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후루룩. 후루룩.
고요한 사무실에는 입으로 면을 치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고 있었다.
“그그 두그 먹즈 말라그!”
입에는 잔뜩 짜장면을 넣은 채 손가락 대신 젓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면서 송이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는 입에 가득한 짜장면으로 인하여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뭐라는 거야.”
송이의 앞에서 역시 짜장면을 두고 먹던 지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해석할 수가 없었다.
송이는 빠르게 입을 오물거리며 면을 삼키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씩 먹으라고요. 단무지가 남아 도나.”
지훈이 조금 전에 가져간 단무지가 면 위에 놓여 있었다. 그 단무지를 자세히 보니 두 개가 붙어서 겹쳐져 있었다. 지훈은 젓가락을 들고 한 쌍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단무지를 살짝 떼어내었다. 그러고는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나씩 먹을게요. 됐어요?”
“가능하면 반씩 쪼개서 먹고. 단무지가 별로 없잖아.”
“오늘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송이가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건 단골 중국집에서 평소보다 단무지를 훨씬 적게 주어서 그런 것도 있고, 남은 짜장면의 딸랑 세 개 남아 있는 단무지가 턱없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녀를 건드린 것은 오늘도 역시 조 부장이었다.
‘이거 내일 오전까지 정리해서 가져와.’
오후 다섯 시에 이딴 말을 지껄인다는 건 집에 갈 생각은 하지 말고 야근이나 하라는 뜻이었다.
‘내일 오전이요?’
송이는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명백하게 항의의 표시를 담았다. 그게 먹혔는지 조 부장의 미간에 금이 갔다.
‘내일 오후 회의 때 보고해야 되는데 언제까지 하게? 급하니까 내일 오전까지 하라는 거 아니야.’
그렇게 급하면 니가 지금 하면 되잖아. 오늘도 어디서 외근이랍시고 처놀다가 오후에야 느그적거리며 들어와서는 송이를 불러서 대뜸 하는 말이 이거였다.
‘미리 말씀해주시지. 이제 말씀해주시면….’
‘갑자기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지. 회사가 니 스케줄에 맞춰?’
자기 일이면서 회사를 운운하는 저 작태가 어이없었다. 언제부턴가 조 부장의 회의 자료는 아랫사람들이 정리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송이가 당첨될 때가 많았다.
오늘도 누구를 타깃으로 할까 고민을 하다가 최근에 조 부장의 가발 사건도 있었고, 오늘 아침에 말대답을 좀 한 것도 작용을 하여 송이가 당첨이 되었을 것이다. 엄연한 보복이었다.
퇴근 한 시간 전에 일을 준 조 부장은 6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손짓을 했다. 그의 심복인 진태호는 언제 퇴근 준비를 했는지 칼같이 일어나 조 부장의 뒤를 졸졸 쫓아 따라나섰다.
누구는 갑자기 야근을 하게 생겼는데, 저것들은 사이좋게 칼퇴를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하나둘 퇴근을 하였고, 사무실에 남은 건 송이와 지훈뿐이었다.
“이거 진짜 주는 거예요?”
젓가락을 내려둔 지훈이 테이블 위에 있는 네모난 종이쪼가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35개 모으면 탕수육이 하나 더!’
중국집에서 주는 쿠폰이었다. 단골인 이 집에서 받은 쿠폰만 몇 장이더라… 쿠폰을 받을 때마다 서랍에 넣어두었으니 수십 개는 모았을 것이다. 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부터 시켜먹었던 중국집이었다.
처음 진수 식품에 입사했을 때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 젊음의 패기로 모든 난관을 극복해 나갈 거라 자신했다. 이 쿠폰을 처음 마주했던 날에는 이걸 모아서 탕수육을 먹는 날이 될 때쯤에는 이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설레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진 게 없었다. 꼰대들은 여전히 꼰대였고, 하는 일은 별반 달라지지도 않고, 하는 건 많은데 공은 다른 사람이 다 가져가는 것 같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좋다고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딱히 뭘 했다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 집이 망하지만 않으면 주겠죠.”
“이런 걸 진짜 다 모아서 먹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 여기 있다. 이 자식아. 이딴 쿠폰을 정말 모으는 사람이 있냐는 듯한 물음에 송이는 욱했다. 지금까지 쿠폰을 모아서 공짜로 먹은 것만 해도 꽤 되었다. 처음에는 꼭 쿠폰으로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는데 받은 쿠폰을 계속 모아보니 양이 꽤 쌓였다. 대청소를 하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쿠폰이 많아서 공짜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꽁돈이라도 주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있지, 없어요?”
“정말 있기는 있구나.”
지훈은 마치 쿠폰을 모아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저 세상 멀리 사는 외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종이쪼가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저거는 왜 오늘따라 퇴근을 안 하고 사람 속이나 긁고 있어.
