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화들짝 놀라 절로 음성이 높아졌다. 평소에도 목소리가 큰 편인 송이가 목소리를 키우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모였다.
민망함에 송이는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질을 하는 척했다. 그러자 다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저마다 떠들기 바빴다.
“이게 무슨 삼천이나 해요?”
송이는 노골적으로 지훈의 손목을 보며 진만을 다그치듯 말했다. 지훈은 같잖다는 듯한 시선으로 응수하고 있었다.
니가 이런 걸 차 봤어야 알지.
이런 눈빛이랄까. 겉만 번지르르해 보이지 저 재수 없는 면상.
“저기 어디 동대문에 있는 풍물시장 가면 비슷한 거 5만 원만 주면 사겠구만.”
풉.
지훈은 비웃음을 가득 품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는다는 듯이 입을 가렸다. 부끄러움은 진만의 몫인 듯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송이, 5만 원이라니 참… 왜 내 얼굴이 화끈거리냐.”
“김지훈 씨, 진짜 그 시계가 삼천이나 돼?”
사회 초년생이 무슨 자기 연봉만 한 시계를 손에 두르고 다니는 게 말이나 되는가. 금수저라도 되나. 하물며 금수저라고 해도 회사에 저런 걸 차고 오는 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삼천 넘어요.”
뭐?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하는 지훈의 얼굴에는 상당한 권태감이 서려 있었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서민들’이라는 시건방진 말을 당장이라도 내뱉을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오천이었나.”
미친… 누구는 보증금 이천이 없어서 겨우 대출 땡기고 월세도 올려서 살고 있는 마당에 시계 하나에 오천?
“김지훈 씨, 내가 모른다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 막 지르는 거 아니야?”
“진짜 막 지를 생각이었으면 몇억 불렀죠. 무슨 오천 갖고.”
송이는 그 말을 하던 순간 지훈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이 세계의 절대 강자가 한낱 미물을 보는 듯한 깔보는 시선.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자료를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던 김명준 상무도 이런 개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대리님, 이 말 진짜예요?”
송이는 진만에게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는 듯이 SOS를 청했다. 하지만 진만의 고개는 속절없이 위아래로 끄덕이고 있었다.
“진짜 비싼 건 몇억도 한다고 듣기는 했는데. 말로만 들어봤지….”
진만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하면서도 계속 지훈의 시계를 힐끔거렸다. 눈앞에 보물이라도 두고 쳐다보는 것처럼 신기한 눈빛으로.
“보고 싶으면 보세요.”
지훈은 시계를 벗더니 아무렇지 않게 진만에게 휙 건넸다. 진만은 화들짝 놀라며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갓난아이라도 보살피듯 조심스레 손으로 받아들었다.
정말 저게 오천이라면 저렇게 막 던지듯 해도 되는 거야? 부족했던 전세 보증금이 생각하면서 저 시계 하나에 집 한 채가 왔다 갔다 하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저기….”
진만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한번 차 봐도 돼…?”
진만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왕에게 해서는 안 될 청을 하는 신하처럼 간곡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지훈은 손짓을 하며 얼마든지 차보라는 듯이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저게 그렇게 비싼 거라면 오천 앞에서 저렇게 쿨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가.
“고마워.”
어제 들어온 신입한테 저렇게 한없이 비굴해질 수도 있을까. 그깟 시계가 뭐라고. 진만은 두툼한 손에 억지로 시계를 채워보려다가 포기하고 손목에 걸쳐두기만 했다.
찰칵. 찰칵.
핸드폰으로 사진을 몇 번이나 찍더니 신기하다는 듯이 몇 번이고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아주 아쉬운 표정으로 지훈에게 시계를 건넸다.
지훈은 시계를 받자마자 손목에 딱 들어맞게 찼다. 조금 전에 진만이 찼을 때와 비교해보면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왜 지훈이 찰 때는 찰랑거리는 금빛이 분위기가 있어 보이고, 왜 진만의 손목에 올렸을 때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게 금빛 시계를 두른 졸부 느낌이 나는 걸까.
송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훈의 눈빛에 가스라이팅이라도 당한 것처럼 저 시계가 비쌀 거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었다.
“김지훈 씨, …집이 좀 사나?”
진만이 조심스레 물었다. 송이도 궁금하던 차였다. 집이 어느 정도 살지 않는 한 저런 걸 차고 다니는 게 말이 안 될 테니까.
“이거 가짜예요.”
“어?”
“가짜라고요.”
진만은 조금 전만 해도 지훈을 향해 한없이 온화한 미소를 짓다가 순간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표정이 썩은 건 송이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이걸 어떻게 사요. 월급도 뻔한데.”
“아까는 오천이라며?”
“그건 진짜가 오천이라는 거죠. 이건 이백도 안 해요.”
