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얘가 뭐래는 거야….”
취한 와중에도 귀엽다는 말에 볼이 뜨거워졌다. 자식이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너 나한테 찝쩍대는 거야?”
지훈은 의미 모를 미묘한 웃음만 지으며 소주를 한 잔 마셨다. 지훈 또한 꽤 마셨는데도 송이와 달리 크게 취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말했지? 나 인기 많았다고. 너도 내 매력에 벌써 빠졌잖아. 너 나 좋아하지?”
송이는 손바닥으로 지훈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헤벌쭉 웃었다. 애완동물이라도 만지듯 얼굴을 쓰다듬는데 지훈이 송이의 손목을 붙잡더니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선배도 나 귀엽다며.”
“…….”
“그럼 선배도 나한테 찝쩍댄 거네.”
말이 그렇게 되나. 송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어버린 상황에서 지훈의 말이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지훈의 시선이 꽤나 뜨겁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뜨겁다 못해 따가웠다. 이게 왜 이러는 거야. 취한 와중에도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어 다시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했지만 지훈은 붙들고 있는 손목을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맞잖아. 우리 서로 찝쩍댄 거.”
“이게 진짜, 너 자꾸 나 놀릴래?”
송이는 잡혀 있던 손목을 빼내어 지훈의 머리를 툭 쳤다.
“하나도 안 아픈데.”
송이가 다시 지훈의 머리를 치려고 했지만 몸이 휘청거리며 헛손질만 했다. 자신이 휘두르는 팔의 힘을 가누지 못하고 넘어질 뻔하자 지훈이 그녀의 몸을 받쳐주었다.
“우리 선배가 너무 많이 마셨네. 이러다 내일 조 부장 새끼한테 또 깨지려고.”
지훈에게 몸을 기댄 상태가 되어 두 사람의 몸이 아주 밀착되었다. 잠시 호흡하는 소리만 둘 사이에서 오갔다. 묘한 분위기에 송이는 지훈에게서 벗어나 살짝 의자를 뒤로 미루며 거리를 벌렸다.
“너 나를 쉽게 보는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야.”
“내가 언제 쉽게 봤어요. 귀엽게 봤지.”
“봐봐, 또 그러잖아. 김지훈, 너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뭔데, 해봐요.”
지훈은 얼마든지 들어주겠다는 듯이 턱까지 괴고 송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송이는 취한 가운데에서도 지훈 때문에 잠깐씩 정신이 돌아왔다가 다시 어지러워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너는 너무 이 세상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목이 타는지 송이는 물을 한 잔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출근 첫날에도 옥상에서 담배나 피우면서 사무실에 들어가기 싫다고 하질 않나, 들어가서 인사를 해야 되냐고 하질 않나, 출근해서는 거짓말이나 하고 말이야.”
“그래서요.”
“우리 회사 들어오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너 낙하산이야? 아니잖아. 최 대리가 너는 아니랬어. 그래, 맞아. 너는 낙하산은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통과했어? 나 진짜 너무 궁금해.”
“어떻게 통과하긴요. 면접 보고 통과했지.”
“그러니까 그 면접을 어떻게 통과했냐고? 우리 회사가 그렇게 만만한 데가 아닌데.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렇게 힘들게 들어온 회사인데 대체 왜 그러는 건데? 태도가 아주 마음에 안 들어. 태도가.”
“내 태도가 어떤데요?”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말이야. 선배를 우습게 보고, 나만 보면 비웃고, 신입이 싹싹하거나 나긋나긋한 맛도 없고. 너 선배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알았어?”
“아, 나긋나긋하게 대해주면 되는 거예요?”
“그래, 나긋나긋하게 좀 해 봐. 그리고 너 열심히 살아, 자식아. 그렇게 허세나 부리면서 대충 살면 이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너 그러면 안 돼. 젊은 놈이 뺀질거리기나 하고.”
송이는 입이 심심했는지 다시 젓가락질을 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쭈꾸미가 젓가락 안에 쏙 들어와 송이의 입으로 직행했다.
“결론은 꾀부리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거야. 내가 니 사수니까 내 말 잘 듣고. 넌 내 말만 들으면 돼. 알았어?”
“알았어. 말 잘 들을게요.”
“그래, 착하네. 아주.”
송이는 지훈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다가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그런데 열심히 일하면 뭐가 좋아요? 일 더 한다고 회사에서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닌데?”
“야, 너는 야망도 없냐?”
“그런 거 없는데. 선배는 야망이 있어요?”
“그럼. 나는 야망이 아주 크지. 너 텍사스 가봤어? 내가 텍사스까지 가서 바비큐를 배워왔다 이거야. 엄마한테 돈도 빌리고, 은행 가서 돈도 빌리고 야망 있게 말이야! 뭐, 크게 말아먹기는 했지만. 어쨌든 야망이 크다 이거야. 지금은 빚이나 갚고 있는 처지지만 내가 나중에 꼭 사장까지 올라가고 만다.”
“사장? 진짜 야망이 크시네.”
“어차피 회사에서 빽 없으면 평범하게 해서는 임원까지 가지도 못해. 너 빽 있어? 사장 아들이라도 돼? 그러면 대충해도 돼. 지금처럼 대충 살아도 된다고. 그런데 아니잖아. 그러면 죽기 살기로 해야지, 지훈아.”
“아, 사장 아들이면 대충 살아도 되는 거예요?”
지훈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사장 아들이면 X 빠지게 사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내가 사장 아들이면 아무것도 안 하고 놀면서 먹고살겠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왜 놀면서 먹고살겠다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너는 놀고먹으면 안 되고. 사장 아들은 그러면 된다고. 사장 아들.”
