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한국 들어온 지가 언젠데 이제 얼굴을 비쳐?”
김 회장은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고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두었다. 앞에 있는 아들을 보는 시선이 아주 예리하게 빛났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정평이 난 김 회장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이놈은 속을 모르겠어.
볼 때마다 저 불만에 가득 찬 눈빛은 여전했다.
“그렇게 보고 싶으셨으면 먼저 찾아오지 그러셨어요. 저 어디 사는지 뻔히 아시잖아요.”
“뭐야?”
“보기 싫은 사람 보러오는 게 얼마나 귀찮은지 아세요?”
지훈은 소파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 누구도 이곳에 와서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식품업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진수 식품의 창업자 김진수 회장 앞에서는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앞에 있는 아들놈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보란 듯이 따분한 표정을 지으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넌 그게 아비한테 할 소리야?”
“저도 호로자식 되는 거 싫어요. 서로 얼굴 안 보는 게 피차 좋잖아요. 언제부터 그렇게 얼굴 마주하면서 살았다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이 부자 사이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때로는 남보다 못한 가족이라는 말도 있는데 딱 이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김 회장은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나이에, 이 사회적 위치에서 남들한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지만 딱 하나 예외가 지훈이었다.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외통수에 걸린 기분이었다.
돌파구가 없는 상황에서 김 회장의 유일한 희망은 지훈뿐이었다.
“얼굴이야 이제부터 마주 보고 살면 되는 거고. 가족이란 게 그런 거 아니냐.”
“언제부터 얼굴이 그렇게 두꺼워지셨어요. 화도 안 내시고.”
“네 앞에서는 화내 봤자 나만 손해야. 스트레스만 받지.”
“잘 생각하셨어요. 혈압도 높으신 분이 열 내봤자 좋을 게 있겠어요.”
말 하나하나에 가시가 담겨 있는 문장들이었다. 소리 없는 총성이 둘 사이를 오갔다. 서재에 차를 내가려던 봉천댁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문 앞에서 대기하다가 그냥 돌아섰다. 그만큼 밖까지 두 사람이 대치하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밥이나 먹자.”
“먹고 왔어요. 같이 먹자고 하실 것 같아서.”
“너는 몇 년 만에 봐도 바뀐 게 없구나.”
“아버지는 많이 바뀌셨네요.”
김 회장은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겨우 다스리고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 열을 내봤자 자신만 꼴이 우스워졌다. 저놈은 무슨 말을 하든 귓등으로만 듣고 흘릴 테니까.
지훈은 김 회장의 상황을 뻔히 알고 있었다. 형인 명준에게 자연스레 회사를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그게 여의치 않았다. 명준은 손을 대는 것마다 대차게 말아먹는 재주를 가졌다.
처음에는 진수 식품의 외식 사업부 쪽으로 맡겨보았다. 그쪽으로 경험을 쌓고 사내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가게 할 계획이었다.
외식 사업부는 현상 유지만 해도 크게 바랄 게 없는 상황이었다. 별다른 걸 하지 않아도 돋보일 수 있는 곳이니 무난하게 자리만 차지했다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쓸데없이 이것저것 계획을 하더니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그렇다고 외식 업계가 불황도 아니었다. 경쟁업체는 날개를 단 듯 하루가 다르게 매출 상승을 이뤄냈다.
그는 개인 SNS에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진수 식품의 주가를 하락시키는 마법을 부렸다. 김 회장이 직접 불러 SNS를 당장 그만두라고 했음에도 몰래 계정을 더 만들어서 활동하다가 정체를 들켜 더 조롱을 당했다. 그 외에도 하지 말아야 될 말을 인터뷰에서 한다든가,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다가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등 가만히 숨만 쉬고 있는 게 회사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로 사내에는 악평만 돌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김 회장의 시선은 지훈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핏줄을 중시하는 그가 이 큰 회사를 다른 이의 손에 넘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지만 회사에는 영 관심이 없는 지훈이 김 회장에게는 절실했다.
“저 여기 불러서 뭐하시려고요. 1년 동안 여기 있는다고 뭐가 달라져요?”
김 회장은 지훈에게 한국에 돌아오라고 통보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쌀 한 톨도 물려주지 않을 거라는 협박과 함께.
김 회장이 내건 조건은 진수 식품에 들어와 그의 옆에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지훈은 그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다가 1년 동안만 일을 하고 그 이후에는 자유롭게 해달라는 것으로 최종안을 협의했다. 한국을 떠난 지훈에게 다시 진수 식품으로 돌아오라는 건 김 회장의 손아귀에서 놀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떻게 얻은 자유인데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가고 싶을 리 없었다.
‘저 한국 떠날게요. 어차피 서로 얼굴도 보기 싫은데 같이 사는 것도 웃기잖아요.’
스무 살이 되던 해, 지훈은 폭탄 선언을 했다. 밥을 먹고 있던 김 회장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이었다. 명준과 명준의 모친인 윤정도 놀란 표정이었지만 그 둘은 속으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 게 뻔했다.
