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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8/44)

29화

“차장님, 잠시만 보류해주시면 안 돼요? 디자인 시안이 바뀔 것 같은데 하루만 더요. 정말 죄송해요. 내일은 꼭 확정할게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일정을 멋대로 변경하면 어떻게 하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원래 한 성격 하는 윤 차장은 오늘 더 뚜껑이 열렸다. 송이 또한 중간에서 의견을 전달하는 입장이지만 윤 차장의 내지르는 화는 모두 송이가 받아내야만 했다. 조 부장의 변덕 때문에 제품의 디자인이 바뀌는 바람에 여기저기 사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가 곧 회의 들어가 봐야 되어서요. 곧 연락드릴게요.”

윤 차장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계속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송이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오늘 아침부터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느라 핸드폰이 후끈후끈거렸다. 귀가 뜨거울 지경이었다.

디자인 팀 쪽에는 이미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난 뒤였다. 그나마 친한 신 과장이 책임자여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욕은 욕대로 다 들어먹었을 것이다.

그쪽에서도 일정이 있을 텐데 다 끝난 마당에 다시 디자인을 수정해달라고 하니 상대 쪽에서는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다시피 하여 겨우 디자인 수정 스케줄을 잡았다.

누구 때문에 중간에 끼어서 등이 터져 나가고 있는데 조 부장은 아침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에 톡으로 디자인 변경해두라는 말만 남겨두고는 아침부터 어디로 외근을 나가서 짱박혀 있는지 도통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덕분에 마케팅 3팀은 비상이었다.

신제품 출시가 겹치는 바람에 원래 계획대로 해도 정신없는 마당에 조 부장이 던지고 간 폭탄에 아비규환이었다. 내부적으로 정한 출시일에 맞추려면 너무 빠듯했다.

“후… 미치겠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옆을 돌아보는데 텅 비어 있는 자리가 보였다. 처음에 세팅된 컴퓨터와 주변기기들을 제외하고는 아주 깔끔한 책상. 그 흔한 달력이나 휴지 하나, 아니면 볼펜이라도 하나 있을 법한데 아무것도 없었다. 이 사무실을 처음 와본 사람이라면 누가 그만두고 나간 자리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아무리 깨끗한 자리라고 해도 누군가 쓰면 사람의 흔적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남는 법인데 지훈의 자리는 그런 것이 없었다.

아침에 출근은 9시가 되기 1분 전에 하고, 한 번 나가면 30분은 기본으로 자리를 비워주시고, 언젠가는 하도 안 들어와서 어디 갔나 찾아봤더니 수면실에서 아주 꿀잠을 자고 있었다.

‘피곤할 때는 자야죠. 억지로 해봤자 효율도 안 나오고. 책상에서 조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맞는 말이다. 피곤할 때 눈을 붙이라고 만들어둔 곳이니 맞는 말인데. 점심시간에는 어디를 쏘다니는지 밥도 혼자 먹으러 가면서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업무 시간에 저러고 있으니 열불이 터졌다.

‘선배도 피곤해 보이는데 여기 누워봐요.’

해사하게 웃으며 그딴 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더 열이 올랐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들이 모두 터지려고 했지만 하나하나 더 말을 했다가는 꼰대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가까스로 참았다.

최근에 영업팀의 일까지 떠맡게 되어 마트에 가서 체크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거기까지 다녀올 시간이 없어서 지훈에게 다녀오라고 했더니 함흥차사였다.

오늘은 조 부장이 2주 전부터 잡아두었던 회의까지 있는 날이었다.

남은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하느라 돌아버리겠는데 누구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자빠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트 한번 돌고 올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나있었다.

조 부장이야 이 회사에서 15년 짬밥이라도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이제 2주 차 된 신입이 15년 차 팀장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희한한 게 하나 있기는 했다. 그렇게 자리를 비우고, 땡땡이를 치는 것 같은데도 지시한 일들은 다 해두어 제시간에 건네주었다. 저걸 언제 다 했을까 싶을 정도로 의문스러웠다. 그러니 막상 뭐라고 하려다가도 뭐라고 할 건덕지가 없었다.

“부장님 오셨습니까.”

진만이 외근을 마치고 들어오는 조 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 부장은 비어 있는 지훈의 자리를 보더니 인상을 확 구겼다. 짜증이 가득 배어 있는 얼굴이었다.

“어디 갔어?”

“마트 외근 나갔습니다.”

“벌써 외근을 시켜?”

“오늘 처리할 게 많아서 혼자 보냈습니다.”

너 때문이잖아, 인간아. 이 사태의 원흉인 주제에 어디 가서 뭐 하다가 이제 나타나서는 뻔뻔한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언제 나갔는데?”

“아까 나갔는데… 아, 저기 들어오네요.”

자기 얘기하는 건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들어오는 저 싸가지. 손에 든 검은 봉지에 뭔가 잔뜩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있는 신입은 뭐가 좋다고 웃으면서 들어오고 있었지만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인상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송이는 눈치가 없는 저 인간을 향해 고개를 작게 저으며 신호를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수신이 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드세요. 마트 직원이 아이스크림 주길래 받아왔어요.”

지훈이 검은 봉지를 펼치며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주변의 이들은 조 부장처럼 표정이 좋지 못했다. 하필이면 경쟁업체인 유진 식품에서 나온 아이스크림들이었다.