진만의 고개가 연신 갸웃거렸다.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요즘엔 가짜도 정말 잘 만들어요. 그러니까 차고 다니죠. 어설프게 만들었으면 쪽팔리게 어떻게 차고 다녀요.”
그 쪽팔린 짓을 자기 입으로 실토해놓고 쪽팔리게 왜 차고 다니냐니? 저거 생각머리라는 게 있는 건가.
진만은 아무리 봐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아직도 저걸 차봤을 때의 감촉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거 어디서 샀어? 나도 하나 사게.”
“어디였더라… 저도 친구가 알려준 거라서. 나중에 친구한테 물어보고 알려드릴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쳐다보는 것도 조심스럽게 흘금거리던 진만이 가짜라는 소리에 지훈의 손목을 붙들고 와락 당겨 시계를 다시 꼼꼼히 살펴보았다.
“진짜 감쪽같네. 이게 가짜라고?”
“육안으로는 구별 못 해요. 전문가 아니고서는.”
“그래도 그렇지 참… 그런데 이 친구 허세가 좀 있구만.”
“네, 맞아요. 제가 허세가 있어요.”
허, 진짜 골 때리는 인간이네. 지 입으로 허세가 있단다.
순순히 허세가 있다고 실토하는 인간이나, 가짜 시계를 두고 어디에서 파는지 알려달라고 하는 인간이나.
쯧쯧쯧.
둘 다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중에서도 지훈 쪽이 더 송이의 스타일과 멀었다.
저렇게 가짜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 남들 앞에서는 있는 척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저 마음 안은 얼마나 황량할지. 저렇게 삐딱한 성격이 형성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마음을 제대로 된 것들로 채울 생각을 하지 않고 허세로 채우고 있으니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었을 리가 있나.
요즘엔 사람들이 명품으로 몸을 두르며 돋보이려고 안달이라던데, 저건 진짜 명품도 아니고 그 명품을 흉내 낸 가짜에 불과했다. 가짜로 자위를 하며 뿌듯해했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기도 했다.
첫날부터 옥상에서 담배나 피우며 지각을 하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왜 사무실에 들어가야 하느냐고 반문을 하던 것도 저런 인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처음에 사무실로 뺀질거리며 들어올 때부터 알아봤다. 하필 이런 인간이 왜 자신의 밑으로 들어왔는지. 하늘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저런 인간이 악명 높은 진수 식품의 공채를 뚫고 들어왔단 말인가. 이건 인사과에 정식으로 항의를 해야 되는 일일지도 몰랐다. 누가 대리 면접이라도 봤나. 이 회사의 인사시스템에 아주 치명적인 결함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친구 참, 솔직해. 좋은 정보 있으면 나누자고.”
진만은 그렇게 뒤통수를 맞고도 뭐가 좋은지 바보같이 웃으며 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더니 접시에 담긴 고기를 가리켰다.
“배고파 죽겠다. 고기나 굽자, 한 쉐프.”
진만은 아주 자연스럽게 고기가 든 접시를 송이의 앞에 가져다 주고는 집게와 가위까지 건네주었다.
“내가 왜 고기 먹을 때는 한송이 옆에 붙어 있는지 알아?”
진만의 물음에 지훈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진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송이만큼 고기를 잘 굽는 사람을 못 봤거든. 돼지고기가 덜 익히면 그 질기고 짜증 나는 기분 알지? 과하게 구우면 타서 딱딱해지고 맛도 없어요. 그런데 그 중간에 부드럽게 씹히면서도 속까지 잘 익은 지점을 귀신같이 안다니까.”
“…그러시구나.”
진만은 신이 나서 열변을 토하다가 지훈의 떨떠름한 반응에 더 열의가 피어오르는지 말을 이었다.
“진짜야. 한송이가 돼지고기는 마스터라니까? 한송이, 오늘 실력 발휘 한번….”
그때, 옆의 테이블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부장님! 사랑합니다!”
벌써 얼굴이 벌게진 태호가 조 부장과 팔을 교차하여 소주잔을 들고 러브샷을 하고 있었다. 술이 약한 태호는 몇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져 술을 잘 마시지 않았는데 오늘은 아주 기분이 좋으신지 러브샷까지 하고 난리였다.
송이는 부글대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지그시 입을 악물었다.
“하지만 오늘은 신입 환영회니까 김지훈 씨가 한번 구워보는 걸로. 한송이 앞에서 고기를 구울 수 있다는 건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야.”
진만은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전환해보려고 했지만 송이의 울분에 찬 눈동자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지훈은 집게를 들고 지훈이 어색한 포즈로 고기를 들어 불판 위에 올리며 말했다.
“뭐가?”
진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치이이이이익.
뜨거운 열기에 고기가 익는 소리가 났다.
“처음 구워보는 거라서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