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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23/44)

23화

“한잔 받으시죠. 상무님.”

붉은빛을 머금고 있는 양주가 잔을 채워나갔다. 상석에 앉은 명준은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우며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영철을 바라보았다. 어설퍼 보이는 저 가발은 차라리 쓰지 않느니만 못했다. 과도하게 굽힌 허리도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적당히 굽혀야 보기에도 좋지 너무 과하면 그냥 꼴 보기가 싫어졌다.

“조 부장도 한잔해.”

명준은 담배를 지져 끄고 명철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조 부장은 허리를 굽히는 것도 모자라 고개까지 숙이고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지금까지 저런 인간들을 숱하게 봐왔다. 명준의 눈에 한 번이라도 들려고, 연줄이라도 잡아서 콩고물을 얻어 먹으려고, 그것도 아니면 명준에게 잘 보여 돈이라도 뜯어 보려고 덤벼드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똥파리처럼 꼬이는 인간들 때문에 사기도 많이 당하고, 주변에 두었다가 말아먹은 계획들도 많았고, 당할 대로 당해온 인생이었다.

사람 보는 눈이 쥐똥만큼도 없던 명준이 조금이나마 사람을 볼 줄 알게 된 건 그 덕분이었다. 조 부장이라는 인간은 딱 봐도 하자가 많아 보였다.

“당신도 한잔하고.”

“네. 진태호 대리입니다.”

태호 역시 아주 깍듯하게 명준의 잔을 받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선을 지키며 조 부장처럼 과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그 모습이 명준의 눈에 들어왔다.

“제 밑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빠릿빠릿하게 일도 잘합니다.”

처음에 조 부장이 같은 팀에서 일을 하는 싹싹한 친구가 하나 있다고 했을 때는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하고 데려와 보라고 했는데 첫인상은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스마트해 보이면서도 선은 지킬 줄 아는 것 같은.

“제가 한잔 따라드려도 되겠습니까.”

명준이 고개를 끄덕이니 태호는 빠르게 일어나 비어 있는 명준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제가 보기에는 아직 상무님의 진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무슨 일이든 상무님을 도와서 대박 하나 터뜨려 보겠습니다. 이번에 제가 구상한 제품이 있는데….”

명준이 직접 불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지 조 부장은 쓸데없이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게 절실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충성을 하며 줄을 댔던 민 상무가 사내 정치 싸움에 밀려 퇴직을 당하고 나니 끌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연줄로 여기까지 올라온 조 부장은 자신의 목숨줄이 달린 문제이니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를 관두고 겁 없이 장사에 뛰어든 친구들은 대부분 퇴직금을 날리고 망했고, 일용직을 전전하는 이도 있었다.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다.

“이것만 잘 되면 상무님께서도 더 입지를….”

“취한 것 같은데.”

“예?”

“나가서 술이나 깨고 와.”

조 부장은 붉어진 얼굴을 감싸며 영문을 모를 표정을 지었다. 술기운이 올라와 얼굴이 빨개지기는 했지만 취할 정도는 당연히 아니었다.

신나서 떠들다가 명준의 정색하는 표정에 당황하여 목구멍이 턱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말 못 들었어? 술 깨고 오라고.”

“저는 괜찮은데….”

명준은 테이블 위에 있는 담뱃갑을 하나 쥐어 담배를 한 개비 꺼내어 입에 물었다. 잠시 후 불을 붙이고 신경질적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나가라고.”

“어디를….”

“좀 닥치고 나갔다 오라고.”

“…….”

“꼭 욕을 해야 말을 처알아들어.”

조 부장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명준의 눈치를 보다가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보는 명준은 짜증을 잔뜩 머금은 얼굴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눈치 하나는 정말 더럽게 없는 인간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마케팅 3팀은 어떤가? 요즘 괜찮아?’

명준의 물음에 조 부장은 요즘 아주 분위기가 좋다며 자신의 팀을 치켜세웠다. 연이 없던 사람이 불렀다면 무언가 용무가 있다는 건데 그걸 파악할 생각은 없이 어떻게 하면 빌붙을 수 있을지 고민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누가 그깟 마케팅 3팀 따위가 궁금해서 물어봤을까.

