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누가 미련이 남아 남기는.”
술을 몇 잔 더 스트레이트로 마셨더니 살짝 알딸딸해졌다. 앉은 지 10분도 되지 않아서 벌써 소주 1병이 깔끔하게 비워졌다.
“선배, 그거 알아요? 욕도 관심이 있으니까 하는 거예요. 없으면 아예 무시하고 말지.”
“…….”
“그날 전화기에 대고 했던 욕. 오늘 온 전 남친한테 한 거 맞잖아요?”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박경수에게 관심이 아예 없어졌다면 오는 전화를 받지도 않고 무시해버렸을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찾아오든, 말든 그냥 꺼지라고 했으면 그만인데 굳이 커피까지 같이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조곤조곤 팩트로 공격하고 들어오니 받아칠 수도 없었다.
“내가 그 욕을 들었으면 정이 확 떨어졌을 텐데… 선배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그런 소리를 듣고도 찾아온 걸 보면. 아니면 욕 들으면 흥분하는 변태 새낀가.”
소주를 들이켜려던 지훈이 잠시 행동을 멈추고 송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굳이 다른 여자도 많을 텐데 왜.”
그런 묘한 말을 남기고는 소주를 들이켰다. 서비스로 나온 어묵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으면서도 고개를 작게 저었다.
“무슨 의미예요?”
송이는 기분이 요상하게 나빠 물었다. 분명 얼굴 보고 평가당한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배가 아주 매력이 있나 보죠. 그 새끼한테는.”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대학 다닐 때 고백 많이 받아 봤거든요? 나도 나름 이때까지 연애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잘나갔다고!”
스스로 말하기는 민망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발끈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한테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초등학생 때부터 추근대는 남자애들도 많았다. 노는 양아치부터 공부 잘하는 모범생까지. 그 많은 인간들 중에서 고른 몇몇 남자들이 하필 쓰레기들이라는 게 가장 문제였지만.
“잘나가셨구나. 몰라뵀네요.”
이 새끼가 진짜!
“그 하고 많은 남자들 중에서 하필 그런 쓰레기가 걸려 가지고.”
하… 할 말이 없었다. 내 복이 정말 박복한 건지. 남자 복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는 것인지.
“그러니까 빨리 손절하고 새 남자 만나요. 거기도 작다면서요. 큰 남자 만나면 되지.”
송이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스러웠다.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요?”
“인간의 본능을 따르는 게 어때서요. 큰 거 좋아한다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나는 충분히 그 맘 이해해요. 아직 큰 사람을 못 만나 보셨으면 더 집착하고 그럴 수도 있죠.”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이런 행동이 오히려 그의 말을 인정하는 꼴인 것도 모르고 송이는 한껏 흥분을 했다. 그러든 말든 표정의 변화가 없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시선을 피하다가 민망하여 애꿎은 술이나 찾아대며 잔에 소주를 따라 마셨다.
이 싸가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도 모르고 마신 술만 꽤 되었다. 내일 출근해야 되는데. 이쯤에서 자리를 파하고 일어나야 하는데, 술은 계속 술을 부르고 있었다. 이번 주에는 유독 술을 많이 마셨더니 간도 힘에 부치는지 술도 더 빨리 취하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조금씩 어질어질했다.
“천천히 드세요. 아직 초저녁인데.”
지훈은 그 가짜라던 시계를 슬쩍 보더니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는 거만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뭔가 자신을 과시하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송이는 눈을 부릅뜨면서 흐릿해지는 시선을 선명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그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기다란 다리. 팔도 길쭉 손가락도 길쭉. 키도 크고.
한국 남자의 평균 키라고 그렇게 우겨대지만 평균에 조금 못 미치는 경수에 비하면 모든 게 다 컸다. 모든 게? 그 모든 것에는 그것도 포함이 될까. 이성은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본능적으로 시선이 자꾸만 그쪽으로 향하려고 하는 건지.
“어딜 그렇게 봐요. 뚫어지겠네.”
“아, 아니에요.”
“이상한 상상 하지는 마시고요.”
“상상이라니! 큰일 날 소리를 하네.”
“무슨 상상을 하셨길래 또 발끈하실까.”
그러면 안 되는데. 이 순간에도 왜 자꾸 상상하게 되지. 머릿속이 음란마귀에게 잠식이라도 당했나 보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술을 깨보려고 했다. 술에 취해서 정상적으로 뇌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분명 그런 것이다.
“이모 여기 소주요!”
송이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소주병에 남은 소주를 잔에 탈탈 털고 또 소주를 시켰다.
* * *
“김지훈 씨, 당신은 세상 모든 게 그렇게 쉬워? 쉽냐고?”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이 쌓여가고 있었다. 소주병이 늘어갈수록 송이의 간도 알코올에 농밀하게 적셔지는 중이었다. 알코올이 이성을 점점 희석시키면서 그녀의 더욱 자유롭게 혀를 놀렸다.
