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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44)

12화

식당에 들어올 때만 해도 후덥지근하기만 하던 날씨였는데 어느새 하늘에서는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올해는 장마가 늦어진다고 하면서 비가 별로 내리지 않았는데 그동안 모아둔 비라도 모두 쏟아내려는지 쉴 새 없이 내렸다.

빗물이 바닥에 닿으며 마찰하는 소리가 세상을 빼곡하게 메웠다. 그 소리는 수화기 너머까지 침범을 하여 대화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뭐라는 거야, 안 들려.”

빗소리와 대화 소리가 자꾸 섞였다. 그 와중에도 상대의 목소리가 상당히 듣기 싫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일단 만나자고. 만나서 이야기하자니까.

“우리가 만나서 뭔 이야기를 해. 이 양심도 없는 새끼가.”

-내가 양심이 있는 새끼인지 아닌지는 들어보면 알 거 아니야.

“너 자꾸 구질구질하게 왜 이래. 나랑 다시 만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오해라고. 내가 다 설명한다니까?

“내가 만만하냐, 이 새끼야?”

송이는 터져 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그 이후로 욕을 마구 퍼부었다. 취기는 올라오고, 비는 내리고, 화는 나고, 바람을 피운 이 인간은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하소연을 하고. 모든 게 개 같은 날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그냥 다 내뱉었다. 뭐라고 하는지도 몰랐다.

진태호가 보너스를 받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부터 급격하게 솟구친 분노는 술을 불렀고, 오늘도 어김없이 화를 술로 다스렸다.

다스려보려고는 했지만 술을 마실수록 진태호의 얍삽한 얼굴이 떠올라 분노에 더 불을 지폈다. 더군다나 고기를 처음 구워본다는 신입은 돼지고기를 다 태워먹었다. 보다 못한 진만이 집게를 집어들고 대신 고기를 구웠다. 자신의 앞에서 고기를 태워먹었다는 것 자체도 화를 불렀다. 송이의 고기 인생에 처음 있는 불상사였다.

술을 마시다가 답답해서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비가 억수로 내리고 있었다. 가게 입구 근처에 앉아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니 더 울적해졌다. 공교롭게도 그 타이밍에 박경수에게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연락도 없다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지난주부터 계속 전화가 왔다. 지금까지 계속 씹고 있었지만 오늘은 홧김에 전화를 받고 말았다.

“니가 이렇게 전화하면 내가 우리 경수하고 옛정도 있으니 다시 만나야겠구나, 이럴 줄 알았냐. 이 미친놈아.”

박경수가 집에 다른 여자를 들였다는 걸 알았을 때는 단칼에 인연을 끊어버리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3년이 넘게 만나왔던 인연을 한 번에 잘라내기는 참으로 쉽지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불쑥불쑥 과거가 떠오르곤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인지 송이 자신도 몰랐다. 연락이라도 안 했으면 그냥 끊겼을 인연일 텐데 박경수는 지겹게도 연락을 해댔다. 그 여자하고 잘 안 된 건지, 아니면 생각해 보니 송이만 한 여자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별것들이 다 지랄이었다.

“너 우리 집에 찾아오기만 해. 진짜 죽여버릴 수도 있어.”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지금도 제정신이 아닌데 더 통화를 하다가는 무슨 말까지 나올지 몰랐다.

담배 피우고 싶다. 대학교를 들어와서 잠깐 피우다 끊은 담배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피우고 싶은지 몰랐다. 이래서 사람이 담배를 피우나. 한 대만 피우면 머릿속에 복잡한 상념들을 다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거짓말처럼 눈앞에 담배가 보였다. 누군가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 한 개비가.

옆을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송이와 같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담배 피우고 싶어 하는 얼굴이길래.”

얼른 안 받고 뭐 하냐는 듯이 담배를 든 손을 흔들었다. 송이는 얼결에 담배를 받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지포라이터를 내밀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의 불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빨갛게 타오르는 담배 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번처럼 한 모금만 빨 거면 피우지 말든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길게 한 모금을 빨았다가 내뱉었다. 담배 연기가 몸속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가 나가는 기분이 들자 머리가 살짝 띵했다. 오늘은 담배도 달았다. 술도 달고, 담배도 달고.

다시 한번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짙은 연기가 빗속에 섞여 들어가자 순식간에 흩어져 존재를 감췄다. 더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으니 다시 비 내리는 소리만 들렸다.

“왜 나왔어요?”

“개 같아서요.”

지훈도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송이와 마찬가지로 연기를 내뿜는데 고놈 참 담배를 맛있게 피웠다.

“뭐가?”

“그냥 다.”

“또 말을 까.”

“선배도 깠잖아요.”

“난 선배니까.”

