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한때 그런 적이 있었다.
젊은 혈기에 조금이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게 있으면 바로 말을 하고, 시정을 건의했던 때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신념을 속이는 거라고, 여기에서 참으면 너는 정의롭지 못한 거라고, 목숨을 부지하고자 비겁하게 사는 것이 의미가 있겠냐고.
이런 생각을 하며 불길이라도 뛰어들어 부딪혀보겠노라고 다짐을 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연차가 쌓이면서 점점 회사라는 곳에 융화가 되고, 그것을 유연성이라고 부르며,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어차피 발악해 봤자 바꾸지 못하는 것도 있다는 인정, 내지는 포기라고나 할까.
이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게 되고 하나의 개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을 때쯤에는 일종의 관성 같은 게 생기기도 한다. 거슬리는 게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그냥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개발 과정에 참여한 이들은 조 부장의 독재에 저항해 봤자 바뀌는 건 없다는 걸 몸소 체득했을 테고, 정말 아니라고 생각을 해도 반기를 들어봤자 돌아오는 건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느냐는 갈굼뿐이기에 몸을 사릴 수밖에.
하지만 또라이 신입은 그런 게 없었다. 머릿속에 든 것을 필터를 거치지 않고 내뱉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송이는 마치 자신의 신입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자신은 저 정도 또라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훈의 한마디에 회의실에는 지독한 적막감만 감돌았다. 다들 조 부장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이런 게 팔려요?”
거기에 굴하지 않고 신입은 기름을 들이부어 불바다를 만들었다. 삽시간에 퍼진 불길은 회의실을 몽땅 태워버릴 기세였다. 조 부장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시뻘게져서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다 나가. 김지훈, 너만 남아!”
조 부장은 모두 나가라면서 호통을 치더니 지훈만 남으라고 소리쳤다. 모두 우르르 나가는데 문이 닫힌 회의실 안에서 고성이 들렸다. 울분을 참지 못한 조 부장이 토해내는 소리였다.
조 부장과 또라이라.
참 상극이었다. 어쩌면 누구 하나는 끝장을 봐야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한송이, 잠깐 보자.”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데 태호가 송이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말을 했다. 얼굴이 상당히 구겨져 있는 걸 보면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옥상까지 올라가는 내내 말이 없던 태호는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송이를 노려보며 분노가 가득한 시선을 쏘았다. 엄청 대단한 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무게를 잡는 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옥상으로 따라오라고 해놓고서는 눈싸움이나 하고 있는 꼴이었다. 꼬나보고 지랄이야.
“바쁜데 왜?”
“후우….”
태호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다시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김지훈 저 새끼 안 잡고 뭐 하냐?”
이게 뭐래는 거야.
“저 새끼 저렇게 날뛰는데 그냥 보고만 있어? 사수라는 게?”
“너, 지금 뭐하냐?”
이 새끼가 어디서 훈계질이야. 지가 상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본새가 기분을 아주 더럽게 만들었다.
“니가 처신을 똑바로 못하니까 내가 가르쳐주고 있는 거 아니야. 신입이라는 게 분위기 파악은 X도 못 하고, 저 지랄하고 있으면 사수가 교육을 시켜야 되는 거 아니야? 저거 하는 짓거리 보고도 심각성을 못 느끼냐?”
태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거칠게 바닥으로 던지더니 발로 짓이겼다. 이 새끼가 멀쩡한 재떨이 옆에 놔두고.
“걔가 뭐 어쨌다고.”
이럴 생각은 없었다. 김지훈을 변호할 생각 같은 거.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누구보다 김지훈을 옆에서 보면서 빡치는 게 송이 자신이었다.
“부장님한테 하는 거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저게 팀 분위기 씹창내고 있잖아. 평소 행실도 X같이 하고. 저게 신입이야? 한 10년 차 되는 팀장이지.”
결론은 부장한테 반기를 들어서 심기가 아주 불편해지셨다는 건가. 조 부장의 딸랑이가 어련하시겠나.
“아주 부장님 호위무사 납셨네. 그게 그렇게 불편하셨어요? 사실 바른 말이잖아. 넌 솔직 그게 맛있냐? 먹어보면 대충 감 오잖아.”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똥오줌도 못 가리고 내뱉는 게 바른말이야? 맛없다고 하면 다 엎고 처음부터 다시 계획할 거야, 뭐야?”
“그럼 너는 그걸 왜 시식하라고 가져온 건데. 의견 말해보라고 시식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너처럼 같이 딸랑거려 달라고? 혼자 하기는 심심해?”
“제품 출시 되기 전에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거잖아! 그리고 부장님 비위 좀 맞춰주는 게 이상한 거야? 사회생활 하면서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냐.”