“사람이 몇 년을 만났는데 그렇게 쉽게 손절이 되겠어? 만나온 시간이라는 게 있잖아. 그게 하루아침에 무 자르듯이 잘라지겠냐고.”
“아까는 미련 없다면서요.”
“그래. 그랬지… 그런데 사람 마음이 그게 아니라고. 뭘 알아야 말이 통하지.”
송이는 지훈을 향해 삿대질을 하다가 손에 든 잔을 놓쳐 소주를 테이블에 엎고 말았다.
“에이… 술 아깝게.”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슥슥 닦더니 옷에 슥 문지르고는 다시 소주를 잔에 따라서 원샷했다.
“당신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애인이 있었을 거 아니냐고. 헤어져 본 적도 없어?”
“없어요.”
“오… 그러면 첫사랑을 계속 만나는 거야? 의외로 순정파네… 아주 훌륭해.”
송이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뒤로 움직이면서도 엄지를 척 들어주며 지훈을 칭찬했다.
“아뇨. 만나 본 적도 없다고요.”
“응?”
“사귀어 본 적 없다고.”
송이는 지금 제가 제대로 들었는지 의문이었다. 아무리 취했다지만 지금 지훈이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만나 본 적이 없다면 모쏠이라고?
“에이… 이 얼굴에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선배를 놀리면 못 쓰지.”
맞은편에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대뜸 지훈의 바로 옆자리로 옮겨 앉더니 엄지와 검지로 지훈의 볼을 잡고 흔들었다.
“이런 귀염둥이를 여자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잖아. 응?”
조금 전에 소주를 훔치던 손에서 알코올의 향이 훅 끼쳤다. 지훈은 인상을 쓰며 송이의 손을 잡고 자신의 볼에서 떼어냈다.
“선배 취했네.”
“왜 갑자기 말을 돌려? 창피해?”
“안 되겠다. 집에 가자.”
“야, 안 놔?”
지훈이 송이의 팔을 붙들고 일으키려고 했지만 송이는 완강하게 버텼다.
“그리고 너. 자꾸 나한테 말 놓는다? 누가 말 놓으래, 후배가. 나이는 동갑이어도 나 빠른이야. 내가 너보다 학교 빨리 졸업했다고.”
“나도 빠른인데.”
“몇월 생이야? 나보다 빨라?”
“1월.”
“나도 1월인데. 에이 씨. 그래도 너 선배한테 말 까지 마.”
송이는 나무젓가락으로 쭈꾸미가 들어 있던 접시를 뒤적거리다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고는 이모를 애타게 부르며 추가로 쭈꾸미를 시켰다.
“지훈아, 왜 이렇게 안 먹어? 쭈꾸미도 나 혼자 다 먹었네.”
이제는 아예 지훈의 이름을 대놓고 부르고 있었다. 지훈은 그런 송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 입이 짧아요. 맛없는 건 안 먹어요.”
“사내자식이 까탈스럽기는.”
송이는 올라오는 취기에 하아, 하고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박경수 그 새끼가 앞에 나타났을 때는 기분이 더러웠는데 이렇게 술을 한껏 마시고 나니 기분이 업이 되어 웃음이 나왔다. 세상이 흔들거리며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지만 기분이 좋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좋아요?”
“좋지, 그럼. 후배하고 이렇게 맛있는 쭈꾸미도 먹고. 이거 왜 안 잡히냐.”
송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접시에 든 쭈꾸미를 집으려고 애를 써 봤지만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아 젓가락은 자꾸만 애꿎은 곳만 맴돌고 있었다.
“자꾸 쭈꾸미가 도망가.”
젓가락으로 겨우 집어도 쏙 빠져나갔다. 손가락에 힘을 주지 못하고 있으니 미끌거리는 쭈꾸미가 젓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 툭 떨어졌다.
“이것들이 어딜 자꾸 빠져나가? 응…?”
송이의 입으로 물컹거리는 게 쏙 들어왔다. 송이는 본능적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매콤한 쭈꾸미의 양념이 입 안을 맴돌았다.
지훈의 젓가락이 송이의 입에서 쏙 빠져나왔다. 쭈꾸미를 두고 혼자 쇼를 하고 있는 송이를 보다가 지훈이 먹여준 것이다.
“맛있다. 하나만 더 줘.”
송이는 자신의 입을 검지로 톡톡 치면서 입을 벌렸다. 그러자 지훈은 다시 쭈꾸미를 젓가락으로 집어 송이의 입으로 대령해주었다.
어미 새가 전해준 먹이를 냠냠거리며 먹듯 송이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잘도 입을 오물거렸다.
“선배, 그거 알아요?”
“뭐?”
지훈이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두고 송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송이는 몸을 가누기 힘들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댄 채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지훈을 바라보았다. 볼은 아주 발그레한 채.
“계속 보고 있으니까 귀여운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