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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44)

13화

“음악만 깔면 거의 랩이던데. 상대 디스하는 랩 있잖아요. 티비에서 하는 오디션 한번 나가봐요. 인생 역전할 줄 어떻게 알아요.”

그걸 들었어? 또?

“왜 자꾸 남의 전화를 엿들어요. 스토커예요?”

“누가 크게 통화를 해서 들린 걸 스토커라고 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잡혀가게요.”

지훈 때문에 가려져 있어 그 건너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지훈이 슬쩍 몸을 돌리자 삼삼오오 모여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송이 쪽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바로 시선을 피했다.

아까는 아무도 없었는데.

송이는 경수에게 욕을 퍼부었을 때를 떠올렸다. 뇌는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있는 것들 중에 심한 말들만 골라서 입에게 발설을 하라 명령했을 것이다. 박경수를 최대한 디스하고 싶었으니까.

한 가지 다행이라는 건 회사 근처의 음식점이었지만 아는 얼굴이 없다는 것이었다.

“진지하게 고려해 봐요. 재능이 있던데.”

이게 또 슬슬 건드리네.

“비꽈요? 김지훈 씨도 디스 한번 해줘?”

“저는 사양할게요. 그런 욕 들으면 멘탈이 너덜거릴 것 같아서.”

송이의 집안은 대대로 혀가 발달한 유전자를 지녔다. 친가, 외가 모두 다. 그런 유전자가 결합되었으니 구강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발달하였다. 게다가 어린 시절 엄마가 식당을 하면서 진상을 대할 때마다 던지던 화려한 욕의 스킬을 그대로 흡수하며 조기교육까지 하였으니 여러 욕을 섭렵하였다.

“크게 사기라도 당하셨나. 욕이 너무 살벌하던데.”

사기라면 사기가 맞지. 연애도 어찌 보면 서로 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형성된 관계인데 그걸 단 한 번에 와르르 무너뜨렸으니. 서로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표출하는 유일한 관계임을 약속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거기에 제3자를 끌어들이고 말았으니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였다.

“됐고. 들어가죠. 너무 오래 자리 비우면 뭐라고 하겠네.”

누군가에게 하염없이 마음을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그러면 이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풀어질까. 하지만 또 박경수를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이 사람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싶지도 않았다.

“선배, 잠깐만요.”

담배를 한 모금만 더 피우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카드 놓고 갔더라고요. 선배 거 맞죠?”

응?

순간 시선이 그의 손으로 향했다. 불쑥 내민 지훈의 손에는 노란색 카드가 들려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카드였다. 저거… 혹시…?

“어제 카드 놓고 갔더라고요.”

어제? 카드?

“그렇게 급했어요? 카드도 두고 가고.”

“이걸 김지훈 씨가….”

“편의점에서 두고 갔잖아요.”

서랍장 가장 깊숙한 곳에 오랫동안 처박아 두어서 완전히 꼬여버린 목걸이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풀려고 해도 풀리지 않을 정도로 꼬여서 풀 엄두도 나지 않는.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갖다 버리거나 잘라버리고 싶은.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분명 서울에 산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제 거기 이 남자가 있었을 리가 없는데?

“받으세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10초도 넘게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몇 초 사이에 모든 게 엉망이 된 기분이었다.

“선배, 괜찮아요?”

송이의 귀에 지훈의 말이 메아리치듯 울렸다.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도 해봤다. 그러기에는 눈앞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카드가 편의점에 두고 온 줄도 몰랐다. 어제는 그냥 그 상황이 너무 쪽팔려서. 지훈이 자신을 알아본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 그 생각만 하다 보니 카드가 없어졌다는 걸 까맣게 몰랐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결제를 하든 모두 핸드폰으로 하니 카드가 없어졌다고 해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어젯밤에는 부딪힌 거구의 남자와 널브러진 구매품들과 나자빠진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과 결정적으로 뒤에서 걸어오고 있을 김지훈을 생각하면서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그깟 카드 한 장 없어진 게 티가 날 리 없었다.

“선배 거 아니에요? 그러면 편의점에 다시 돌려줘야 되나….”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다시 카드를 넣으려던 지훈이었다. 송이는 재빨리 지훈의 손에서 카드만 낚아챘다.

“내 거 맞아요.”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에 정신이 몽롱했다. 송이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어디서부터 물음을 던져야 할지 차분하게 생각을 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제… 거기 있었어요?”

“네.”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한 표정에 더 기가 찼다.

“집이 서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시간에 왜 거기 있었어요?”

