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다음에 또 체크하러 올게요. 애로사항은 제 쪽으로 말씀해주시면 돼요.”
“뭐? 아가씨 뭐라 그러는 거야?”
“고생 좀 해주세요.”
“이 아가씨가 뭘 잘못 먹었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그랑땡을 두고 먹느니 마느니 하던 여자가 별안간 사무적인 표정을 지으며 또박또박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진짜 정신이 어떻게 된 사람인가 의심스러웠다. 아니면 너무 취업이 안 돼서 진수 식품 직원 행세라도 하면서 아픔을 달래고 있는 건가. 요즘 젊은 사람들 취업이 그렇게 안 된다고 하던데.
어쩌다가. 쯧쯧.
아주머니는 자신도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 안타까운 마음도 들어 굽고 있던 동그랑땡을 모두 송이가 있는 쪽으로 밀어주었다.
“이거 먹어. 젊은 사람이 참….”
“조금만 더 수고해주세요.”
송이는 손에 들고 있던 초록색 이쑤시개를 종이컵 안으로 쏙 넣고는 미소를 지었다. 아주머니는 멀어지는 송이의 뒷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정신이 회까닥 돈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송이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지훈의 앞이었다.
“김지훈 씨, 여기서 보네.”
오늘 집에서 나오는 길에 제발 마주치지 않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건만 나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마주쳤다. 이제는 이 마트도 발길을 끊어야 하나. 근처에 대형마트라고는 여기밖에 없는데 어디를 뚫지. 어제는 비록 쪽팔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당당하게 굴었다. 이미 바닥을 보여 더 보일 밑바닥도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켜 복잡했지만 겉으로는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라도 올리고 있었다.
“그러게요. 여기서 보네요, 선배.”
참 희한하게 귀티가 난단 말이야. 옷도 대충 걸치고 나온 것 같은데 비싸 보이고. 기럭지도 길고 얼굴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허여멀건해서 그런지 부잣집 도련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 봤자 이 동네 살면 사정은 뻔할 텐데. 저 가짜 시계는 오늘도 차고 있네. 저놈의 허세는.
“동네가 참 좁아. 그쵸? 벌써 두 번이나 만나고. 장 보러 왔어요?”
“네, 보시다시피.”
송이는 흘금 지훈이 있는 카트를 훔쳐보았다. 생활 도구나 집기 같은 것이 몇몇 보였다. 그 외에 음식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트만 오면 90% 이상은 먹을 것을 담는 송이와는 너무도 달랐다.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더니 필요한 것들을 사러 왔나 보다.
“선배는 장 안 봐요?”
이번에는 지훈이 송이의 카트를 눈짓했다. 송이의 카트에는 1+1으로 묶인 대형 과자봉지 하나만 덜렁 들어 있었다. 재정을 생각하여 평소에 손이 가는 것들을 집었다가 내려두었더니 고른 게 달랑 과자 하나였다. 그 외의 시간은 시식을 하면서 보냈고.
“아, 장 봐야죠. 우리 제품 시식이 잘 되고 있는지 체크하다가 장도 잘 못 봤네. 시식 준비해주시는 분들이 아주 열심히 해주시네. 하하.”
송이는 큼지막한 봉지 두 개가 하나로 묶여 있는 광경이 민망하여 카트를 뒤로 슬쩍 빼서 몸으로 가렸다.
“아, 시식 체크?”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껏 비꼬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러더니 지훈의 시선이 송이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을 당하는 이 더러운 기분.
“마트는 주말에 사람이 많으니까 집 근처 마트는 이렇게 나와서 체크도 해봐요. 업무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죠.”
일어나서 세수만 대충 하고 슬리퍼를 찍찍 끌고 나온 차림으로 업무를 운운하고 있으니 아까 아줌마 앞에서 말을 내뱉을 때보다 더 민망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틈을 보일 수는 없었다. 연기는 뻔뻔하게 해야 들키지 않는다. 이렇게 나가기로 한 거 처음부터 끝까지 뻔뻔함으로 밀고 나가야 했다.
“너무 시식 체크에 몰두하신 거 아니에요? 마트에 왔으면 장을 보셔야지.”
“이제 보려던 참이었어요.”
아까부터 이어지던 지훈의 시선이 계속되었다. 왜 남의 몸을 이렇게 훑어대? 너무 추레하게 하고 나왔나? 머리 안 감은 거 티는 안 나겠지? 자신에 반해 지훈은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을 것처럼 깔끔해 보였다.
“시식 체크 한 거 맞아요? 위장 체크 하신 건 아니고?”
송이의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김지훈 씨, 무슨 소리예요?”
“농담이에요. 농담.”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냥 넘길 수도 있는 말인데, 그냥 농담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말인데, 상황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까 시식코너에서 아줌마와 실랑이를 하다가 마주친 지훈의 눈빛. 모든 걸 다 보고 있었다는 듯한 그의 표정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마, 지금까지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던 건 아니겠지. 그런 불안감에 송이는 괜히 더 찔렸다.
“내가 김지훈 씨하고 농담 따먹기나 할 만큼 한가해 보여요? 보던 장이나 계속 봐요.”