자신도 모르는 꼰대력이 숨어 있었나. 신입이라고 해서 말을 까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오늘은 취하니 그냥 말이 막 나온다.

“그래서 뭐가 개 같은데?”

“오늘 신입 환영회인데 한마디 하라고 그러잖아요. 조 부장 새끼가.”

입사 15년 차인 부장한테 입사 이틀째인 인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새끼’를 붙였다. 참 특이한 새끼였다.

“그딴 거 진짜 싫어하거든요. 안 하려고 가만히 있는데 진태호 대리가 자꾸 인상 쓰면서 뭐하냐고 눈치 주잖아요. 짜증 나서 그냥 확 일어나서 그랬죠.”

“뭐라고?”

“저도 진태호 대리님처럼 부장님한테 사랑 받는 직원이 되고 싶습니다.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

“그랬더니 분위기도 싸해지고 좋던데요.”

송이는 큭큭 거리면서 웃음이 나왔다. 이런 또라이가 다 있나. 신입 환영회에서 누가 팀장한테 저딴 소리를 할 수 있을까.

“환영회 이딴 건 왜 하는 거예요, 대체. 그런데 선배, 진태호 때문에 빡친 거 맞죠?”

이제는 아예 ‘대리’라는 직책도 빼고 진태호의 이름을 막 불렀다. 송이는 딱히 그걸로 뭐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재수 없는 새끼 이름을 어떻게 부르든 무슨 상관일까.

“누구 때문에 빡치든 그게 김지훈 씨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송이는 말해봤자 이 인간이 해결해줄 것도 아니고, 신입한테 이런 말을 해서 무얼 할까 싶었다.

“저도 진태호 싫거든요. 저런 인간은 별로.”

“어떤 인간인데요?”

“배신을 해서 한 자리 차지했다가 다시 배신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요리조리 붙어먹다가 나중에 목이 댕강 잘려서 삼족이 멸문당하는 그런 쥐새끼 같은… 간신배?”

맞는 말이기는 하다. 승진만 할 수 있다면 당장 조 부장이라도 배신할 수 있는 게 진태호라는 인간이었다. 지금까지 봐온 바로는 그랬다.

“진태호를 얼마나 봤다고?”

“조 부장하고 짝짜꿍 맞는 거 보면 답 나오잖아요.”

은근히 눈썰미가 있네. 이틀 만에 진태호가 간신배라는 것도 알아채고.

“만약 사장이었으면 조 부장이나 진태호 같은 인간들부터 다 잘랐을 텐데. 회사에 막 피바람이 부는 거죠. 회사에 암 같은 인간들은 가차 없이 그냥.”

댕강.

지훈은 ‘댕강’이라는 글자에 힘을 주어 소리를 내며 손끝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더니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히죽거렸다.

“재미있지 않아요? 그런 상상해 보면. 다들 이런 상상 해보지 않나?”

퍽도 재미있다. 누가 그런 상상을 하나. 상사가 개 같으면 때려치울 생각부터 하지. 무슨 사장이 되어서 자른다는 생각을 누가 하나. 사장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김지훈 씨나 하는 것 같은데. 그런 상상.”

“상상하는 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저는 진짜 그렇게 할 거예요. 사장 되면.”

그래. 사장 되면 그렇게 해라. 니 맘대로 하든가 말든가. 되고 나서 말하든가.

“그런데 사장 같은 건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아서.”

“누가 시켜주기나 한대요.”

“저는 시켜줘도 할 생각이 없어서요.”

이 인간의 정신세계가 궁금했다. 대체 저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걸까. 사람은 생각이라는 걸 하고 필터를 거쳐서 말을 할 텐데 그냥 멋대로 내뱉는 건가. 누가 너한테 사장을 시켜준대니. 니가 사장이 된다면 내가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해서라도 깽판을 놓는다, 인간아.

“그래요. 누가 시켜준다고 해도 꼭 하지 말아요.”

“그런데 조 부장이나 진태호 같은 인간들 자르려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이 인간이 어쩌라는 거야. 회사는 다니기 싫은 표정으로 옥상에서 담배나 피우면서 지각이나 하던 게 사장은 되고 싶은 건지.

말꼬리를 잡다가는 계속 똑같은 말만 반복할 것 같았다. 얘도 취했나. 술도 많이 안 마시는 것 같던데. 원래 사람이 취하면 가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이 인간은 원래부터 개념이 없으니 더 그럴지도 모르고.

“선배.”

지훈이 조금 전과 다르게 낮은 음성으로 송이를 불렀다. 불길하게 왜 분위기는 잡고 그러는 건데.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불안한 기색으로 그를 보는데 그의 입이 열렸다.

“욕을 원래 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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