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박경수가 왔다고?
귀청 떨어지겠네. 수화기에 확성기라도 갖다 대었는지 귓구멍 저 깊숙이 박혀 있는 고막까지 뒤흔들었다.
-완전 양심리스네. 그리고 지가 뭘 잘했다고 질질 짜기는 왜 짜는데? 존나 찌질하다 진짜.
박경수를 직접 보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될까. 주먹으로 턱주가리를 세게 날려줄까. 뺨따귀를 올려붙일까. 그런 상상을 해봤는데 직접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대로 집에 들어가면 더 우울하기만 할 것 같아서 카페를 나와 동네를 하염없이 걸었다. 낮의 끈적한 공기는 저녁이 다가오면서 조금씩 선선하게 변해갔다. 걸으니 등에 약간 땀이 났지만 그래도 걸을 만했다.
그렇게 계속 걷다가 동네에 있는 자그마한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누구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지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나는 역시나 흥분을 하며 말을 했다. 두 사람이 만나온 것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지켜봐 왔기에.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해. 미리 걸러진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냐.
“이 세상에 괜찮은 남자가 있기는 할까. 내가 바라는 게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그냥 쓰레기 짓만 안 하면 되는데.”
-내가 좋은 놈으로 물색해서 소개시켜줄게. 걱정 마. 이 언니가 발이 굉장히 넓잖냐. 어떤 스타일로 해줄까?
“됐어. 당분간은 만날 생각 없어.”
박경수 같은 놈은 금방 잊어버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번 연애의 여파가 컸다. 삼십대를 앞두고 있는 나이여서 그런가. 어렸을 때와는 이별의 무게감도 다르다.
‘이거, 엄마가 갖다 주래. 반찬이야.’
아까 경수를 남겨두고 먼저 카페를 나서는데 경수가 다급하게 붙잡아 세우더니 쇼핑백을 하나 건네주었다.
경수의 어머니는 종종 뵈었다. 손맛이 좋으셔서 가끔 반찬도 주시곤 했다. 그렇다고 이 타이밍에 어머니 반찬이라니.
‘엄마가 꼭 갖다 주라고 해서 내가 다시 가져가지는 못하니까 먹기 싫으면 버리든가.’
아직도 눈가가 촉촉한 채로 도망치듯 경수는 멀어졌다. 경수 어머니가 주셨다고 하니 버릴 수도 없고.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그래, 솔로가 얼마나 편한데. 그깟 남자 없다고 어떻게 되냐?
작년에 남자친구와 헤어지면서 한 달을 식음도 전폐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해서 울던 애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들 생각도 없었다.
“술이나 마시자. 나와.”
기분이 꿀꿀할 때는 술이 최고였다. 내일 출근하는 날이니 너무 과하게는 마시지 않고 적당하게만.
-응?
얘가 반응이 왜 이러지. 술 마시자고 하면 누구보다 반기던 애가.
“술이나 마시자고. 어디서 볼래? 내가 갈까?”
-지금?
“그러면 언제 마시게.”
-나 이따 나가봐야 되는데….
말끝을 흐리는 게 찝찝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숨기는 게 있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어디 나가는데 그래?”
-취업 자료 준다고 선배가 온다고 해서.
요즘 들어 지나가 톡에 답도 늦을 때가 있고, 밤에는 통화 중일 때도 있었다. 이건 백 프로 남자의 흔적이었다.
“너 요즘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
잠시 핸드폰 너머에서는 말이 없었다. 얼마 전 정곡을 찔렸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스르륵 떠올랐다. 이건 필시 정곡을 찔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냥 선배야. 내가 계속 취업 못 하고 있으니까 도와준다고 해서. 밥 몇 번 먹은 게 다야. 내가 지금 남자 만날 처지냐.
혓바닥이 긴 게 딱 맞혔나 보다. 친구는 바람피운 똥차하고 헤어진 마당에 남자를 만난다고 하기가 민망하겠지. 그냥 모른 척해주는 게 친구를 위하는 길이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지나에게 잘 만나고 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등을 완전히 벤치에 기댄 채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기 전, 낮의 푸른 하늘에 어두움이 조금씩 물들어가는 이 시간. 바람도 선선해지니 소주가 땡겼다.
이런 날은 탁 트인 포장마차에서 소주나 한잔 까는 게 딱인데.
