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목 아파.”
버스에서 내린 송이는 목을 만지작거렸다. 오랜만에 성대를 제대로 놀려줬더니 목이 뻐근한 느낌까지 들었다.
오늘은 조신하게 있다가 오려고 했는데 송이가 없이는 기어이 노래방에 가지 않겠다는 애들 때문에 노래방까지 가게 되었다. 이번 주는 특히 업무 때문에 야근이 많아서 주말에 푹 쉬려고 했다가 오랜만에 모임을 꼭 나오라는 동기들의 성화에 억지로 나온 것이었다.
얼굴이나 비치고 시간 좀 때우고 올 생각이었지만 노래방에 들어가 기계에서 음이 흘러나오니 송이의 몸에서 꿈틀거리는 가무 본능이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른 애들이 노래하는 걸 보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여지없이 실력을 발휘하였다.
‘아까 안 온다고 했던 애 맞아? 제일 잘 노네.’
‘한송이, 회사에서 진짜 스트레스 많이 받나 봐. 애가 한풀이 하듯이 노냐.’
동기들은 댄스곡과 함께 헤드뱅잉까지 하는 송이를 보면서 역시 한송이,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풀어버리겠다는 일념하에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나중에는 송이가 계속 시간을 추가하자 다들 자기들이 잘못했다면서, 제발 집에 좀 가자고 송이의 바짓가랑이 붙잡고 애원했다. 송이는 그들의 애원에 ‘라스트 30분!’을 외치며 마지막 불꽃을 하얗게 태웠다.
노래방에서 나오는 일행들은 거의 5차까지 간 사람들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같이 노래방에 갔던 열 명 정도의 동기들이 모두 송이에게 기가 제대로 빨렸다. 들어갈 때는 표정이 밝지 않던 송이가 나올 때는 기가 충전된 듯 밝은 표정이었다.
“편의점이나 갈까.”
얼마 전, 편의점에서 거구의 남자와 부딪히고 도망치듯 나왔던 일 이후로 편의점에 발을 들이지 않다가 알바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편의점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노래방에서 너무 힘을 쏟고 왔더니 간단하게 요기할 거리가 필요했다. 무얼 먹을지 생각하며 편의점으로 향하는데 편의점 앞에 펼쳐진 파라솔에 익숙한 모습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여기서 뭐 해?”
테이블 위에는 절반 정도 남아 있는 컵라면과 마찬가지로 반 정도 비워져 있는 소주병이 있었다. 남자는 다른 의자에 발까지 걸치고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왔어?”
철민은 이곳이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묻더니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송이는 뜬금없는 아빠의 등장에 맞은편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왜 여기 있어?”
“너 기다리고 있었지.”
“여기서?”
“여기는 꼭 지나가잖아. 집에 없는 것 같길래 여기서 기다렸지.”
송이에게는 전혀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핸드폰을 조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레이싱 게임이라도 하는지 몸을 이리저리 기울이면서 게임에 빠져 있었다.
“오늘 장사 안 해?”
“오늘 임시 휴무야. 너희 엄마 친구들하고 여행 갔어. 아빠가 시원하게 보내줬지.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엄마가 아빠한테 휴식 시간을 준 게 아니고?”
“그런가?”
송이네 집안의 권력자는 누가 뭐래도 엄마인 영숙이었다. 대충 어떤 그림일지 안 봐도 훤했다. 엄마가 여행을 다녀온다는 말에 아빠는 문을 닫고 쉴 생각에 내심 기뻐하면서 잘 다녀오라고 환호를 했을 것이다.
“에이. 또 졌네.”
철민은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두고 컵라면을 들고는 면을 후루룩 먹었다. 면도도 안 했는지 턱에 덥수룩하게 난 털에, 컵라면에 소주를 까고 있는 모습이 누가 보면 노숙자로 오해하기 딱 좋았다.
“밥도 안 먹고 다녀? 여기서 무슨 컵라면이야.”
“난 여기서 먹는 컵라면이 그렇게 맛있더라. 우리 딸 기다리면서.”
철민은 국물을 호로록 마시더니 두 팔을 위로 들고 기지개를 켰다. 그는 가끔 예고도 없이 송이의 집 근처에 나타나 이렇게 놀라게 하곤 했다. 이런 예측 불가한 성격은 송이가 물려받아 그녀의 자유로운 성격에 한몫하였다.
“엄마랑 또 싸웠어?”
철민이 나타났다는 건 용건이 있다는 뜻이었다. 엄마와 싸워서 피신을 할 곳이 필요하다거나, 엄마와 싸웠는데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몰라서 조언을 구한다든가, 엄마와 싸웠는데 누구의 잘못인지 판단이 어려워 의견을 구한다든가. 대부분 엄마와 관련된 것이었다.
“요즘 엄마하고 아빠 사이좋아. 잘하면 네 동생 생길지도.”
“아빠, 미쳤어?”
