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삭신이야….”
몸이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제는 광란의 밤이었다. 물론 고기를 굽는 송이를 제외하고는.
방학을 앞둔 젊은 청춘들은 그동안 속박당했던 자유를 만끽하고자 부어라 마셔라 하였다. 그들을 보며 당장이라도 생판 모르는 사람의 테이블에 합석하여 소주를 까고 쌈을 싸서 고기를 입에 넣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송이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
저기요! 여기요!
여기저기서 부르는 통에 그에 맞춰 송이의 집게도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신들린 듯이 고기를 구웠다. 어제 구운 돼지만 몇 마리는 되지 않을까.
나중에는 온몸이 기름기에 전 느낌이 들었다. 샤워를 해도 고기 냄새가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새벽 2시까지 마시던 손님 중에 한 명은 위장으로 밀어 넣은 음식들을 다 쏟아내는 통에 청소까지 하느라 평소보다 마감 시간이 더 늦어졌다. 이 짓을 얼마나 더 해야 엄마의 집을 날린 당사자로서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을지.
새벽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돌아와 두 번이나 샤워를 하면서 냄새를 없애고 바로 곯아떨어졌다. 오랜만에 술을 전혀 마시지 않고 알코올의 기운이 없는 상태로 완전 숙면을 취했다.
이곳저곳 쑤시는 몸뚱어리를 매만지다가 급격하게 허기가 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벌써 해는 중천이었고.
[한송이. 너 정말 나랑 이렇게 끝낼 거야?]
이 새끼는 아직도 이러고 있네.
핸드폰을 확인할 시간도 없었는데 확인해 보니 또 문자가 수십 통은 쌓여 있었다. 부재중도 꽤 되었다. 문자만 봐도 짜증이 확 일어나서 액정을 꺼버렸다.
우선 배부터 채워야겠는데… 배달을 시켜먹을까 하다가 이번 주에 지출이 꽤 컸음을 깨달았다. 지나와 만난 날에는 지나가 안주빨을 제대로 세우는 바람에 술값이 꽤 나왔고, 편의점에서 며칠 동안 먹을거리들을 샀다가 나자빠진 채로 널브러진 것들을 그대로 두고 왔다. 그날따라 다른 회사의 신제품이 많이 나와서 자신도 모르게 이것저것 담았다. 게다가 이번 달에는 회식 때 달리다가 취해서 택시도 몇 번 타고.
엄마는 이런 말을 달고 살았다.
’너보다 차라리 소를 키우는 게 낫겄다. 그게 싸게 먹히겠어.‘
부모님하고 같이 살 때는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는데 이제는 모든 식비를 스스로 감당해야 되니 그 의미를 뼛속 깊이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봐도 들어가는 돈이 굉장히 많은 몸뚱어리였다.
앞으로 한 달은 긴축재정에 들어가야 했다.
이럴 때는 마트의 시식 코너로 가서 배를 채우곤 했다. 마트에 가서 싸게 살 만한 것들만 골라서 장도 경제적으로 보고, 시식도 하고. 물론 시식은 배를 채운다기보다는 경쟁사의 제품을 직접 맛보기도 하고, 시식 제품이 제대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테스트도 하는 목적이라고 스스로 세뇌를 하면서 민망함을 달랬다.
마트로 가기 위해서 대강 씻고 옷을 걸치고 나왔다.
’15‘
엘리베이터에 찍혀 있는 15라는 숫자.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 갈 사람은 고시생 아니면 새로 온 남자뿐이었다.
지금 가면 있으려나. 그동안 고막을 괴롭힌 부분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해야 되나.
’돈 주더라고요.‘
뭐라고 했더니 돈으로 입막음을 했다는 은희의 말을 떠올리며 긴축한 재정에 조금이라도 보태볼까 하다가 그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아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층에 내려 밖으로 나오니 여름의 더운 열기가 훅 끼쳤다. 올여름은 또 어떻게 버티려나. 선선한 가을이나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걸어가는데 1층에 주차된 차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보였다.
“뭐지….”
차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송이가 보기에도 상당히 값이 나가 보였다. TV에서 부자 역할을 하는 남자 배우가 탈 만한 차 같은 느낌이랄까. 외제차가 간혹 주차되어 있는 건 본 적이 있었는데 이 차는 전혀 본 적이 없었다. 그 말은 최근에 새로 들어온 누군가가 이 차의 주인이라는 건데.
1502호.
순간적으로 위층이 떠올랐다. 최근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1502호였으니.
이 집의 보증금과 월세가 어느 정도인지 뻔히 아는데 이런 차를 끌고 다니다니. 가격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살고 있는 집보다 비쌀지도 몰랐다. 이런 차를 타는 사람이 이런 곳에서 사는 것도 참 모순적이었다.