지훈은 젓가락을 툭, 내려두더니 휴지로 입가를 닦았다. 그의 앞에 놓인 그릇에는 짜장면이 반 정도는 남아 있었다.
“다 먹은 거예요?”
“맛이 그냥 그렇네요. 이것도 많이 먹은 거예요.”
까탈스러운 성격답게 입도 더럽게 짧았다. 이 인간하고 같이 살 사람은 고생깨나 하겠다. 어렸을 때 먹는 걸로 부모님 속을 꽤나 썩였을 게 분명했다. 송이도 먹는 걸로 부모님 속을 썩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송이는 너무 먹어 대서 그랬던 거고.
그릇에 남아 있는 절반으로 잘린 단무지를 보니 괜히 화가 났다. 그냥 눈에 안 보이게 더 먹어버리든가. 송이는 이제 고작 하나 남은 단무지를 앞니로 씹어 절반으로 잘라 먹었다.
“김지훈 씨는 맛있는 게 있기는 해요?”
정말 궁금했다. 지금까지 이 사람을 봐온 건 며칠뿐이지만 음식을 두고 맛있게 먹는 꼴을 못 봤다.
“있어요. 맛있게 먹은 거. 별로 없어서 그렇지.”
저 인간은 대체 뭐가 맛있을까. 저 까탈스러운 인간의 입에 맞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맛있다고 하지 않을까.
“선배는 맛없는 게 있기는 해요?”
송이는 면발을 입에 후루룩 넣다가 잠시 멈췄다. 돌발적인 질문에 잠시 얼음이 되었다가 면발을 마저 입에 넣었다.
“나도 사람인데 맛없는 게 있지, 그럼 없겠어요?”
그런데 가리는 게 있었나. 생각해 보니 웬만한 사람들이 입에 넣는 거라면 송이는 대부분 잘 먹었다. 진짜 음식을 거지같이 만들지 않은 이상 송이의 혀는 맛의 허용범위가 남달리 넓었다.
“아, 있구나. 선배는 없을 줄 알았어요.”
사람을 앞에 두고 대놓고 비꼬는 저 어투. 어느새 저 말투가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조 부장은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예요? 사무실에 붙어 있는 꼴을 못 봐서.”
지훈은 이제 조 부장을 부를 때는 아예 ‘님’자는 붙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참 대단한 신입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상사 앞에서 팀장을 저렇게 멋대로 부르는 인간이 있을까.
“외근 나가는 거죠. 그게 진짜 외근인지, 노가리나 까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우나도 간다고 그랬던 것 같고.”
마케팅 팀은 다른 직무에 비해서 외근이 많기는 하지만 조 부장은 너무 심할 정도였다. 입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진만에게 조 부장은 어디를 다녀오는 거냐고 물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담배 한 대 피우다가 외근 나가서 노가리 좀 까고, 사우나도 다녀오고, 한숨 잠도 자고. 그러면 하루 훅 가는 거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그때는 의문이었다. 조 부장은 실제로 일을 하는 시간은 아주 적으면서도 성과는 어느 정도 내는 극강의 효율을 자랑했다. 물론 거기에는 뒤에서 발표 자료를 정리하고 공을 빼앗긴 송이 같은 이들의 개고생이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었다.
“간땡이나 아주 크네. 업무 시간에 사우나도 가고.”
얘는 지가 무슨 조 부장 상사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를 하고 있네. 말투가 보면 볼수록 희한했다. 어떨 때는 이 인간이 신입이라는 걸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저딴 인간을 걸러내지 못하는 회사가 문제 아니에요? 아무도 말을 안 해요?”
“얘기해 봤자 뭐해요. 바뀔 것도 아니고.”
송이가 예전에 한번 진만에게 조 부장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가 나서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 나서 봤자 조 부장이 사내에 연줄이 있어서 중간에 커트를 당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잘못해서 그게 조 부장 귀에 들어가면 앞으로 회사 생활만 힘들어진다고 충고 아닌 충고를 들었다.
“바꿀 수도 있죠. 마음만 먹으면.”
마음을 먹어서 바꿀 수 있는 거였으면 진작 바꿨겠지. 현실에 순응하는 자신이 비겁한 건지, 아니면 저렇게 말을 하는 지훈이 철이 없는 건지. 어느 쪽이 맞는 건지는 몰랐다.
송이는 마지막 남은 면까지 입에 다 넣고 젓가락을 내려두었다. 오늘도 야근을 위한 연료는 보충을 해두었으니 이제 달리는 일만 남았다.
“치우죠. 다 먹었으면.”
송이가 그릇과 젓가락을 들고 치우려고 하는데 앞에 앉은 지훈은 빤히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뭐해요, 안 치우고?”
이 싸가지가 손 하나 까닥하지 않으려고 하네. 송이가 한 소리를 하려고 하던 그때, 지훈의 입이 열렸다.
“왜 그날 얘기 안 물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