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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44)

10화

금요일 저녁이어서 그런지 넓은 가게는 퇴근을 한 직장인들로 바글바글했다. 저마다 일주일의 노곤함을 푸는 시간인지라 표정들이 밝았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회식을 온 듯한 몇몇 팀의 사람들은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한 주의 마무리로 회식이라… 퇴근을 해도 아직 회사에 있는 듯한 이 기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왔는데 뒤가 찝찝한 느낌이랄까.

“이모, 여기 돼지로 열다섯 개! 왜 이렇게 더워? 에어컨도 온도 좀 낮춰줘요.”

진만은 특유의 복식 화법으로 저 멀리 있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주문을 날려주었다. 이모는 쳐다보지도 않고 시크하게 팔만 들어 손가락으로 ok 표시를 하며 접수했음을 알렸다.

여름이 시작된 6월의 열기와 실내에 가득한 사람들의 온기까지 더해져 식당은 후끈했다. 곧이어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얼굴을 찰싹 때리고 지나가 냉기가 잠시 몸을 감쌌다.

“우리 신입은 술 좀 하나?”

“남들만큼은 마십니다.”

“오… 좀 하나 본데. 처음이니까 그럼 우선 가볍게.”

진만은 주문을 받느라 정신없는 주인을 대신하여 냉장고에서 맥주와 소주를 잔뜩 가져왔다. 누가 보면 이 가게 종업원이라도 되는 줄 알 만큼 자연스러웠다. 마케팅 3팀 직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술을 나눠준 후 바로 라이터로 맥주 뚜껑을 따고 지훈의 잔에 가득 따라주었다.

“어이, 한송이.”

진만은 맥주를 따라주려다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송이를 불렀다. 하지만 송이는 잔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노려보는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만이 슬쩍 그 시선을 따라가보았다. 그곳에는 조 부장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태호가 있었다. 하하호호 하며 분위기가 아주 좋아 보이는 두 사람과 송이의 싸늘한 표정이 아주 대비되었다.

진만은 다시 송이를 부르려다가 그만두고 말없이 잔에 맥주를 따랐다. 송이가 오늘 저기압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날은 웬만하면 건들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금방 따라 기포가 아직 더 걷히지도 않은 잔을 들고 송이는 바로 원샷을 했다. 입가의 맥주를 닦으면서도 계속 시선을 떼지 않던 송이는 테이블 위에 잔을 탁, 놓았다.

왜 이렇게 맥주가 달아.

첫 잔이 달면 그날은 어김없이 집에 네발로 기어서 들어갔다. 술만 보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위장과 필요 이상으로 해독 능력이 좋은 간땡이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오늘은 맥주에서 끝을 봐야 했다. 소주로 넘어가는 순간 이틀 전 부장의 가발을 벗겨버렸던 것처럼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한 대리가 요즘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가 많아. 우리 한 대리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묘한 분위기가 흐르자 진만이 괜히 멋쩍어 지훈에게 말을 붙였다. 지훈은 송이의 썩은 표정과 송이의 눈치를 보는 진만의 얼굴을 보며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을 하려는 듯했다.

송이는 오늘 업무를 하던 중, 바람이나 쐬러 옥상에 올라갔다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알아챘다. 다름 아닌 진만이 담배를 피우며 다른 부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만은 집중해서 이야기를 하느라 송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송이는 그저 잡담이나 하겠거니 하면서 무시하고 벤치에 가서 쉬려고 했는데 자신의 이름을 호명되는 걸 들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귀를 기울여보았다.

‘우리 부서 한송이라고 알지? 이번에 개고생했는데 죽 쒀서 개줬다.’

송이는 진만이 보이지 않도록 몸을 숨기고 더 가까이 다가가 귀를 쫑긋 세웠다.

‘동기놈은 이번에 보너스 받았는데 알면 얼마나 열 받겠어.’

보너스라니? 전혀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진태호만 보너스를 받았다고?

사실 관계를 제대로 따져야겠다는 생각에 진만이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옥상에서 내려갈 때 그를 붙잡았다.

‘진태호 이번에 보너스 받았어요?’

진만은 아주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어버버거렸다. 송이가 계속 추궁하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받았다고 그러더라고… 나도 들은 건데… 참고로 나도 못 받았어!’

진만 또한 보너스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상황을 보니 진태호만 보너스를 받은 것 같았다. 오전에 임원이 한 명 내려와 조 부장의 방으로 들어갔다. 조 부장은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웃음을 지으며 방에서 나오더니 태호를 향해 손짓을 했다. 태호는 옷매무새를 다듬더니 조 부장과 함께 조 부장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조 부장과 진태호는 돌아가는 임원을 향해 고개가 바닥에 닿도록 숙였다.

그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송이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진만의 말대로 정말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뒤에서 궂은일은 송이가 다 준비했는데 공을 조 부장과 진태호가 가로채 간 기분이었다.

‘열심히 한다고 사회생활 잘하는 거 아니야. 요령 있게 해야지.’

거들먹거리며 말을 하던 태호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잠시 기억에 잠겨 있던 송이는 현실로 돌아와 한 잔을 순식간에 다시 털어 넣어 버렸다.

진만은 자리에 앉아 있기가 민망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나오지 않은 고기를 가지러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마셔요. 선배.”

이번에는 지훈이 송이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빠르게 잔을 채워가던 맥주는 거품이 일더니 순식간에 넘칠 기세였다. 송이는 다급하게 거품을 입으로 흡입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앞에서 피식 웃고 있는 지훈을 보며 입가를 닦았다.