“그러니까요. 사장 아들이어서 대충 살고 싶은데 놔두질 않네.”
“얘가 아까부터 뭐라고 하는 거야.”
“사장 아들이니까 대충 살고 싶다고요. 정확하게는 회장 아들이구나.”
송이는 제가 들은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회장 아들이라니. 농담도 할 농담이 따로 있지. 어이가 없었다.
“지훈아. 너 대충 살고 싶은 거 다 알아. 그런데 할 농담이 따로 있지, 인마. 니가 아무리 허세가 있고 그래도 그런 장난은 치는 거 아니야.”
“장난 같아요?”
“그만하라고, 자식아. 알았어, 알았어. 내가 나중에 사장 되면 임원 자리 하나 만들어줄게. 본부장 시켜줄까? 어디 원하는 데 있어?”
“나는 선배 옆이 좋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러면 부사장 시켜줄게. 부사장이니까 사장 옆이잖아. 아니야? 너 줄 잘 잡은 거야. 나만 믿고 따라와. 김지훈, 너는 내가 책임져준다.”
송이는 지훈의 어깨를 팡팡 쳤다. ‘너의 뒤는 내가 봐준다’라는 어느 조폭 영화의 대사가 떠오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내가 아주 운이 좋네. 선배 줄 잡고 출세나 해야겠네요.”
“내가 사장이 돼서 자식을 낳으면 사장 아들이네? 헤헤헤. 아쉽네. 너를 내 아들로 해줄 수도 없고.”
송이는 사장이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아주 좋은지 기분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선배, 나중에 기억 안 난다고 하면서 입 싹 닦는 거 아니에요?”
“다~~ 생각 나 모두 다. 내가 아주 기억력은 끝내줘. 걱정 마. 나중에 꼭 기억하고 너 부사장 시켜줄게.”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이 서서히 꺼져갔다. 앞에 있는 소주잔이 세 개, 네 개로 보였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몸에 힘이 점점 풀렸다.
* * *
“아흐… 물.”
머리가 지끈거렸다. 숙취가 온몸을 감싸고 돌아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월요일의 출근 본능을 이길 수는 없었다.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있는 생수병을 들어 마시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떠 보았지만 커튼 때문에 사방이 어두워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으아!”
거실에서 기지개를 켜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의 햇살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제는 완연한 여름이어서 해도 빨리 떴다.
“어제 몇 시까지 먹은 거야….”
숙취가 심한 걸 보니 12시를 넘긴 게 분명했다. 얼마나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월요일부터 술 냄새를 풍기며 출근하면 조 부장이 또 지랄을 해댈지 모르는데. 내가 미친년이지.
어제 김지훈하고 술을 마신 건 기억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희미했다. 무슨 실수는 안 했겠지. 이따 출근하면 물어보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순간 싸한 느낌이 들었다.
창밖의 풍경도 평소와 똑같고, 집의 구조도 똑같은데 왜 이질감이 드는 거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야…?”
처음 보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벽지도 다른 색이었고, 인테리어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다시 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맞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평소 집에서 보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우리 집이 맞는데. 그런데 왜 우리 집이 아니지?
몸에 걸친 것은 어제 밖을 나갈 때 입었던 옷들 그대로였다. 혼란에 빠진 송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천천히 집을 둘러보았다.
우리 집이 이렇게 깨끗했나? 정갈하고 깔끔한 느낌이 눈에 확 들어왔다. 단조로운 화이트 톤에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 이런 게 우리 집에 있을 리가 없잖아. 결정적으로 싱크대가 아주 깨끗했다. 설거지를 몰아서 하려고 잔뜩 쌓아두었으니 이건 우리 집일 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때부터는 움직임이 빨라졌다. 일단 나가고 봐야 한다는 본능이 송이를 지배했다.
신발장으로 가 보니 어제 신고 나왔던 슬리퍼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여 있는 운동화, 그리고 남자 구두.
덜컥.
순간,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반바지만 입고 상체가 노출된 상태로 지훈이 머리를 털고 있었다.
“선배, 일어났네요. 출근 때문에 깨우려고 했는데.”
“왜….”
왜 거기서 나오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말이 다 나오지 못했다.
“지금 그럴 때 아니에요. 빨리 준비하고 나가야 될 텐데.”
송이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얘는 왜 아무렇지도 않게 침착한 얼굴이지. 상체를 노출하고도 평온한 표정은 뭔데?
자신의 머릿속은 응급상황이라는 걸 알리고 있는데 얘는 평온해도 이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그 간극이 어디에서부터 발생하는지 몰라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다가 벽에 걸려 있는 시계에 눈이 갔다. 서둘러야 했다.
“저… 갈게요.”
우선 여기서 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자신의 집은 아니니 나가야 했다. 자신도 모르게 지훈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슬리퍼에 잽싸게 발을 넣었다. 그러고는 바로 나가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이….”
끙끙거리며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자신의 집과 다른 도어락이어서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몰랐다.
“이걸 눌러야죠. 선배.”
등에 그의 몸이 살짝 닿는 느낌이 들면서 싱그러운 바디워시 향이 훅 끼쳤다. 그러더니 문이 열렸다.
“아, 네….”
악의 구렁텅이에서 천국으로 가는 문이 열리듯 환한 빛과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얼른 밖으로 발을 내딛고 문을 닫아버렸다. 띠릭, 하는 도어락의 잠금 소리만이 귓가를 울렸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1502’라는 숫자가 문에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