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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44)

26화

남의 집에서 제대로 진상짓을 했다. 밑바닥을 어디까지 내보여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회사에서 옆자리에 앉는 부사수인 신입의 집에 떡하니 들어가 대자로 뻗었다니.

하필 왜 그 전날에 비번을 바꿨을까. 바뀐 비번은 왜 생각이 안 났을까. 박경수 그 새끼는 왜 스토커처럼 문자를 보내서 비번을 바꾸게 만들었을까.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김지훈의 집까지 들어갈 일은 없었을 텐데.

거기에 더하여 어디에서나 잘 적응을 하는 이 몸뚱어리도 원망스러웠다. 송이는 베개에 머리만 대면 바로 잠드는 타입이었다. 엠티를 가든, 친구 집을 가든 오랫동안 잠을 자왔던 곳처럼 딥슬립을 하였다. 차에서도 10시간을 넘게 잤던 기록도 갖고 있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내력이었다. 얼마나 푹 잤으면 입까지 벌리고 잤을까. 그걸 보고 있던 저 인간은 얼마나 내가 한심스러웠을까.

이건 쪽팔림을 넘어서 수치스러움에 가까웠다.

“그건 미안해요. 너무 민폐를 끼쳤네요.”

김지훈이 가택 침입죄로 신고를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뉴스에 나올 만한 일이기도 했다. ‘술에 취한 채 신입 직원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숙면을 취한 어느 직장인’ 이런 타이틀을 달고 인터넷에 기사가 떴으면 ‘어떤 미친 또라이가 이딴 짓을 해’ 이러면서 바로 클릭해 봤을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별 또라이가 다 많다며 혀를 끌끌 찼겠지.

김지훈이 신고를 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다. 만약 조 부장 같은 상사가 취해서 진상을 부린다면 송이는 그냥 버리고 갔을 텐데. 맨바닥에서 자다가 입이 돌아가든 말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괜찮은데. 상사하고 같이 잔 게 어때서요. 이웃끼리 그럴 수도 있지. 아는 사이에 술 취한 사람을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이건 좋게 봐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꼭 말을 저렇게 거지같이 한다. 상사하고 같이 자다니.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게 있었다.

“왜 위층에 산다고 말 안 했어요?”

이것도 일부러 숨겼다가 나중에 터뜨려서 놀리려고 그랬나.

“말하려고 했죠. 그런데 선배가 그 전에 우리 집에 온 거예요. 여기 이사 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아, 맞다. 말할 시간이 없기는 했다. 입사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고 친하지도 않은데 굳이 상사한테 자신이 위층에 산다고 말을 할 필요는 없으니. 괜히 물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그런데 내가 아래층에 사는 건 알고 있었어요?”

“네.”

“언제요?”

“그냥 오다가다 봤어요.”

“그러니까 오다가다 언제?”

“선배도 저를 봤을 거예요. 유심히 안 봐서 그렇겠지.”

그럴 리가 없는데. 못 알아볼 비주얼이 아닌데. 회사에서 처음 마주하기 전에 봤더라도 기억을 했을 텐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날 어디까지 기억나는데요. 다 기억 안 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계속 보고 있으니까 귀여운 거.’

이 말만큼은 왜 이리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지.

술자리에서 나눴던 말들은 중간중간 기억이 났다. 그중에서도 지훈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면서 했던 그 말.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얘도 그때 취한 건가. 그 타이밍에 왜 그딴 소리를 내뱉은 건지. 정말 뜬금없는 소리였다. 귀엽다고 하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 또라이가 그런 소리를 하니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부터 들었다.

사람 놀리는 데는 도가 튼 인간이니 당황시키고 싶었겠지.

취한 상태로 헤벌레 하면서 술만 마시는데 얼마나 놀리기 쉬웠을까.

‘사귀어 본 적 없다고.’

‘사장 아들이니까 대충 살고 싶다고요.’

그딴 소리도 했던 것 같다. 저 얼굴에 여자를 안 만나 봤다는 게 말이나 되나.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꼬일 상인데.

그리고 사장 아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기업 회장의 자제가 그딴 허름한 오피스텔에 살 이유가 없다. 하는 행동은 회장 아들이라고 해도 믿겠지만 그저 희망 사항이겠지.

그저 술자리에서 술에 취한 상사를 놀리고 싶은 마음에서 기인한 장난 같은 거였다. 놀리기는 하고 싶은데 자극적인 게 필요하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뱉어 봤겠지. 그딴 거에 넘어갈 것 같냐. 술자리에서도 정신은 차리고 있었는지 이런 지훈의 장난에 넘어가지 않고 잘 방어를 했다.

“그날 선배가 했던 얘기 다 진심이에요?”

송이도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도 뱉어냈다.

사귀어 본 적이 없다는 지훈을 향해 도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그럴 리 없다며 그의 볼을 잡고 이런 귀염둥이를 여자들이 가만히 놔뒀겠냐고 뻘소리를 해댔다.