’차는 남자의 자존심이야.‘
어느 작은 회사에 겨우 취직을 하여 얼마 전에 백수 꼬리표를 뗀 동생이 했던 말이었다. 취직을 하더니 제일 먼저 하려는 게 할부로 차를 뽑는 거였다. 그러다가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제대로 맞고 바로 생각을 접었다.
자존심 세우다가 집 기둥도 뽑겠네. 이런 걸 두고 카푸어라고 하는 건가.
“이놈의 동네는 뭐 이리 허세 부리는 인간이 많아.”
스스로 허세가 있다며 자기 객관화가 아주 잘 되던 어느 인간이 떠올랐다. 이 동네에 살고 있는 건 아는데 정확한 위치는 물어보지 못했다. 도로변의 편의점을 이용했으니 근방 500미터 안에는 살고 있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회사에서도 보기 싫은 그 싸가지를 사는 곳에서도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제발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아마 저 차의 주인도 은희에게 한 행동을 보면 상당히 싸가지가 없을 것이다.
“터가 안 좋은가.”
최근에 계약을 갱신해서 아직 2년은 더 살아야 되는데.
“에잇!”
저 차를 보고 있으니 괜히 김지훈이 생각나서 홧김에 근처에 있는 돌을 걷어차버렸다. 생각보다 세게 찼는지 돌은 데굴데굴 저 멀리 굴러갔다.
딱!
“헉!”
자그마한 돌멩이가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저 차에 부딪힌 건 아니겠지? 왜 이상하게 그쪽에서 소리가 난 것 같지. 조그만 돌멩이일 뿐인데 괜찮을 거야. 내가 일부러 찬 것도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외제차는 고치려면 수리비만 최소 수백은 들어간다는 동생의 말이 떠올랐다.
조심스레 차 쪽으로 걸어가 흘끔 살펴보았다. 너무 티 나게 보면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흠집이 전혀 없었다. 차가 아닌 다른 곳에서 부딪혀 난 소리라 생각을 하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니야.
송이는 아주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또 왔어?”
“네? 뭐가요?”
송이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시식 코너의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무고한 사람을 잡지 말라는 듯이.
“아가씨 아까 봤는데. 무슨 소리야.”
“아니에요. 다른 사람하고 착각하셨나 보죠.”
“맞아, 아가씨 맞는데 뭐. 얼굴 가리면 내가 모를 줄 알아?”
시식 코너를 한 바퀴 돌았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시식을 하는 음식이 적은 편이었다. 게다가 음료수 시식이 많아서 배를 채울 만한 것이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동그랑땡은 위장을 달래주기 아주 적합한 음식이었다.
제일 처음 동그랑땡을 찍고 다른 곳들을 갔다가 장도 보고 다시 와서 모를 줄 알았다. 아까는 사람들도 많았고, 중간에 끼어서 먹었는데. 하지만 아주머니는 시식 코너 내공이 상당한지 진상을 바로 알아봤다.
“아까도 많이 집어먹더만.”
“집어먹다뇨. 무슨 말씀을!”
“먹은 건 맞지?”
아주머니의 유도 심문에 제대로 넘어갔다. 송이는 낭패감이 어린 얼굴로 모기만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사실 진수 식품 본사 직원인데요. 저희 제품 시식은 잘 되고 있는지 점검하러 온 거예요.”
누가 봐도 아주 편하게 동네 마실 나온 차림으로 업무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을 하고 있었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민망했다. 그렇다고 아예 없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었다. 진짜 진수 식품 직원이 맞고, 배도 채울 겸 점검도 할 겸, 겸사겸사 하는 건 맞으니까.
“진수 식품 본사 직원이라고?”
“제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세요?”
“아가씨가 본사 직원이면 나는 거기 사장이야. 내가 시식을 얼마나 많이 해봤는지 알아? 주말에 그 차림으로 본사 직원이라고 하면서 동그랑땡 구울 때마다 쏙쏙 빼 먹으면 내가 믿어?”
일면 억울한 부분도 있었다. 주목적이 배를 채우는 거기는 하지만 진수 식품에 다니는 건 맞았으니까. 마트에 올 때는 사원증이라도 가져와야 하나. 어떻게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속에서 열이 올랐다.
“저 진짜 직원 맞아요. 사원증 가지고 올까요?”
“요즘 세상에 위조가 얼마나 쉬운데 무슨 사원증 가지고. 됐어. 하나 더 구워줄 테니까 먹어.”
송이는 세상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주머니와 대치하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며 잠깐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에 툭, 하고 뭔가 걸렸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텐데. 보통이라면 지나치고 말았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싸가지가 실실 쪼개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