송이는 어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일단 후퇴하는 게 답이었다. 불리한 상황에서 계속 이 싸가지와 말을 섞어 봤자 상황만 악화될 뿐이었다. 이 남자를 본 게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남의 아픈 곳만 툭툭 찌르는 능력이 발군인 인간이었다.
갈 길을 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카트를 밀고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이 따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더 걸음을 재촉하여 빠르게 하는데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금요일에 술 많이 드시던데. 괜찮아요?”
누구 때문에 그날 술을 들이부었는데. 이게 병 주고 약 주나.
“왜 따라와요?”
“장 보고 있는 건데요.”
“그러면 먼저 가요.”
“어? 이거나 살까.”
지훈은 마침 살 것을 발견했다는 듯 그 자리에서 뭔가 집어 들더니 살펴보는 척을 하고 있었다.
“남이사 술에 취하든, 오바이트를 하든 뭔 상관이에요.”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걱정할 수 있잖아요. 가까운 사이 아닌가? 같은 동네 살고. 회사에서도 옆자리고.”
기가 찼다. 가까운 사이 같은 소리하네. 얘는 나를 놀려먹는 게 재밌는 건가.
“김지훈 씨.”
“네.”
“내가 만만해요? 이래 봬도 나 엄연히 김지훈 씨 회사 상사예요. 예의는 지켜요.”
“당연히 지켜야죠. 제 상사님이신데.”
“그러면 따라오지 말고 장이나 보고 가요.”
그 말에 지훈이 그 자리에서 멈추는 듯했다. 분위기를 잡고 정색했더니 좀 먹히기는 했나 보다. 어디서 사람을 만만하게 보고. 화를 낼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참아줬던 건데. 계속 참고 있으니 호구인 줄 알고 기어오른다. 이래서 고분고분하게 대해주면 안 된다.
“그런데….”
“그런데 또 뭐요?”
얘는 장이나 조용히 보고 갈 것이지 자꾸 말을 걸어. 나 같으면 회사 상사를 동네에서 마주치면 보고 싶지도 않을 것 같은데.
“진짜 고기를 그렇게 잘 구우세요?”
“네?”
“어제 최 대리님이 그랬잖아요. 선배 고기 진짜 잘 굽는다고.”
“그게 왜 궁금한데요?”
말은 퉁명스럽게 뱉고 있었지만 고기만큼은 누구보다 잘 구울 자신이 있는 송이는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어제는 기분이 별로여서 직접 굽지는 않았는데 실력 발휘 한번 해줘야 하나. 어제 엄마의 가게에서 그녀가 구워준 고기를 신나게 먹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돼지고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얼마나 잘 구우시면 그런가 싶어서요. 그런데 고기 잘 구워봤자 그게 그거 아니에요?”
고기 마스터인 송이에게는 지훈의 말이 도발처럼 들렸다. 어느 정도의 온도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들이는지, 언제 뒤집는지, 몇 번이나 뒤집는지, 불의 세기를 어떻게 하는지, 숯불의 원료는 무엇으로 하는지에 따라서 시시각각 맛이 변하는 게 고기였다. 같은 곳에서 떼어오는 고기라도 누구의 손을 타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졌다.
이 발언은 텍사스까지 고기 유학을 다녀온 송이에게는 고기를 무시하는 소리로 들렸다. 처음 장사를 할 때 새벽부터 일어나 외국에서 들여온 고기 굽는 기계에, 직접 구입한 특수 장작까지 넣고 온 정신을 기울여 고기를 굽던 때가 떠올랐다.
“그냥 해본 소리예요. 제가 입이 짧아서 그래요.”
“김지훈 씨가 고기를 잘 모르나 본데. 입이 길고, 짧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제대로 구운 고기가 얼마나 맛있는데.”
한껏 고기부심을 부리던 송이는 이 입이 짧다는 인간이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머금으며 고기가 맛있다고 제발 더 구워달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당장 불판과 집게가 앞에 없다는 게 통한의 한이 될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 인간은 어제 고기를 아주 개판으로 굽던데.
“원래 고기를 못 구워요? 어떻게 다 태워 먹어요 고기를.”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처음 구워본다고.”
“살면서 처음? 고기를?”
지훈은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이 먹고 고기 한번 안 구워봤다는 게 말이 되는가. 다섯 살 때부터 고기를 구워온 송이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곱게 자랐어요?”
“그건 아닌데, 보통 다른 사람이 구워줬어요.”
“그게 곱게 자란 건데.”
“아니라니까요.”
고기 한 번 손으로 구워보지 않은 인간이 곱게 자라지 않았다고 반박을 하니 어이가 없었다. 고기 하나 자기 손으로 구워본 적도 없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뻔했다. 이래서 개념이 없는 건가.
“그럼 어떻게 자랐….”
도대체 어떻게 자랐길래 그게 곱게 자란 게 아니냐고 물으려는데 지훈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송이를 향한 것이 아닌 뒤에 있는 뭔가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을 쳐다보다가 잠시 얼음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마주하기 싫은 사람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