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44)

15화

[일단 만나자]

[한송이 한 번만 만나자고]

[씨발 너무한 거 아니야? 우리 만난 게 몇 년인데 집에 회사 후배가 잠깐 들렀다고 사람을 병신 취급하고. 너 실수하는 거야]

[내가 잘못했어]

[방금 욕한 거 미안해. 너무 흥분해서]

[어제도 통화해서 설명했잖아]

[전화 좀 받아]

[받으라고!]

[안 받냐?]

…….

송이는 액정에 엄지를 대고 쓱쓱 문자메시지 내역을 넘겼다.

문자만 몇 통이야. 자그마치 수십 통을 보냈다. 답장도 없으니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기분일 텐데도 지치지도 않는지 꾸역꾸역 문자를 보냈다.

어제 전화를 받는 게 아니었는데.

한 달 전만 해도 미래를 생각하던 남자였는데… 이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더 개 같았다. 머릿속이 혼란하다. 그날 어린 여자와 함께 있는 현장을 봤을 때는 정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기분이었는데, 개 같은 새끼가 맞는데, 일주일이 지나니 왜 생각이 나는 거지.

‘남자복은 드럽게 없어.’

대학생 시절 친구와 함께 재미로 사주를 보러 갔다가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젊은 혈기에 미신이라고 치부했지만 서른을 목전에 두니 그 말이 점점 맞아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는 좀 작지만… 잠깐 어린 여자한테 홀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났던 남자들 중에서는 정상에 속했다. 다음에는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될까. 남자를 만날 수 있기는 할까. 이제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게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박경수 정도면 정착할 남자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뒤통수를 거하게 맞기 전에는.

집에 친구도 잘 안 들이는 놈이 여자를 들였다는 건 뻔했다.

“아악!”

딱! 소리와 함께 정수리 부근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엄마는 숟가락을 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늦게 왔으면 빨리빨리 움직일 생각을 해야지. 폰 안 넣어?”

숟가락으로 강타당한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윤 여사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엄마의 말은 이 집안에서 법으로 통했다.

“파 다듬고, 양파 까고, 겉절이 담그고. 할 일이 쌨구만. 니가 지금 폰질할 때야?”

웬만한 사고를 치지 않는 한 부장 앞에서도 고개를 쉽게 숙이지 않는 송이였지만 영숙 앞에서는 아주 길이 잘 들여진 한 마리의 강아지였다.

누가 보면 평일에 회사 일로 바쁜 딸을 주말까지 부려먹는 부모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송이가 엄마에게 바짝 엎드리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이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송이가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부터 시작이 된다. 그 당시에도 식당을 하던 영숙은 송이를 데리고 장을 보던 길이었다. 장사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급한 마음에 정신없이 장을 보다 보니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가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송이야! 한송이!’

송이를 애타게 부르며 시장바닥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니던 영숙의 눈에 자그마한 아이가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송이를 찾았다는 안도감보다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건지 의아함이 더 컸다.

낮에 술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돼지고기. 그 가게의 창을 통해 송이는 뚫어져라 고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오래 쓰고, 다시 쓰고, 또 쓰며 억척같이 살아온 영숙은 아이에게 너무 고기를 먹이지 않아서 저러나 싶었다.

그래서 그날은 큰맘 먹고 고기를 사서 집으로 갔다. 송이는 한 근이나 사간 고기를 야무지게 잘도 먹었다.

원래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먹성이 좋았는데 고기는 더 잘 먹었다. 그렇게 고기와 사랑에 빠진 이 작은 아이는 쑥쑥 자랐고, 좋은 대학까지 들어가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폭탄선언을 하였다.

‘텍사스를 다녀와야겠어.’

자다가 봉창도 이런 봉창이 없었다. 그 많은 곳 중에 하필이면 텍사스라니. 영숙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도시의 이름에 어안이 벙벙했다. 제 아빠를 닮아 특이한 구석은 있었지만, 가끔 정신 나간 것 같은 행동까지는 그러려니 했지만, 갑자기 휴학을 하더니 텍사스행을 선언했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이미 사둔 표를 내밀었다. 그 이유가 더 가관이었다.

‘텍사스가 바비큐의 성지거든.’

그길로 송이는 텍사스로 떠나 바비큐 덕후들이 꼭 방문한다는 곳에 가서 제대로 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날의 감동은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송이는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어머니, 투자해주세요. 제대로 해보고 싶어요.’

송이는 파워포인트로 50장이 넘는 분량을 준비하여 영숙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한국에서 정통 텍사스 바비큐를 판매해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말만 투자였지 이건 돈을 달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콩나물값도 아껴가며 돈을 모은 영숙이 쉽게 돈을 내줄 리는 없을 터. 송이는 급기야 동네에서 노점으로 텍사스식 바비큐를 직접 팔았다. 들어가는 재료비가 많이 들어 남는 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반응은 좋았다.

그 모습에 영숙은 설득을 당하게 되고, 인생에서 가장 후회할 선택을 하고 말았다.