눈치 없이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지껄이는 게 딱 보니 답이 안 나왔다. 지훈에 관한 얘기를 조금이라도 꺼내면 입단속 못하고 나불거릴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까려다가 괜찮은 놈 하나 있으면 데려와 보라고 말을 던져봤더니 이렇게 밑에 있는 사람을 하나 데리고 왔다.

“마케팅 3팀은 어때? 괜찮아?”

“네,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저 나름대로 열심히는 해보고 있습니다.”

최대한 튀지 않으려는 말투. 그냥 바닥을 보면서 기는 게 아니라 자신을 적당하게 낮출 줄도 알았다.

“팀원들끼리 단합은 잘 되나?”

“서로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참 판에 박힌 답이기는 한데 누구에게 흠이 잡힐 말도 아니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눈치 없다 소리는 안 들을 것 같은데.

“그 누구더라… 거기 여자 한 명 있지 않나?”

“네, 한송이 말씀이십니까.”

“한송이인지 두송이인지는 모르겠는데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한송이에 대해서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태호가 훅 치고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심스럽게 말을 하더니 명준이 의중을 약간 드러내자마자 공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이놈 봐라.

“필요하다기보다는 그냥 궁금한 것도 있고.”

“말씀만 해주십시오. 필요한 자료가 있으시면 조용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조용히?”

“네, 조 부장도 모르게. 비밀리에.”

명준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만 해도 이 방에 조 부장 뒤에서 딸려 들어왔던 주제에 바로 조 부장의 뒤통수라도 칠 것처럼 말을 했다. 눈치가 아예 없지 않으면서도 과감할 때는 과감했다.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한송이라는 직원은 어떤데?”

“저하고 입사 동기여서 제가 잘 알고 있는데….”

이 정도 물어봤다면 왜 이 사람이 뜬금없이 한송이에 대해서 묻는 건지 의문을 품거나, 잠깐 머뭇거리기라도 할 텐데 그런 것도 없이 바로 답이 나왔다. 준비라도 한 것처럼.

“고지식할 때도 있고, 미련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말이 안 통해서 벽창호 같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

“꼴통입니다.”

명준은 생각지 못한 답에 집중해서 듣다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한송이라면 그도 말을 섞어본 적이 있었다. 상무가 직접 자료를 달라고 하는데도 그렇게 뻗대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말단 직원 따위가.

눈까지 부릅뜨면서 달려들 기세인데 잘못하다가는 물기라도 할 것 같았다. 당장 자르라고 인사과장에게 말을 하려다가 사고 친 게 있어 분위기가 좋지 못한 상황인지라 그 정도 선에서 끝내고 말았다.

꼴통이라는 두 글자는 그 여자를 설명하기 딱 좋은 단어였다.

“그런 꼴통이 한 명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고생인데.”

“네,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가까이하지는 않습니다.”

명준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진호가 알아온 정보에 의하면 한송이라는 여자가 지훈의 사수라고 했다. 그런데 그 여자가 꼴통이라면 지훈의 직장생활이 꽤나 힘들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다면 지훈이 회사를 알아서 뛰쳐나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꼴통과 꼴통이라….”

지훈도 알아주는 꼴통이었다. 결이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두 꼴통이 만났으니 그 결과는 파국일 것이다.

“네? 방금 전에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좋은 정보 고마워.”

“필요할 때는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진태호라고 했나?”

“네.”

“한잔 받아.”

태호는 명준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 고개를 돌리고는 쭉 들이켰다. 독한 양주를 목구멍으로 넘기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게 명준은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도움이 될 만한 놈이었다.

“진 대리.”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그래, 태호야.”

“네, 상무님.”

“회사 생활 어려운 거 없어. 줄만 잘 잡으면 바로 실크로드 타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너, 나랑 한번 가볼래?”

“기회 주신다면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쭉 마셔.”

명준은 잔이 가득 차도록 콸콸 술을 따라주었다. 거의 넘칠락 말락 하는 잔이 찰랑거렸다. 태호는 지체 없이 잔을 들고 쭉 들이켰다.

그의 목을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을 만큼 바닥을 보인 잔을 내려두었다. 살짝 눈가를 찡그리기는 했지만 별다른 표정 변화는 없었다. 명준은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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