이 새끼 일부러 이런 건가.

거품이 생기지 않도록 맥주를 기술적으로 따르는 진만과 달리 잔에 맥주를 콸콸 따르는 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요, 여기.”

지훈은 검지로 입가를 톡톡 가리켰다.

저게 뭔 소리지.

송이가 왜 저러는지 몰라 가만히 있는데 지훈이 다시금 입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묻었다고요.”

송이가 황급히 입에 손을 갖다 댔다. 여긴가? 대충 손으로 쓱쓱 문지르는데 앞에 있는 지훈이 고개를 설렁설렁 저어댔다.

“아니, 거기 말고.”

지훈의 말에 송이의 손을 갈 곳을 잃고 입가를 계속 방황했다. 여긴가? 아니면 여기? 대충 크게 쓱 훑었는데도 지훈의 고개를 연신 저어대기만 했다.

“조금만 옆으로. 조금만 더. 더….”

“여기?”

“아니, 왼쪽으로 더.”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장난하나.

“도대체 어디 묻었다는 거예요?”

입 주변은 한 번씩 다 훑은 것 같은데 계속 묻었다고 하니 짜증이 나서 버럭했다. 다행히 식당 안은 사람들의 대화 소리로 시끄러워서 같은 팀의 다른 직원들은 각자 대화를 하기 바빴다.

“여기.”

지훈이 엉덩이를 살짝 떼고 앞으로 쑥 다가오더니 송이의 왼쪽 입술 위를 슥 훑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송이가 잠시 굳었다. 그의 손이 입술에 닿는 감각이 아주 선연했다. 이게 왜 이래?

“이제 됐어요.”

뭐가 됐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훈은 티슈를 하나 뽑더니 송이의 입술을 문지른 엄지를 슥슥 닦았다. 정말 입술에 뭐가 묻기는 한 건가? 저 인간이라면 저를 놀리려고 일부러 저럴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이미 휴지로 손을 닦아 증거를 인멸해버리니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돌발상황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냥 말로 하면 되지. 뭐 하는 거예요?”

“선배가 잘 못 알아 들으니까 그러죠. 선배 입술에 거품이 묻어 있는데 그냥 둬요?”

뭐 이런 뻔뻔한 인간이 다 있지. 남의 입을 스스럼없이 만져놓고서 저렇게나 당당하다. 그리고 저놈의 선배 소리.

“그냥 둬요. 알아서 마르겠죠.”

“알았어요. 앞으로는 그럴게요. 거품 좀 닦아준 것 갖고.”

거품 좀 닦아준 것 갖고? 다 큰 처녀의 입술을 멋대로 만져놓고서 뻔뻔한 것 좀 보게나. 일부러 저런 거 아니야? 저 또라이라면 충분히 의도적으로 이런 짓거리를 할 법했다.

“두 사람 벌써 친해졌어? 오손도손 이야기가 끊이질 않네.”

진만의 등장에 둘 사이에 말이 끊겼다. 그는 직접 가져온 고기를 각 테이블에 나눠주고는 자리로 돌아와 지훈의 어깨에 손을 척 올리며 물었다.

“무슨 얘기 했는데?”

“업무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 한 대리님한테 여쭤봤어요.”

“여기까지 와서 일 얘기를 하고 그래. 술 마실 시간도 부족한데.”

어쭈. 저것 봐라? 업무 관련? 그냥 대놓고 구라를 치네.

뭐 하는 짓이냐는 듯 눈빛을 쏴주니 지훈은 컵을 들고 맥주를 홀짝 마시면서 눈길을 피했다. 확 한마디 하려다가 괜히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그 정도까지만 하고 관뒀다. 저 능글대는 구렁이 같은 새끼. 진짜 진만의 말대로 한따까리라도 해야 되나.

“한송이가 이래 봬도 우리 팀 에이스야. 옆에서 열심히 배워. 좀 갈궈서 그렇지 사람은 아주 착해.”

“대리님.”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송이의 레이저가 진만에게도 닿았다. 진만은 정색을 하는 송이의 표정에 흠칫하여 큼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 이거….”

진만이 괜히 민망했는지 화제를 돌리려고 저러는가 싶었다. 송이는 뻔한 수작에 콧방귀를 뀌었다.

진만은 송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지훈의 손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저래? 송이의 의아한 시선도 지훈의 손목을 향했다. 대체 뭘 보고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거 그거 맞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진만은 지훈의 손목을 붙들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확장된 동공은 지훈의 손목을 두르고 있는 물건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있었다. 지훈은 부담스럽다는 듯이 진만에게 잡혀 있는 손목을 억지로 빼내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이걸 당신이 왜 차고 있어?”

마치 지훈이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물건을 갖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가 높아졌다. 송이는 슬쩍 지훈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금빛의 시계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제 거니까요.”

누가 들으면 도둑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지훈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답을 했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그 비싼 걸 어떻게 차고 있냐 이거지.”

“뭔데 그래요.”

송이는 그깟 게 얼마나 하길래 저러는지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만은 지훈이 보이지 않게 송이를 향해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였다.

삼백?

송이는 소리 없이 입만 벌려 물었다. 남자 시계는 잘 모르는데 삼백이면 비싸지 않을까. 비싼 시계는 몇백도 한다던데.

진만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지더니 소리 없이 입만 움직였다.

삼천.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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