아까 메시지로 집이 어디냐는 물음에 분명 서울이라고 답을 했다. 어느 동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서울에서 송이가 사는 곳까지는 최소한 차로 1시간도 넘게 걸릴 것이다. 그 늦은 시각에 서울에 사는 사람이 그 동네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훈은 의미 모를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전입신고를 아직 안 해서 주소는 서울인데 이제 곧 하려고요. 이번 주에 연자동으로 이사 갔거든요. 선배가 주소를 물어보는 줄 알고.”

깊은 덫에 빠진 기분이었다. 혹시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아침에 메시지를 보낼 때 ‘어제…’ 이러면서 괜히 불안감을 조성하게 만들고.

아니면… 설마…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걸 알고 내가 편의점에 있을 때 일부러 전화 통화를 하는 척하면서 들어왔나? 이건 너무 말이 안 되나. 사람이 너무 당황을 하게 되자 별생각이 다 들었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은 일이 막상 벌어지니 혼란스러워 이성을 다잡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자꾸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현실을 부정하려고 애를 썼다. 김지훈이라는 놈은 일부러 나에게 접근을 하여 엿을 먹이려고 하는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출근한 지 이틀 된 신입 직원과 이런 일로 대화를 나눌 일이 있을 리가 없다고 하면서.

“연자동으로 김지훈 씨가 이사를 왔고, 그래서 어제 거기 있었다고요….”

송이는 혼잣말처럼 되뇌다가 의문이 드는 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편의점 직원이 남의 카드를 그냥 막 줬어요?”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카드의 주인을 뻔히 알고 있을 알바생이 지훈에게 그냥 카드를 건네줬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막 주지는 않죠.”

“그럼요?”

“선배 이름을 대고 같은 회사 선배라고 하면서 카드 전해주겠다고 하니까 카드에 새겨진 이름을 확인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름은 일치하니까 그 알바생도 줄 것같이 하다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지 잠깐 망설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뭐라고 했는데요?”

“회사 일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가끔 이상 행동을 하신다고. 당황하셨겠지만 이해해달라고. 표정도 슬프게 지었더니 주더라고요. 계산한 것들은 알바생한테 먹으라고 하니 아주 좋아하던데요.”

“…….”

“선배 어차피 쪽팔려서 당분간은 그 편의점 다시 가지도 못하잖아요. 카드도 재발급 받으려면 귀찮을 텐데. 그래서 제가 받아서 가지고 왔어요.”

저 잘했죠? 라고 말하는 듯한 저 얼굴을 어찌하면 좋을까. 졸지에 이상 행동하는 사람을 만들어 놓고는 그걸 또 아주 당당하게 말을 한다.

그때 옥상에서 그 통화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 저 남자가 없었더라면. 편의점에서 알은척을 했더라면.

어디부터 어떻게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이 나비효과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비효과로 인하여 개 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뿐.

카드를 받아서 가져다 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네가 왜 남의 카드를 받아 가지고 왔냐고 따져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왜 남의 일에 그렇게 오지랖이냐고 뭐라고 할까. 저 생글생글 웃는 낯에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

“어제 많이 당황하셨나 봐요.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이성을 잃기도 하잖아요. 갑자기 넘어지면 쪽팔리고 그러니까. 도망가고 싶을 수도 있겠죠.”

팩트이기는 한데 조곤조곤 읊조리니 더 재수가 없었다. 정말 쪽팔린 흑역사였다. 얼마나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까. 자기가 샀던 것들을 내팽개치고 갑자기 편의점을 뛰쳐나가는 사람이라니.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일 것이다. 쪽팔림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이게 무슨 개쪽인가.

“…어제는 사정이 있었어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지가 뭔데 괜찮고 안 괜찮고 할 게 있어. 괜찮다고 하니 괜히 더 짜증이 났다. 관대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눈 감아 줄게, 라는 듯이 저 거만한 표정.

“혹시 어제 제가 편의점에서 통화하는 거 들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들었다.

‘꼰대 천지야. 그리고 골 때리는 애도 하나 있고.’

명백히 자신을 디스하는 그 음성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답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을 들었다는 건 지훈이 존재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면서 알은척을 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니까.

“못 들으셨으면 다행이고요.”

자기 혼자 질문을 하고, 자기 혼자 결론을 내리고는 피식 웃었다. 뭐가 다행이라는 건데.

“후우….”

마지막으로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쪽팔림과 짜증,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속에서 얽히고설켜 그녀를 점점 옥죄어 왔다.

또 술이 땡겼다. 이 모든 걸 다 잊게 해 줄 술이.

“그런데 선배 되게….”

우르르쾅쾅!

지훈이 뭐라고 말을 내뱉는 사이에 갑자기 천둥이 쳤다. 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버릴 것처럼 어마어마한 소리였다.

엄마얏!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데 옆에서는 지훈이 미동도 없이 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에 뭐라고 했어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물었다.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천둥 소리에 묻혀 알아듣지 못했다.

“못 들었으면 됐어요. 들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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