팩트 폭격을 제대로 맞았는지 태호는 버럭 화를 내면서 분노를 뿜어냈다. 너 잘 걸렸다, 새끼야. 송이는 잘됐다 싶어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부장님 비위 맞추려고 회사 다녀? 제품 계획은 왜 하는데. 소비자들한테 잘 팔려고 하는 거잖아. 그런데 뻔히 안 팔릴 게 보이는 걸 먹고 비위나 맞추는 게 식품업계 마케터라는 게 할 짓이야? 저런 의견 정도도 못 내면 그 조직은 썩어빠진 거지. 그게 정상적인 조직이라고 생각하냐? 왜, 너는 못 하는 걸 김지훈이 하니까 빡쳐? 너도 조 부장한테 팩폭 날리고 싶은 적 많았을 거 아니야. 너도 가끔 조 부장한테 설설 길 때마다 자괴감 생기지 않냐?”
“…….”
“김지훈 같은 애가 있어야 발전이 있는 거야. 너 같은 놈만 있으면 고이다 못해 썩어빠지는 거고.”
얼굴이 뻘게진 진태호를 보니 그동안 조 부장 때문에 답답했던 명치가 시원하게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니가 김지훈이 일하는 거 봤어? 니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는데 시키는 건 따박따박 잘해.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정도면 됐지. 실제로 겪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니 멋대로 지껄이지 마.”
그런데 왜 자꾸 김지훈을 감싸고 있는 거지? 그를 옹호하는 말을 내뱉는 자신이 어색하기도 하고, 괜히 찝찝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듯한 이 더럽고 생소한 기분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아주 꼴통들끼리 잘 만났네. 사수가 꼴통이니 신입이 꼴통 짓을 해도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고. 왜, 너 신입 때 보는 것 같아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송이는 순간 욱할 뻔했다. 송이가 신입 때 상사들한테 개겼다가 분위기가 싸해졌을 때도 몇 번 있기는 했지만 싸가지하고 비교를 하다니. 하지만 여기서 말려들 수는 없기에 일단은 참았다.
“너처럼 하도 딸랑거려서 거기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보다는 그냥 꼴통이 낫지.”
“이게 진짜 돌았나.”
“나 미친년인 거 이제 알았냐.”
“진짜 이 개또라이가.”
날도 덥고 불쾌지수도 오르는 마당에 태호는 열까지 올리며 씩씩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왜 이리 고소한지. 그동안 조 부장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잇속이나 챙기려고 안달 난 모습이 아주 꼴도 보기 싫었는데 대놓고 지르고 나니 속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누가 이 회사에서 오래 살아남을 것 같냐? 회사는 연줄이야. 지금은 너 잘난 맛에 살고 좋지? 나중에 나한테 빌붙어서 도와달라느니 그딴 소리만 해봐라.”
“그래, 너 혼자 다 해 처드시고 오래오래 해 먹으세요.”
회사에서 연줄이 중요하다는 건 인정을 한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끌어주고, 당겨주면 분명 회사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게 있겠지. 하지만 그런 연줄이라는 건 다른 이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독고다이 정신으로 살아온 송이의 체질상 그런 건 거부감이 들어 애초에 맞지도 않았다.
“한송이, 이제 대리도 달았으면 정신 좀 차려. 아직도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서 어쩌려고 그러냐. 안쓰럽다, 안쓰러워.”
“니 거기나 안 떨어지게 잘 간수해 이 새끼야.”
“이 미친 게 진짜!”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는지 태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며 손을 들더니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이러시면 안 되죠.”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태호의 팔을 잡았다. 태호보다는 한 뼘 정도 더 큰 지훈이 중간에 끼어들어 태호를 제지했다.
“손을 올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연약한 한 대리님한테.”
“이거 안 놔?”
태호는 지훈에게 잡힌 손목을 부들거리며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한테 힘자랑하는 남자만큼 못난 인간이 없다고 하던데.”
“뭐?”
지훈은 태호의 손목을 놓더니 더러운 물건이라도 만진 것처럼 손을 탈탈 털었다.
“이 개새끼가! 너 눈에 뵈는 게 없냐? 나 너보다 상사야!”
“아무리 제가 개새끼여도 그렇지, 상사면 막 개새끼라고 불러도 돼요? 저분들한테 한번 여쭤볼까요.”
지훈의 말에 태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옥상에 왔을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태호를 주시하고 있었다. 태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동료 여직원에게 손을 든 것도 모자라 신입 직원에게 욕까지 했으니 다른 이들이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시죠. 한 대리님하고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지훈의 손짓에 태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아 보였다. 얼른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지훈의 목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
“진 대리님.”
돌아보는 태호를 향해 지훈이 발바닥으로 바닥을 콕콕 짚으며 말했다.
“담배꽁초 주우세요.”
“뭐?”
“청소하시는 분이 바닥에 뭔 꽁초가 이리 많냐고 뭐라고 그러시던데. 꽁초도 더럽게 발로 짓이겨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