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차분한 선율이 흐르는 어느 카페의 일요일 오후. 테이블 위에 차를 두고 주말의 여유를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시원한 커피와 시원한 바람이 빵빵하게 가득한 실내, 그리고 편안한 의자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이 카페.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태클을 거는 이들이 있었으니.
두 사람은 몇 분째 계속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송이는 컵에 꽂힌 빨대를 쭉 들이켰다. 어느새 커피를 다 마셨는지 얼음만 남아 있어 공기만 빨대 안으로 흡입하는 소리가 들렸다.
“니네 동네는 마트 없냐. 여기는 왜 왔는데?”
이 인간을 마트에서 마주칠 줄이야. 짜증 나는 얼굴이 불쑥 찾아온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옆에서 지훈이 보고 있으니 민망했다. 바로 카트에 있는 대형 과자 봉지만 딸랑 들고서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빠르게 마트를 벗어났다.
남들은 보통 대형마트를 가면 봉지 몇 개에 많은 물건을 담아서 나오곤 하는데 송이는 과자만 봉지에 담아 나오려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그대로 집에 가려고 했지만 경수가 계속 따라오는 통에 몇 번을 가라고 하다가 포기하고 카페로 들어온 것이었다.
“문자로는 잘만 씨불이더만. 왜 말이 없어? 꼴에 양심은 있나 보다?”
경수는 숙제 검사를 당하는 초등학생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게 더 꼴 보기 싫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차라리 욕을 시원하게 퍼붓고 꺼지라고 할 텐데. 혼자 급발진할 수도 없고.
“그 남자 누구야?”
그 남자라면 지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왜, 나는 다른 남자 좀 만나면 안 돼? 너만 여자 만나냐?”
일부러 도발을 해보고 싶었다. 내 심정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느껴보라는 심정으로.
“아닌 거 알아.”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저 뻔뻔한 얼굴을 마주하니 계속 말이 세게 나왔다. 아까 지훈과 경수는 묘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대치했다.
‘누구세요?’
‘그쪽은 누군데요.’
경수가 먼저 물음을 던졌지만 지훈이 호락호락하게 답을 할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사람 많은 데서 뭐 하는 짓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니 쪽이 팔려 더 빨리 나온 것도 있었다.
“너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니가 왜 날 마트에서 기다려? 이 미친놈아.”
“어. 너 주말에 마트 자주 가잖아. 너희 집 근처에 오기라도 하면 죽여버린다며….”
전에 바람의 현장을 들키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집 근처로 찾아오겠다고 하여 오기만 해보라고,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보라고 으름장을 놓았을 때가 있었다.
자신이 자주 가는 동선을 알고 있는 사람. 이 세상에 몇 없을 것이다. 삶의 일부분을 공유했던 사람과 이렇게 대치하고 있다는 게 씁쓸할 따름이었다.
“죽기는 싫은가 보다?”
“송이야.”
“그 주둥이로 내 이름 부르지 말아줄래. 소름 돋으니까.”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누군가의 사과가 이렇게 역겨울 수도 있는 걸까. 저 말을 하는데 왜 경수의 오피스텔에 갔던 그날, 그 어린 여자애의 앞을 가로막고 서던 그 광경이 떠오르는 걸까.
그날의 감정을 정확하게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웠다.
당황. 흥분. 분노. 허탈. 허무.
믿었던 사람이 내가 생각지 못한 행동을 눈앞에서 하고 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진다고나 할까. 내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떼어져 나가 마음 한쪽이 휑해진 기분. 이 새끼는 그런 기분이 뭔지는 알고나 있을까. 알면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 뻔뻔하게 잘못을 빌지는 못하겠지.
그 광경을 마주한 날은 태어나 처음으로 식욕이라는 게 떨어졌다. 그 전에 만났던 남자들은 헤어져도 워낙 쓰레기들이어서 그랬는지 꼬박꼬박 배고픔이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장사를 했다가 말아먹은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이었다.
장사를 실패하고 하루하루 시름시름 앓던 송이에게 다가와 위로를 건네던 경수였다. 살면서 가장 취약하던 시기에 박경수는 그 틈을 적절하게 파고들었다. 전부터 송이에게 관심이 있던 경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 들이대며 송이와 결국 사귀게 되었다.
처음에는 위로를 받을 상대가 필요했고, 그때 박경수가 옆에 있었고, 어쩌다 보니 사귀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박경수라는 인간은 썩 괜찮은 구석이 많았다.
소심한 성격에 가끔 우유부단하여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전에 만났던 남자들처럼 찌질하게 굴거나, 돈 문제가 있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착실하게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돈도 모아두었다며 통장 내역도 보여주며 은근히 미래를 이야기하는 게 보기 좋을 때도 있었다.
경수 같은 애가 없다는 엄마의 말처럼 앞으로 경수 같은 애를 만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경수에 대한 애정이 쌓여갔다. 이 남자라면 정말 미래를 함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잘못?”
