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그릇을 치우던 송이의 손이 멈칫했다. 지훈이 말하는 그날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날? 언제?”
송이는 고개도 들지 않고 그릇을 치우는 것에 집중하며 대수롭지 않은 척을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목구멍을 통해 절로 침이 넘어갔다.
“일요일이요.”
“…….”
“아, 12시가 지났으니까 월요일인가. 우리 집에서 같이 잤잖아요.”
송이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누가 들으면 기함할 소리를 참 차분하게도 내뱉고 있었다. 이게 누구 회사 생활 종치게 할 일 있나.
그래, 잤다는 건 인정한다. 자기는 잤는데. 그날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송이의 옷도 그대로였고, 몸에서 느껴지는 특별한 느낌(?)도 없었다.
송이는 월요일 아침, 지훈의 집에서 나온 이후로 알코올로 인하여 단기적으로 상실한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애를 썼다. 간간이 기억이 나는 장면들이 있었지만 지훈의 집까지 간 과정은 뭔 짓을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당연히 알 수 없었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은 역시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괜히 물어봤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 바에야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것도 좋은 선택지였다. 게다가 그날 술자리에서 주고받았던 말들은 기억에 있는 것들도 있었다. 꺼내기 민망한 대화들이었다.
월요일은 일부러 빠르게 외근을 나갔다가 느지막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미 지훈은 퇴근한 후였다. 안도의 숨을 쉬고 야근을 빡세게 달렸다. 고된 몸을 끌고 늦게 퇴근을 하여 바로 뻗어 버렸다. 화요일 아침이 밝아 출근을 하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김지훈의 집에서 잤다는 사실을.
“아… 그날….”
“별로 안 궁금해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훈이 팔짱을 끼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서 실토를 하라는 듯이.
당연히 궁금했다. 궁금했는데… 궁금한 마음과 쪽팔림이 절반씩 작용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나도 안 궁금한데요.”
“궁금한 표정이던데.”
“내가 언제?”
“자다가 일어나서 나하고 마주쳤을 때.”
그때라면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지훈이 웃통을 깐 채로 욕실에서 나와 머리를 털고 있던 그때. 은근히 근육이 있는 몸을 마주하며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머릿속이 혼돈의 카오스가 되었던 그때.
“그날 일이 있기는 했죠. 남사스러워서 말할 수도 없고.”
이건 전적으로 송이가 불리한 게임이었다. 저 자식은 패를 잔뜩 쥐고 있으면서 하나씩 풀어놓으며 송이의 목을 조여올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끌려가다가는 말라죽을지도 몰랐다.
“일이 있긴 뭐가 있어요? 우리가 뭐 자기라도 했어요? 아닌 거 뻔히 아는데.”
송이는 적반하장 격으로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여기서 꼬리를 내렸다가는 김지훈에게 더 말려들지도 몰랐다.
“남녀가 자야지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머릿속에 음란마귀만 있나.”
“음란마귀라니?”
“큰 남자를 좋아하시니 생각이 그런 쪽으로만 가시는 건가.”
지훈이 저렇게 나오니 애가 타는 건 송이 쪽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래. 잠은 왜 그 집에서 잔 거고. 이대로 그냥 넘어가기에는 찝찝하기도 했고,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그냥 넘어가고 싶었는데 송이는 자신도 모르게 지훈의 도발에 점점 말려들어가고 있었다.
“나도 바쁜 사람이에요. 듣고 싶지 않다는 사람한테 말하고 싶지도 않고.”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짜장면 그릇을 치우려고 손을 바삐 움직였다. 송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래요. 말이라도 해보든가.”
‘이거 왜 안 열리냐. 미치겠네.’
송이는 몇 번이고 눌러보았지만 도어락은 정신을 차리고 누르라는 듯이 ‘삐삐삐’ 하고 경고음을 울렸다.
‘이게, 어디서 주인한테. 미쳤나.’
송이는 도어락과 싸울 듯이 툭툭 치면서 노려보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지훈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송이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어락을 눌러댔다. 하지만 도어락은 순순히 송이의 집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상해. 얘가 문을 안 열어줘.’
송이는 머리를 문에 갖다 대고 몸을 지탱하다가 힘든지 풀썩 주저앉았다. 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쪼그려 앉아 송이에게 물었다.
‘비밀번호가 뭔데요.’
