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주변의 시선이 완전히 태호에게 몰렸다. 태호는 그 시선들을 이기지 못하고 담배꽁초를 빠르게 주워들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도망이라도 치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걷는데 통쾌함에 송이는 웃음이 났다.
“무슨 얘기했길래 진태호 얼굴이 시뻘게요?”
“김지훈 씨 지분이 반은 되는 것 같은데.”
“난 별말 안 했는데. 찌질하게 힘자랑이나 하려는 것 같아서.”
“나도 별말 안 했어. 나대길래 팩트 폭격 좀 했더니 저러네.”
조금 전, 태호가 갑자기 몸을 들이밀면서 손을 들었을 때는 움찔했다. 하지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송이가 아니었다. 자신보다 큰 사람을 상대할 때는 하체가 약점이 된다는 아빠의 가르침에 따라 조금만 더 다가오면 정강이를 까버릴 생각이었다. 그 정도 위협이면 충분히 정당방위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나타난 지훈으로 인하여 정강이를 까는 불상사까지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 지훈이 나타났을 때 안도감이 들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어제까지 으르렁거리던 사이라고 해도 같은 적을 공유하게 되면 동지가 된다고도 하던데.
평소의 행실이 그렇게 탐탁지 않았음에도 아까 태호를 상대로 조곤조곤 주둥이로 까는 지훈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 주둥이가 자신을 향할 때는 참 얄미웠는데 같은 편에 있으니 든든한 느낌이랄까. 저 싸가지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이야.
“더럽게 마음에 안 드네. 저 간신배 새끼.”
지훈의 독한 혀는 멈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태호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같이 입사했을 당시에는 같은 팀에서 송이와 서로 의지를 하면서 일을 배워나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상사들과 자주 술자리를 가지면서 노선을 바꿨는지 노골적으로 아부를 떨어댔다. 입사할 때부터 성공을 입에 달고 살던 놈이 이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택한 방식이었다.
“자기한테 이득이 된다 싶으면 언제든 뒤통수칠 상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개기고 괜찮겠어요? 진태호도 앞으로 자주 마주칠 텐데.”
“무작정 개긴 것도 아니고. 선배한테 손찌검을 하려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참아요. 뭐라고 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저 입에서 나오는 말에 순순히 동의가 될 때도 있네. 뭔가 이전과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드는 것 순전히 기분 탓일까.
그런데 얘는 대체 무슨 깡이지. 같은 팀 상사한테 개겨 봤자 회사 생활만 고달파진다는 걸 송이는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진태호 저거 뒤끝이 긴 놈인데.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조 부장은 뭐래요? 아까 분위기 살벌하던데. 괜찮아요?”
“안 괜찮을 게 뭐 있어요. 맛없어서 맛없다고 한 건데.”
그래, 맛이 없다는 건 사실이지만, 머릿속에 있는 것을 누구나 다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아까 조 부장 사무실에 들어올 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지 않았어요?”
송이는 조 부장이 외근에서 복귀할 때 인상을 쓰면서 지훈의 자리가 왜 비어 있는지 물었던 걸 떠올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조 부장하고 만났어요.”
“만나다니? 어디에서?”
“사우나에서요.”
이건 뭔 소리야. 사우나라니. 지훈은 오전에 사무실에 있었고, 오후에는 외근을 보냈는데 웬 사우나?
“오늘?”
“외근 안 가고 사우나 간 건 아니고요.”
지훈은 의구심을 가득 품은 표정의 송이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 송이는 더욱 의문이었다.
“아까 점심시간 때 사우나 갔다 왔어요. 점심시간은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그렇다고 누가 점심시간에 사우나를 가요.”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이라는 말을 뒤에 붙이고 싶었지만 생략을 했다. 이 인간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다.
“조 부장 놀라는 꼴이나 한번 보고 싶어서요.”
“네?”
“근무 시간에 사우나 다녀와서 팅팅 뿔은 몸땡이로 뒤뚱거리는 거 보기 역겹잖아요. 짜증 나서 경고 한번 해주려고요.”
“경고? 김지훈 씨가?”
뭔가 뒤바뀐 것 같은데. 신입이 팀장한테 경고를 한다는 게 어폐가 있지 않은가.
“내가 당신 지켜보고 있다. 이런 거?”
얘는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조 부장이 어느 사우나를 가는 줄 알고?”
“점심시간 때 이 근처에 몇 군데 가봤는데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범위를 더 넓혀서 찾아보니까 있던데요. 회사 사람 만나는 건 싫은지 잔대가리는 잘 굴리더라고요.”
헐. 그래서 점심시간 때마다 사무실에 없었던 건가. 의외로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보통 부장 정도의 사람이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고 말 텐데. 굳이 자기 시간까지 써가면서 그것도 부장하고 사우나에서 마주치려고 한다? 이건 보통 사람의 상식선에서는 설명이 어려운 일이었다.
“부장님 사우나 하고 계시네요? 하고 물었더니 표정이 급속도로 썩는 거예요. 옆에는 비슷한 배불뚝이 남자 두 명 있었고. 놀라면서 여기서 뭐 하냐고 물어서, 점심시간이어서 사우나 하러 왔다고 부장님도 점심시간에 사우나 이용하시는 거냐고 물으니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던데요. 어제 한잔 때리고 오전부터 짱박혀서 잠이나 처자고 있었겠죠.”
송이는 조 부장이 지훈의 자리를 가리키며 표정이 어두웠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사우나에서 농땡이를 피우다가 신입사원과 마주치면 어떤 기분일까. 해본 적은 없지만 상당히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았다. 그것도 신입이 생글생글 웃으며 점심시간에 사우나를 이용하러 왔다고 하면 조 부장의 성격에 더 열불이 나지 않았을까.