“어. 잘못했어.”
“나는 니 입에서 그딴 소리가 나오는 게 그냥 너무 짜증 나.”
“정말 미….”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그래. 잘못을 할 수도 있어. 그런데 너는 잘못하면 안 될 걸 잘못했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으로 어떻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너만 보면 계속 이 생각이 날 텐데.
그날은 계속 화만 났다면,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은 감정이 들쭉날쭉했다. 전에 헤어졌던 남자들처럼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그렇게 다짐하며 잊으려고 하다가도 불쑥 그 여자와 함께 있던 모습이 떠오르면 화가 나고, 경수와 함께했던 시간이 떠오르면 감상에 잠기기도 하고.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근에 들어온 개 같은 신입 때문에 멘탈에 금이 가서 잠시 박경수를 잊기는 했다. 그런데 다시 찾아와 사람을 들쑤셔 놓고 있었다.
“지금 너하고 내가 이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난 너무 X같아. 경수야.”
송이는 얼마든지 욕을 뱉어줄 수 있었지만 그래 봐야 뭐하나 싶었다. 그래서 한 단어에 지금까지의 감정을 농축해서 뱉어주었다.
“그러니까 그냥 그 어린애 데리고 살아.”
“…….”
“한송이라는 여자는 살면서 잠깐 알았던 애 정도라고 생각하고 그냥 니 갈 길이나 가라고. 이 새끼야.”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송이는 최대한 음성을 낮추려고 했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가 워낙 삭막했는지 그 기운이 카페를 가득 채워 다른 이들이 둘을 힐끗거렸다. 누가 봐도 사고를 친 남자가 여자에게 비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너, 우리 엄마 가게 갔다며? 거기가 어디라고 가. 미쳤냐?”
“어머님이 전에 많이 바쁘다고 하신 게 기억이 나서….”
“니네 엄마야? 우리 엄마야! 우리 엄마가 바쁘든, 뭘 하든 내가 신경 쓸 일이지. 니가 뭔데?”
결국 음성이 높아졌다. 엄마의 가게에 찾아가 도왔다는 그 위선에 더 화가 났다.
흑흑흑.
뭔 소리야 이건 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던 송이의 눈에 어깨를 들썩이는 경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훌쩍이고 있었다. 이 새끼가 왜 울고 지랄이야.
아까보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고 있었다. 보통은 여자가 우는 모습이 자주 연출되는데 반대이니 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다.
“너 뭐하냐?”
“미안. 흑흑. 어머님한테도 죄송하고, 너한테도 미안하고….”
“당장 안 그쳐? 너 때문에 이 동네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생겼잖아.”
경수는 테이블 위에 있는 냅킨을 들고 눈가에 어린 눈물을 닦았다. 금세 냅킨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냅킨이 금방 축축해졌다. 송이는 마구 밀려오는 쪽팔림에 손을 이마에 대고 얼굴을 가렸다.
“너도 아직 나한테 마음 있잖아. 이대로 헤어지기 싫잖아.”
겨우 울음을 그치고 안정을 되찾은 경수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송이는 살면서 들은 말 중에 가장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 진짜 뒈지고 싶냐?”
“너 전에 통화했을 때 나한테 뭐라고 했어? 기억 안 나?”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나지 않았다.
“기억 안 나. 술김에 했나 보지.”
현장을 목격하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나.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취해서 박경수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속에 쌓인 말들을 다 풀어버리고 싶어서.
“왜 그랬냐면서 울다가, 우리가 만난 시간이 얼마나 되냐면서 웃다가… 우리는 이렇게 끝날 인연이라면서 울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결혼 얘기를 하지 않았냐면서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했던 것 같기는 하다. 듣기만 해도 미친년이 따로 없었다.
“그게 다야?”
“물론 욕을 훨씬 많이 하기는 했지만….”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너도 아직 나하고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아쉽잖아….”
송이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열이 정수리까지 올라 온몸이 불타오르듯 뜨거웠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박경수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지나와 통화를 하다가 신입과의 관계도 꼬이고, 바람을 피운 현장을 목격하여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그것도 모자라 동네까지 찾아와 사람 개망신을 주고. 이런 인간한테 울다가 웃다가 하며 전화를 한 자신이 가장 미친 것 같았다.
미친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고였다. 제발 이런 미친 짓 좀 앞으로는 하지 말자고.
“확실하게 말할게. 우리 여기서 끝내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직 커피가 남아 있는 경수의 잔을 들었다.
“드라마에 보면 왜 이걸 붓는지 알겠어. 이 컵으로 니 머리를 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잖아.”
경수는 잔뜩 겁을 먹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송이는 컵을 들어 부어버리려는 시늉을 하다가 그냥 테이블에 컵을 내려두었다.
“자꾸 앞에 나타나고, 연락해서 내 인생에 태클 걸면 그땐 진짜 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