혼술이라도 할까, 아니면 그냥 집에 갈까 고민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있는데 좌측 옆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반바지 운동화 차림에 다리를 꼬고 하얀 막대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고 있는 남자가 송이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곳에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게 어색했다. 주말에 직장 동료와 동네 포장마차에 같이 올 줄이야. 아주 개인적인 공간에 불순물이 끼어든 것 같은 요상한 기분.
‘우리 너무 자주 마주치는 거 아니에요?’
공원에서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그에게 물었다. 정말 자주 마주치기는 했다. 아무리 같은 동네에 산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그렇지 않은가. 일부러 쫓아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특유의 비꼬는 화법으로 그가 받아쳤다. 그래, 그냥 넘어갈 싸가지가 아니지.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아먹는 저 면상이 아주 얄미웠다. 머리는 복잡한데 눈앞에는 짜증을 유발하는 인간이 있으니 그냥 집이나 들어가는 게 상책이었다. 무시하고 공원을 나가 집으로 향하는데 밥 달라는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
‘자꾸 왜 따라와요?’
‘선배.’
‘왜요?’
‘술이나 한잔할래요?’
그 말에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술이 고프던 차에 저런 물음을 들으니 아무리 저 싸가지라도 거절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아니라고 하는데도 입은 ‘술이나 한잔 할까….’라고 얼버무리며 그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남녀는 포장마차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였다.
일요일 저녁인데도 포장마차에는 은근히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더워서 밖에 나와 술을 마시려는 것인지 시끌벅적했다. 술과 안주는 시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빠르게 세팅이 되었다.
“아까 그 사람 전 남친 맞죠?”
지훈은 이 집의 단골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있는 소형 종이컵을 가져와서 소주를 따르더니 송이의 앞에 쑥 내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잔에도 소주를 따랐다.
지훈이 어서 들라는 듯이 컵을 내밀더니 송이의 잔에 부딪쳤다. 송이도 소주를 한잔 쭉 들이켰다.
지훈은 송이의 잔을 바로 채워줬다.
“뻔하지, 뭐. 잘못했다고 빌면서 다시 만나자고 했겠지. 바람피운 새끼가 찾아온 용건이 그거 말고 있겠어요.”
“남의 사생활이 뭐가 그렇게 궁금해요? 그거 물어보려고 술 마시자고 한 거예요?”
술을 마시자고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기는 했다. 그래, 잘 안 되고 있는 남의 연애만큼 재미있는 게 없기는 하겠지.
“그 새끼한테는 뭐라고 했어요?”
“내가 뭐라고 하든 뭔 상관인데요.”
“호구처럼 또 받아주면 어쩌나 해서.”
“누가 뭘 받아줘 받아주긴!”
“아니면 말지 왜 발끈해요.”
송이는 아까 지훈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받았다.
“그 새끼가 용서는 안 되는데, 미련은 남고. 그래서 기분은 더럽고. 술은 마시고 싶고. 아니에요?”
얘 뭐지.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꿰뚫고 있었다.
“술 마시고 싶다고 얼굴에 팍팍 티를 내고 있는데 후배 된 입장에서 그냥 넘어갈 수가 있어야죠. 우리 선배가 힘드시다는데.”
“자기가 먼저 술 마시자고 해놓고 왜 내 핑계를 대?”
송이는 괜히 얼굴을 만져보았다. 얼마나 티를 냈다고. 하긴, 벤치에서 앉아 있는 내내 한숨을 얼마나 많이 내쉬었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렇게 티가 났다.
이번에는 송이가 술을 들이켰다. 이 남자하고만 있으면 왜 마음이 다 까발려지는 기분이 드는 걸까. 열이 오르는 속을 소주로 달랬다.
지훈의 앞에 있는 소주병을 가져와 자신의 잔에 따랐다. 흔들리는 멘탈 때문인지 찰랑찰랑 넘치도록 따른 소주 몇 방울이 테이블에 흘렀다. 그대로 잔을 꺾어 입에 털었다.
오늘은 술을 쉬려고 했는데. 술이 술을 불렀다.
아마 집에 그냥 들어갔으면 계속 박경수 때문에 또 속을 끓이다가 한숨만 쉬었겠지. 그럴 거면 차라리 술이나 마시고 현실을 잊는 게 나았다.
“그렇게 미련이 남아요?”
“아니라니까.”
“보니까 그냥 그렇던데. 그런 스타일 좋아해요?”
“남이사.”
얘는 뭐가 자꾸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박경수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술을 마시러 왔건만 취조라도 하듯이 캐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