말렸다. 안 말렸다면 명준의 손목이 부러질 때까지 잡고 안 놔줬을지도 몰랐다.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사냥개를 보는 것 같았다.
‘비켜주실래요.’
상황이 일단락되고 여자와 화장실 앞에서 마주쳤다. 여자는 셔츠의 윗단추가 뜯어져 있었고, 머리도 산발이었다. 지훈이 저도 모르게 그 여자를 보고 있다가 몸을 비켜주었더니 그녀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예전에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음을 지훈은 깨달았다. 2년 전이었나. 그때도 아버지를 만나러 회사에 왔었다. 당시에는 회장과 젊은 직원들의 만남이라고 하여 대담회 형식으로 큰 강당에 모여 대담을 했는데 지훈은 아버지를 기다릴 겸 그 강당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담이라고 하지만 너무 당연한 말들만 오가는 따분한 현장이었다. 팔짱을 끼고 잠이나 자려고 하는데 톤이 높은 음성이 잠을 깨웠다.
‘회장님은 우리 회사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강당 안이 순간 술렁거렸다. 모두의 시선이 한 여자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고는 지훈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 같은 앳돼 보이는 여자였다.
‘음… 자네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여자는 잠시 말을 할지 고민을 하는 것 같더니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조직이 너무 경직되어 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요즘 시대에는 소비자의 니즈에 기민하게 대응을 해야 하는데 경직된 조직에서는 반응을 바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게 우리가 식품업계 1위를 탈환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아무도 소리를 내는 이가 없었다. 신입 직원이 회장을 향해 당돌하게 내뱉은 말은 이 강연장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오늘 대담회는 시간이 없는 관계로 질문은 여기까지만 받겠습니다.’
사회자는 다급하게 여자가 더 말을 하지 못하게 제지하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 회장은 괜찮다고 하면서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지금 질문을 던진 사람은 이름이 뭐지?’
‘마케팅 3팀 한송이입니다.’
‘그래. 한송이 씨는 목표가 뭔가?’
여자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지체 없이 말을 내뱉었다.
‘회장님이 앉아 계신 그 자리에 앉아 진수 식품을 젊고 빠른 회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회장님 자리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요.’
회장은 그 소리를 듣고 껄껄 웃더니 이름을 기억하겠다고 하면서 강연장을 나섰다.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지훈은 저런 골 때리는 인간이 다 있나 하면서 강연회를 나왔다.
지훈도 강 회장을 만나러 가려고 강연장을 나오는 길에 잠깐 화장실에 가는 길이었다. 그 여자와 바로 마주쳤다. 지훈은 그녀의 시선에 빨려 들어가듯 마주한 시선을 그대로 고정하였다.
‘뭘 그렇게 보세요.’
가까이서 본 여자의 눈빛은 꽤 형형하게 빛이 났다. 정말 이 회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