조 부장은 유진 식품과의 악연까지 있었다. 야심 차게 준비한 제품이 유진 식품에서 내놓은 제품에 완전히 밀려 상부로부터 제대로 깨진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화장실 좀 다녀와야겠다.”

진만은 조 부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리를 슬쩍 피했다.

“아이스크림 안 드세요? 부장님 하나 드릴까요?”

지훈이 하필이면 유진 식품의 빅 히트상품인 미미콘을 들고 조 부장에게 건넸다. 조 부장은 지훈의 손이 민망하게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5분 내로 다들 회의 준비해서 들어와!”

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왜 저래요?’라고 송이를 향해 입 모양으로 말을 했다. 송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료를 주섬주섬 챙겨 회의실로 향했다.

오늘도 역시 하나 마나 한 회의가 진행되었다. 의견을 나누는 장이라기보다는 의무적으로 하는 회의였다. 조 부장은 이런 것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다. 발표를 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꼬투리를 잡으며 지적을 하곤 했다. 윗사람들에게 깨지고 오면 다른 직원들에게 스트레스라도 풀려는 것인지 그런 날은 지적을 하는 강도가 더 셌다.

그게 아니면 유심히 발표하는 내용을 지켜보다가 수첩에 적기도 했다. 무슨 내용을 적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나중에 자신의 아이디어로 써먹기 위함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회의에서 나온 내용이 나중에 조 부장의 아이디어로 둔갑을 하여 제품이 출시된 적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유진에서 나온 매운고추면은 맵고 알싸한 맛에 중점을 두었다면 우리 쪽에서는 그 맛과 차별화되는 지점을 가져갈 수 있도록 맛있게 매우면서 단맛과 조화를 이루는 방면으로 연구소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날 수 있도록….”

발표를 하는 송이의 말을 듣고 있던 조 부장의 눈이 번뜩 빛났다. 송이가 하는 발표에서 조 부장은 아이디어를 얻어갈 때가 많았기 때문에 더 집중을 하는 편이었다. 송이는 그런 조 부장을 향해 이를 꽉 깨물며 발표를 이어나갔다. 회의실 가장 멀리 앉아 있는 지훈은 하품을 쩍쩍 하면서 이따금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송이의 발표가 끝나자 불이 켜졌다. 송이가 마지막 차례였다. 모든 발표가 끝나자 기지개를 켜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디어가 신선한 맛이 없어. 그 월급 받고 밥이 넘어가?”

아까 그렇게 열심히 적을 때는 언제고. 회의 끄트머리에는 꼭 저렇게 초를 치며 마무리를 짓는다. 그럴 거면 적지나 말든가. 저 수첩이 목숨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찌나 소중하게 간직하는지. 저렇게 동료 직원들의 고혈을 뽑아 먹고 목숨을 부지하는 인간이 이 팀의 우두머리라는 게 절망스럽지만 현실이었다.

“회의 마치기 전에 이번에 부장님께서 기획하신 제품 시식 한번 해보시죠.”

아까 송이가 발표를 할 때 부장의 딸랑이를 자처하는 진태호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면서 눈에 자꾸 걸리더니 저걸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다음 달에 출시가 예정된 ‘꼬꼬댁면’이었다.

닭 육수를 베이스로 한 면 요리였는데, 평소에 삼계탕을 주구장창 먹으러 가는 부장이 예전부터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프로젝트였다.

그동안 닭 육수로 만든 제품 중에 히트한 것도 있었지만 실패한 것들이 더 많았다. 라면의 맛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에게 하얀 국물의 면 요리는 다가가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조 부장은 평소에 닭요리 매니아인 점을 강조하며 기획 단계부터 아주 자신감을 보였다.

제품 연구를 진행할 때 잠깐 참여한 송이는 개발 단계에서 몇 번 맛을 보았는지 그다지 소비자에게 먹힐 만한 맛이 아니었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공략하기에는 맛이 애매했다. 그렇다고 저렇게 들떠 있는 조 부장에게 직언을 했다가는 어떤 괴롭힘을 당할지 몰랐다. 갑자기 일을 던져주든,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든 어떤 형태로든 보복을 했다.

연구소의 직원들도 고개를 갸웃했다는데 조 부장이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

“그릇 하나씩 들고 드세요.”

태호는 면을 직접 끓여서 그릇에 소분하는 정성까지 들여가며 다른 사람들에게 먹어보기를 권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부장은 아주 흐뭇한 표정이었다.

“다들 먹어보고 솔직하게 의견 말해 봐.”

이미 제품이 출시를 코앞에 두고 맛이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조 부장의 비위를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릇을 들고 한 젓가락씩 맛을 보던 사람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갑자기 정적이 흐르고 서로 눈치만 봤다. 누구 하나 입을 열면 좋으련만 쉽게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송이는 이런 분위기를 잘 알았다. 이런 걸 흔히 망할 징조라고 하지, 아마. 먹어보면 감이 팍 오는 게 있었다. 이 꼬꼬댁면이 그랬다.

“왜 다들 말이 없어?”

조 부장의 물음에 누구라도 하나 입을 열기만 기다리고 있던 그때, 정적을 깬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이거 맛이 왜 이래요?”

바로 젓가락을 내려둔 지훈이 휴지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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