점심시간이야 각자 자유롭게 이용하는 게 룰이니 사우나를 가든, 집을 다녀오든 제시간에만 돌아온다면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얘는 정말 찐또라이였다. 지금까지 사우나를 다니는 조 부장의 꼴이 정말 보기 싫었지만 직접 그 현장을 검거하러 가다니.
“조 부장은 진짜 답이 안 나오던데. 아까 회의실에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너, 나하고 지금 뭐하자는 거야?’
‘뭘 하고 싶은 건 없습니다만.’
이 정도 분위기를 잡았으면 분위기 파악을 하고 기어야 정상인데 지훈은 오히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아, 조금 전에 시식한 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의견 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의견을 말씀드렸는데. 맛없다고.’
조 부장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한낱 신입에게 팀원들이 모두 모인 회의실에서 이런 굴욕을 당할 줄이야 알았을까.
‘부장님의 작품이니 역시 최고!’ 이러면서 앞뒤 없이 빨아주는 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회사가 공산당도 아니고. 그래서 말씀드린 건데 뭐 문제라도 있나요?’
‘최고!’라는 말을 내뱉을 때는 목소리 톤까지 높여가며 과장을 했다. 부장은 지훈의 연이은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지훈이 선수를 쳐서 말도 못 하게 만들었다.
‘그, 그래… 그래서 어디가 어떻게 맛이 없는데. 맛이 없다고 했으면 그 이유도 있겠지.’
조 부장은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모으며 말을 했다. 하지만 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국물이 맹탕이에요. 스프에 뭘 넣었는지 모르겠는데 국물에서 묵직한 감이 없으니 국물 한 모금 마시자마자 기대치가 확 떨어졌고요. 간도 잘 안 맞아요. 간이 센 편인데, 국물은 가볍고 간은 세니 입에서 겉돌아요. 면도 더 얇은 게 낫고. 그냥 총체적 난국이네요.’
묵직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돌직구에 조 부장은 인내심이 바닥이 나 폭발하고 말았다.
‘네가 뭘 알아? 이제 갓 들어온 신입이 뭘 안다고 나대!’
‘이게 맛이 없다는 건 알겠던데요.’
‘맛이 없으면 어쩔 건데. 다음 달에 출시인데 대안이 있어? 대안도 없이 의견 내는 것만큼 무책임한 짓이 없어. 알아?’
‘대안이야 없지는 않죠. 다 갈아엎고 다시 준비해서 출시를 하는 수밖에.’
‘여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어갔는지 알아? 너처럼 물정 모르는 것들이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 있어?’
‘소비자가 그런 걸 생각이나 하나요. 그냥 맛없으면 안 사는 거지. 시간을 들여서 준비를 해도 성과가 안 보일 게 뻔하면 엎는 게 회사에는 이득이죠. 회사가 자선 단체도 아니고 직원들 자아실현 시켜주는 곳이 아니잖아요.’
‘이 건방진 게. 신입 나부랭이가 어디서 누구를 가르치려 들어?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어떻게 책임지면 될까요? 제 말이 틀렸으면 그만두면 될까요. 제 말이 맞으면 부장님이 그만두시고?’
‘뭐?’
지훈은 조 부장과 회의실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조곤조곤 설명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서 송이는 왜 두려움이 이는지 몰랐다. 이 인간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불현듯 그런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마주하게 될 공포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남들은 그냥 머리로만 생각하는 걸 이 인간은 그게 무엇이든 몸소 실천을 하였다.
“조 부장 알아듣지도 못하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두고 보자고 하면서 회의실에서 나가더라고요.”
지훈의 얼굴에서는 두려움의 기색이나, 긴장감이나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부장 앞에서 그렇게 개겨놓고 어떻게 저리도 천연덕스러울 수가 있는 건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저럴 수는 없었다.
“조 부장 솔직히 재수 없잖아요. 사무실에는 붙어 있지도 않고 일거리만 던져주고. 자기 잘못에는 관대하면서 누구 하나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꼬투리 잡아서 지랄지랄을 해대고. 아까도 회의하는데 아이디어나 훔쳐 가려고 수첩에 적는 거 봐요. 그런데 시식한 건 맛까지 없으니까 짜증이 더 확 올라오더라고요.”
구구절절 동의하는 바였다. 어느 날엔가 회의 때 발표한 내용에 대해 그렇게 잔소리를 하고, 꼬투리를 잡으며 이게 되겠냐고 그러더니 자기가 상부에 보고하는 자료에는 떡 하니 그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계획한 내용인 것처럼.
그것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게 어떤 기분일지 알 수 있었다. 조 부장은 그 이후로 더 자주 회의를 열면서 발표와 보고를 강요했다. 그때마다 어떻게든 아이디어를 빼가려고 혈안이었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구는 지훈의 행동에 괜찮을까 싶다가도 송이는 자신의 신입 시절이 생각났다. 다른 상사들이 자신을 보면서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포기할 건 포기하고 고분고분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사람도 점점 사회의 물이 들어 포기하는 게 생기겠지. 아니면 회사를 뛰쳐나가든가.
“김지훈 씨….”
이 상황에서 송이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지 고민이었다. 그렇게 해봤자 회사에서 짤리기밖에 더하지 않겠냐며 조직 생활을 하려면 참아야 한다고 같잖은 충고나 해야 할지.
“잘했어요.”
나도 모르겠다. 김지훈이라는 인간이 앞으로 뭔 짓을 할지. 내 코가 석 잔데 누굴 걱정해. 그리고 빨리 짤리면 좋지 뭐. 골칫덩인데.
“칭찬이에요?”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건 일등이었다. 그래, 니 마음대로 생각해라.
송이는 씁쓸함을 감추고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