머리가 커지면서 지훈은 자신이 어떻게 이 집에 들어왔는지 알게 되었다. 계모라고 의심을 받고 싶은지 티를 팍팍 내고 다니는 윤정과 항상 지훈을 경계하던 명준. 이 집구석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지훈은 직감했다.
자신의 엄마는 따로 있으며,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지훈을 낳은 이후 김 회장에게 빼앗겨 지훈이 이 집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명문 대학을 다니던 엄마는 김 회장과 잘못 엮여 아이를 가졌다가 한순간에 버림을 받게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식이 잘 들어서지 않던 김 회장에게 혼외자식이라 할지라도 지훈은 귀한 핏줄이었다. 자식을 한 명이라도 더 손아귀에 두고 회사를 물려줄 것을 대비하려는 김 회장과 회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명준과 윤정. 왜 이 집안 인간들이 자신을 불청객 취급했는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살면서 사랑이라는 것도, 가족의 정이라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 아이는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생각이었고, 그깟 회사를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스스로 꺼져주길 바라신 거 아니었어요?’
세 사람을 향해 내뱉은 지훈의 말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였다. 지훈이 어릴 때부터 총명했으나 김 회장도 장남이 아닌 지훈에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없었다. 지훈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보루였다.
‘김명준, 뻘짓하지 말고 잘 좀 해. 형이 잘해야 아버지가 나를 쥐똥만큼도 신경 안 쓸 거 아냐. 그러니까 똑바로 좀 하라고. 이렇게 떠먹여 주는데도 못 먹으면 그건 병신 새끼지.’
시원하게 내질러주고 집을 나와 미국으로 갔다. 지훈은 이미 미국으로 갈 준비를 다 마쳐둔 상태였다. 아이비리그의 명문 대학에 합격까지 했다.
이곳에서 한국은 잊어버리고 유유자적 인생이나 즐기며 살 생각이었다. 돈이야 넘쳐났고, 한량처럼 살아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이 없었다. 하고 싶은 공부나 하면서 살다가 즐길 생각이었는데 연일 진수 식품의 안 좋은 기사들이 인터넷에 떠돌았다.
이러다가 김 회장이 부르는 건 아닌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김 회장의 성화에 한국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순순히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반항의 의미로 한국에 갈 때 머물던 김 회장 명의의 강남 집에 들어가지 않고 경기도의 구석진 동네에 집을 얻었다. 자신의 동향은 김 회장이 언제나 파악하고 있을 테니 집 계약을 한 시기부터 그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회사에도 스스로 입사 원서를 써서 합격을 했다.
지훈은 혼외자식이라는 이유로 집안 사람들 외에는 존재를 알지 못했기에 그 누구도 지훈이 김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물론 찌라시로 그의 존재가 떠돈다는 것은 알았지만 공식적으로 그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김 회장 또한 지훈이 곧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걸 연락을 받고 나서야 진수 식품에 입사할 예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꽂아줄 텐데 반항을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한국에서 떠날 때도 그랬지만 무슨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지훈다운 행동이었다.
“마케팅 부서는 왜 지원한 거야?”
“지원하다 보니까 그쪽이 땡겨서요. 별 의미는 없어요. 약속이나 지키세요. 1년이에요.”
김 회장은 말이 없이 지훈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걸 어쩐다. 기어이 오지 않는다는 걸 1년이라는 조건을 걸고 데려왔다. 회사를 이만큼 키워놨으니 모자란 구석이 있는 명준을 데려다 놔도 회사는 충분히 굴러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산이었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려는 카드였던 지훈이 바로 생각났다.
어렸을 때부터 삐딱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이였다. 예측 불가능한 일을 벌이길 좋아하는 성격은 김 회장을 빼다박았다. 미국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 발을 묶어둔 이상, 어떻게든 이 회사에 발을 붙이게 만들어야 했다.
머리가 비상한 놈이니 무엇을 시켜도 곧잘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하고 싶도록 만드는지가 문제지.
1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지훈의 발을 묶어둘 수 있을까. 김 회장은 지훈이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은 날부터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그 집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냐. 강남 집으로 돌아와. 집은 처분하지 않고 그대로 둘 테니까.”
“귀찮아요. 또 이사하려면.”
“이사를 네가 해? 사람 쓰면 될걸.”
“딴 데 갈 생각 없어요.”
지훈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언제 와도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얼굴 봤으니까 갈게요. 다음엔 볼일 있으면 찾아오세요. 부르지 마시고. 여기만 오면 숨이 턱턱 막혀.”
지훈은 그 말을 끝으로 서재를 나갔다. 김 회장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깊게 생각에 잠겼다. 자식 농사만큼 어려운 게 없다더니. 한 놈은 회사를 갖고 싶어서 안달인데 모자라고, 한 놈은 능력이 좋아서 회사를 준다고 하는데도 싫다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고. 그렇다고 확 다른 사람에게 회사를 넘길 수도 없고.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