텍사스에 다녀온 얘기도 꺼낸 것 같고, 사장이 될 거라고 지훈에게 뒤를 봐주겠다고 개소리도 한 것 같고, 김지훈한테 이름을 부르면서 말도 깐 것 같고, 그러면서 김지훈한테는 반말을 하지 말라면서 생일도 물어봤던 것 같고. 그런데 왜 하필 생일도 같은 달이야.

하… 진짜 별짓을 다 했네. 정말 이놈의 술을 끊든가 해야지. 술을 마시다가 알딸딸해지면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게 해주는 기계라도 누가 발명해줬으면 싶었다.

“술 취한 사람이 뭔 말을 못 하겠어요. 반 정도는 맞고 반은 쓸데없는 소리였겠지.”

텍사스를 다녀온 건 사실이었고, 사장이 되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뭐, 회사 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 꿈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 명문대를 갈 거라고 다짐을 했던 아이가 고3이 되면 현실을 직시하는 그런 기분이랄까. 신입 시절에는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기업의 임원이라도 될 수 있다면 기적일 정도로 사장이라는 건 정말 머나먼 환상 같았다.

지훈이 귀엽다는 건 당연히 취소다. 술에 취하면 사람이 관대해지니 저 얼굴이 귀여울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저 싸가지가 귀여워 보일 리 없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 사장이 된다면 김지훈의 뒤를 봐줄 리도 없고. 그러니 반 정도는 맞았다.

“그러는 김지훈 씨는? 그때 한 말이 다 진심은 아닐 거 아니야.”

형국이 아주 불리했지만 송이는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미약하게나마 반격을 해보았다. 지훈 또한 쓸데없이 지껄인 소리들이 많았으니.

“저도 반 정도만 맞는 걸로 할게요.”

맞는 걸로 할게요, 는 뭐야. 참, 말도 희한하게 한다. 누가 반만 맞게 해달라고 애원이라도 했나.

“반은 맞다는 거예요? 말을 애매하게 하네.”

“대충 그렇다는 거죠. 그날 했던 말 하나하나 체크해서 말씀드려요? 어떤 건 맞고, 어떤 건 틀리다. 이렇게?”

“누가 그렇게까지 하래요.”

“그래서 말했잖아요. 반 정도만 맞는 걸로 한다고.”

반 정도라면 맞는 것도 있다는 얘긴데. 모쏠은 절대 아니고, 사장 아들일 리도 없고. 귀엽다는 것도 취기에 나온 말일 텐데. 자기가 태어난 달을 속이지는 않을 테고. 대체 뭐야. 지금도 장난치는 건가. 저 인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애매하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뭐라도 밝혀지면 조금이라도 피해 나갈 구멍을 만들려고.

“알았어요. 믿어줄게요.”

“전혀 믿음을 보이지 않는 얼굴인데.”

“술 취해서 한 얘기가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믿든 안 믿든 내가 알아서 할게요.”

쓸데없는 거에 집착을 하는 성격인가. 술에 취해서 하는 얘기에 얼마나 의미를 부여하려고.

어쩌다가 이 인간하고 이렇게 엮이게 되었는지. 하늘의 장난 같았다. 누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면 이런 악연에, 같은 동네에 사는 것까지. 이게 말이 되는가. 살면서 착하게 살았다고 자부했다. 무단횡단도 양심에 찔려 하지 않는 사람인데. 누구에게 죄 하나 짓지 않고 살았는데. 스물아홉에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 건지.

“우리 종종 마셔요.”

종종 같은 소리하네. 너하고 둘이 마실 일은 없어.

“동네 친구 있으니까 좋네. 집 근처에서 술도 마시고.”

“동네 친구?”

“왜요. 그날 말도 잘 까시고 아주 친근하게 제 볼도 잡아주시던데.”

지금 비꼬는 거 맞지? 그날 아주 송이의 진상짓에 제대로 뎄다고 생각이라도 하는지 지훈의 비꼼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취해서 그랬던 거 같은데.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그만 좀 놀려먹죠?”

“놀리는 거 아닌데. 저는 친근하고 좋던데요. 서로 말도 까고.”

지훈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에 있는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깨끗하게도 드셨네.”

지훈의 그릇에 남아 있는 짜장면과 달리 송이의 그릇은 아주 깨끗했다. 설거지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지훈이 잽싸게 그릇들을 치우고 사무실 밖에 가져다 두었다. 송이는 무언가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쟤랑 얘기만 하면 왜 말리는 것 같은지. 충분히 반격도 한 것 같은데 대화를 끝내면 꼭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선배, 빨리 끝내고 퇴근하세요.”

지훈은 짜장면을 먹자마자 퇴근 준비를 하고 사무실을 나서려고 했다. 저녁을 먹었다는 건 더 일을 하겠다는 거 아니었나?

“아, 선배가 혼자 먹으면 심심할까 봐.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지훈은 손을 들더니 씩 웃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그의 번쩍이는 구두가 바닥을 내딛는 소리가 사무실을 울리다가 곧 사라졌다.

송이는 멍하니 지훈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저 새끼가….”

분명 그냥 퇴근해도 되는데 일부러 남은 거였다. 남아서 그날 이야기를 어떻게든 꺼내어 쪽을 주려고 한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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