송이의 부모님은 송이를 이십대 초반에 낳았다. 그래서 아직 부모님은 이제 오십이 되어 마음만 먹는다면야 늦둥이도 낳을 수 있기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 큰 자식이 서른을 앞두고 있는데 동생이라니.
“어, 요즘 엄마하고 미친 사랑 중이야.”
“헐.”
철민은 오십이 되어서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말이나 행동을 하곤 했다. 정말 철이 들지 않는 아빠였다.
“경수한테 전화 왔어.”
“뭐?”
“경수가 뭐 잘못했어?”
철민의 입에서 경수의 이름이 나올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왜 아빠한테까지 전화하고 난리야. 이게 진짜 미쳤나.
“사랑싸움은 조용히 좀 해라. 내가 너희 싸우는 것까지 알아야 되겠냐.”
“뭐라고 했는데?”
“뭐라고 하지는 않았고 죄송하다고 울던데.”
이게 아주 동네방네 찌질한 짓은 다 하고 자빠졌네. 경수는 철민을 유독 잘 따랐다. 철민도 그런 경수를 좋아했고.
“바람피웠구나.”
“…….”
“헤어졌어?”
“그래.”
“잘했다.”
철민은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고는 한 잔 쭉 들이켰다. 그러고는 크으, 하고 인상을 쓰면서 다 식어 빠진 컵라면 국물을 마셨다.
“그걸 그냥 뒀어?”
“거기 한번 제대로 차줬어. 바로 쓰러져서 나뒹굴던데.”
“그것도 잘했네.”
철민은 다시 잔에 있는 술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송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경수를 좋게 보기는 했지만 우리 딸 눈에 눈물 나게 하는 놈은 가만히 못 두지. 아작을 내야 되는데. 아빠가 경수 거기 한 번 더 차줄까?”
“안 울었거든.”
“은유적인 표현이잖아. 은유.”
젊었던 시절 시를 썼다던 아빠는 엄마도 글빨로 꼬셨다고 들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 마음을 글로 훔칠 수가 있는 건지. 가끔 아빠가 말하는 걸 들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송이는 생각했다. 엄마는 그랬다. 어느 바다에 던져놔도 입만큼은 둥둥 떠 있을 사람이 아빠라고.
“송이야. 나는 그렇다.”
“뭐가.”
“사람이 살다 보면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아주 많아요. 나이를 먹을수록 인연이라는 게 더 귀해지기도 하고. 헤어짐은 아프겠지만 어쩔 수 없지. 헤어지고 만나는 게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니. 이런 걸로 위축되지 말고. 그냥 즐겨. 많이 만나 보고, 헤어져도 보고. 그러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도 만나게 되고. ”
철민은 남은 컵라면을 젓가락으로 싹싹 휘저으면서 면발을 모두 흡입하였다.
“그런 게 사람 사는 거지, 뭐.”
송이는 그 말을 듣다가 철민의 앞에 있는 소주잔을 가져와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쓴맛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철민의 말은 별거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지금 송이에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몇 번의 연애와 몇 번의 이별로 위축되고 움츠러든 마음이 조금은 말랑말랑해진 기분이었다.
“아빠, 여자 많이 만나 봤지?”
“아니. 엄마밖에 없는데.”
“나한테는 많이 만나 보라며.”
“내가 가장 진심을 다한 사람은 너희 엄마뿐이야.”
“그러면 진심을 다하지 않고 만났던 사람은 있고?”
“객관적으로 봐서 이 비주얼에 여자들이 나를 가만히 뒀겠어? 그러다 보면 잠깐 스치듯이 만날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내가 먼저 따라다닌 사람은 너희 엄마밖에 없어. 진짜로.”
어떤 상황에서도 입은 살아 있는 철민이었다. 지금은 저 수북한 털이 가리고 있어서 그렇지 면도만 말끔하게 하면 꽃중년이라는 말도 들을 만큼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거 있으면 정보 업데이트 좀 해라. 동기화 좀 하라고.”
“뭔 소리야.”
“너희 둘이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까 내가 경수 전화에 대처를 적절하게 할 수가 없잖아. 아까 울 때는 뭔 일 있나 해서 식겁했네.”
컴퓨터하고는 담을 쌓은 사람이 저런 단어는 어디에서 주워들어서 요긴하게 써먹고 있었다.
“새로 남자 생기면 재깍재깍 아빠한테 말하고.”
“생기면 어쩔 건데.”
“아빠가 진단을 내려줘야지. 이놈이 만나도 되는 놈인가, 하고. 5분만 봐도 딱 사이즈가 나와.”
“아빠가 무슨 점쟁이야?”
“신들렸다는 소리도 좀 듣기는 했어.”
철민은 핸드폰의 시계를 확인하더니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가 오늘 원래 친구들하고 오랜만에 약속 잡았는데 딸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아빠가 여기까지 발걸음했는데 이거 정도는 좀 치워줄 수 있지? 나중에 남자 생기면 가게로 데리고 와.”
송이만 남겨두고 철민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면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송이는 자신의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컵라면과 소주병을 보면서 허탈하게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