제정신이 아니어서 번호를 제대로 누르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송이는 비밀번호를 묻는 지훈에게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지훈이 다가가자 귓가에 대고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180603’
지훈이 얼굴을 떼자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쉿’
어디 가서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여기 누가 듣는 사람이 있다고. 그러면서도 지훈에게는 순순히 알려주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지훈은 그 번호를 눌러보았다. 그러나 아까와 똑같은 경고음이 울릴 뿐이었다. 세 번을 더 눌러봐도 마찬가지였다.
‘비번 이거 아닌데.’
‘맞아.’
‘아니라고.’
‘맞으면 어떻게 할래?’
평소에 술에 취했을 때는 대체 집에 어떻게 들어간 것인지 의문이었다. 설마 이 복도에서 잤을 리는 없고.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위층에 있는 지훈의 집으로 올라가는 것. 문제는 송이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왜 안 열리지. 그럴 리가 없어 지훈아. 다시 눌러봐. 어서.’
지훈이 팔을 잡고 일으키려고 해봤지만 어찌나 고집이 센지 송이는 자신의 집 앞에서 조금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용접이라도 해둔 것처럼 바닥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서는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아, 여기 13층인데.’
‘응?’
‘14층이 아니고 13층이에요. 여기.’
‘아.’
송이는 그럼 그렇지, 하면서 박수를 치더니 뭐가 좋은지 큭큭거리며 웃었다.
‘이 바보. 바보.’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치더니 그제야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우리 집은 위층이야. 지훈아.’
힘으로 일으키려 할 때는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던 사람이 13층이라는 한마디에 일어났다. 그러더니 계단의 난간을 붙잡고 한 발자국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르고, 크게 한숨을 내쉬고, 또 하나를 오르고 내쉬고. 그렇게 해서 겨우 위층에 당도했다. 송이는 14층으로 알고 있겠지만 실제로는 15층인 지훈의 집 앞에.
‘아까 말해준 거 눌러봐.’
송이는 숨이 차는지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지훈은 아까 송이가 알려준 비밀번호가 아닌 자신의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은 ‘삐리릭’ 소리와 함께 열렸다. 지훈이 문을 열고 안으로 손짓을 했다.
똘마니라도 되는 것처럼 수고했다는 듯이 지훈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집으로 들어섰다.
‘수고했어. 잘 가.’
그녀는 지훈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더니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에 어이가 없는 웃음을 짓던 지훈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문을 열어보았다. 그 앞에는 슬리퍼도 채 벗지 못한 송이가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다.
지훈은 그녀를 바로 안아 들었다. 일단 침대로 옮겨야 했다.
‘누구야, 너.’
‘지훈이. 김지훈.’
‘김지훈? 너 왜 우리 집에 들어와. 나가.’
그 와중에도 정신은 드는지 지훈을 보며 나가라고 했다. 지훈은 잠시 자신의 집에서 왜 이 쇼를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선은 눕히고 봐야 했다.
‘목말라. 물 좀….’
남의 집 침대에 누운 것도 모자라 물까지 찾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어 바로 대령했다. 물을 마신 그녀는 바로 베개에 얼굴을 묻더니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남의 집에서 이렇게 바로 잠이 들 수 있는 건가. 참 대단한 적응력이었다. 어디 산속에 던져두어도 딥슬립을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야기를 듣던 송이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행동들이었다. 언젠가 지나의 동네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완전히 취했을 때 지나의 집에서 했던 행동과 거의 흡사했다.
송이는 아무리 술에 취해도 도어락 비밀번호만큼은 정확하게 누르고 집에 들어갔다. 귀소본능만큼은 절대 잃지 않는 송이였다. 그런데 그날 비밀번호를 잘못 누른 건 바로 하필 토요일에 비번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스토커처럼 메시지를 수십 통이나 보내는 박경수의 행태를 보면서 혹시라도 집에 급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번을 바꿔버렸다. 이 세상에서 그녀의 집 비번을 유일하게 공유하고 있는 인간이기도 했다.
그걸 아예 새카맣게 잊고 그 전에 사용하던 비번만 눌러댔던 것이다. 그 번호는 박경수와 처음으로 사귄 날이었다.
“어떻게 하면 남의 집에서 그렇게 편하게 잘 수가 있어요? 입도 벌리고 자던데.”
송이는 사회생활을 하고 나서부터는 술에 취하더라도 끝까지 마시는 일은 자제하려고 했다. 90% 정도까지만 취하고 나머지 10% 정도는 남겨두고자 했다. 그런데 그날은 집 근처라는 심리적인 안정감 때문인지, 취해 봤자 코앞이 집이라는 안도감 때문인지, 더 마음을 놓고 술을 마시다가 이 사달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