송이는 영숙의 투자 아래 경기도 인근에 고깃집을 차렸다. 사람들은 가게로 몰렸고, 입소문까지 탔다. 자신감이 붙은 송이는 대출까지 땡겨 크게 장사를 벌였다가 무리한 확장으로 매장도 관리가 안 되고 고기의 맛도 자연스레 떨어지게 되어 순식간에 나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가게를 확장하느라 영숙의 돈이 꽤 많이 투입되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집안은 큰 타격을 받아 집을 팔고 이사까지 갔다.

길거리에 나앉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하마터면 영숙의 식당까지 넘어갈 뻔했다. 식당을 지켜낸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송이는 절망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먹는 것에 진심인 자신의 특기를 살려 식품 업계 대기업으로 취직했다. 지원자들 중에서도 이 나이에 장사를 했다가 대차게 말아먹은 이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을 테니 송이는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그때 남겨진 급한 빚은 영숙이 대출까지 받아 모두 처리해주었는데, 지금도 월급이 나오는 날마다 꼬박꼬박 영숙에게 일부 금액을 보내고 있었다. 회사에 입사하던 그 시기에 경수도 만나게 되었다.

양파를 까는데 매워서 눈물이 맺혔다. 이 가게에 앉아 양파만 까면 옛날 힘들었던 시절 생각도 나고, 눈이 맵기도 하고, 눈물이 안 맺히는 게 이상했다. 아직 서른도 안 되었는데 힘들었던 시절이라고 하면 이상할 테지만 그때는 이러다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너무 많이 까는 거 아니야?”

평소보다 양파가 몇 배는 더 되었다. 송이는 투덜거리면서도 계속 양파를 까나갔다.

“잔말 말고 까.”

영숙의 말에 송이는 군소리 없이 넵, 하고 양파를 까다가 고개를 들고 밖을 쳐다보았다. 밖으로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다니고 있었다. 아, 이번 주가 방학 시즌이라고 했지. 영숙이 지난주에 전화를 하여 이번 주말은 바쁘니 꼭 나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대학가에 위치해 있지만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약속 장소로 잡는 곳이었다. 거기에 기말이 끝난 대학생들이 방학을 앞두고 자유를 만끽할 시기이니 주말에는 사람이 미어터질 게 뻔했다.

<털보네 고기>는 수염이 잔뜩 난 송이의 아빠, 철민의 외모를 앞세워 상호를 바꿨다. 그래서 철민은 이 대학가에서는 유명인이 되었는데, 그런 철민보다 더 얼굴이 알려진 게 송이였다.

어릴 때부터 집에 있는 프라이팬에 고기를 직접 굽기 시작하여 텍사스 바비큐까지 섭렵한 송이에게 숯불에 굽는 삼겹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주 바쁠 때는 네 개의 테이블을 동시에 돌아다니며 굽고, 자르고, 뒤집기도 하였다. 그 손짓이 거의 신이 들린 듯하여 누군가 찍어 인터넷에서 사진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요즘 같은 시대였다면 인터넷 동영상으로 전 세계에 퍼졌을지도 몰랐다.

털보네는 고기가 아주 두꺼운 편이어서 겉만 타고 속은 잘 익지 않을 수도 있어 온도계를 이용하여 정확한 온도로 직원들이 고기를 구워주었는데 송이는 대충 불판 근처에 손만 가져가 보아도 온도를 감지하고 정확한 타이밍에 고기를 뒤집으며 구웠다. 다들 엄지를 올리기 일쑤였고, 그래서 그녀가 가끔 출몰한다는 토요일에는 더 손님이 붐볐다.

“아까 경수 왔어.”

송이는 팔을 들어 눈물이 맺힌 눈가를 닦다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얼굴로 영숙 쪽을 바라보았다.

“박경수?”

“그럼 니 남자친구가 박경수지. 김경수야?”

“걔가 여길 왜 와?”

“어떻게 바쁜 건 알아서 장 보는 거 도와주겠다고 왔더라. 딸년은 자빠져 자느라 전화도 안 받고 손도 모자라는데 잘됐다 싶었지. 얼마나 예뻐, 알아서 도우러 오고.”

아직 엄마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경수와 있었던 일을.

송이와 경수는 서로의 부모님을 종종 뵈었다. 양가에서는 직접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결혼을 할 거라 여기고 있었다.

“싸웠어?”

엄마는 정말 눈치가 귀신이었다. 말이 없이 양파만 까는 송이의 행태를 보며 둘 사이에 뭔가 있음을 바로 눈치챘다.

“왜 싸웠는데?”

“몰라.”

“바람피운 거나 도박하는 것만 아니면 넘어가. 서로 안 맞는 것도 있는 거지. 살아 보니까 경수 같은 남자 만나는 것도 쉬운 게 아니더라.”

안타깝게도 영숙이 말하는 그 두 개 중에 하나에 해당이 되었다. 지가 뭔데 남의 엄마 가게는 오고 난리야. 착한 척하는 게 더 짜증 났다.

“이번 달에 한번 집에 데리고 와. 밥이나 먹이게.”

“걔가 무슨 애야? 알아서 잘 먹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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