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44)

8화

“누가 회사를 물려받든 우리 같은 일개 사원이 무슨 상관이에요.”

“그건 그렇긴 한데. 가십이 원래 재미있잖아. 그러면 우리 같은 개미들한테 피부에 닿는 얘기 좀 해줄까?”

“뭔데요?”

“이건 진짜 고급 정보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제가 최 대리님이에요?”

“어쭈. 듣기 싫은가 보네?”

“농담이에요, 농담.”

송이는 진만에게 농담이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얼른 말을 해보라며 귀를 기울였다. 진만이 고급 정보라고 할 때는 다른 곳에서는 쉽게 듣기 어려운 이야기일 때가 많았다.

“이번에 공채에서 낙하산도 한 명 끼어 있다고 하더라고. 좀 파워가 센 사람 같다던데.”

“우리 회사 공채에서요? 확실해요?”

“그래. 지금까지 공채 사상 처음이었대. 인사과에 동기 한 명 있는데 걔도 우연히 들은 정보라고 하더만. 이건 진짜 발설하면 난리 난다. 한 대리니까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가끔 특채로 하여 낙하산이 들어온 적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공채에 슬그머니 끼어서 들어온 적은 없었다. 그 말은 낙하산인 티가 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순간 혹시…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 싸가지 없는 행태를 본다면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런데 걱정할 필요는 없어. 우리 신입일 리는 없으니까.”

“어떻게 확신해요?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우리 회사 낙하산들 보면 몰라? 김 상무도 그렇고, 편한 부서 가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만 차지하다가 슬금슬금 승진하는 거. 우리 같은 3D에 누가 낙하산을 앉혀.”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요즘 우리나라의 식품이 해외에서도 반응이 좋고, 매출 규모도 가파르게 상승하여 국내 영업 직원들을 해외영업으로 돌리는 바람에 영업 쪽에 공백이 생겨 마케팅 팀에서 영업 일까지 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원래 업무에 일이 더해져 점점 가중되는 중이었다.

“에이스인 1팀도 아니고, 우리 쪽에 들어온 거면 개고생하라고 보낸 거야. 우리 쪽에 낙하산을 꽂겠어?”

“맞는 말이기는 하네요.”

송이는 잠시 머릿속에 지니고 있던 의심을 완전히 거두었다. 마케팅 부서에서도 1, 2팀에 비하여 성과가 미진한 3팀은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파워가 센 사람이라면 낙하산을 꽂아도 더 괜찮은 팀으로 넣어줬겠지.

“그런데 오늘 김 상무가 우리 사무실을 왜 왔지? 동철이 형한테 전화라도 해봐야 되나. 어, 부장님 오셨습니까.”

진만이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려고 나가다가 출근하는 조 부장을 발견하고는 인사를 했다. 송이도 따라서 인사를 했지만 조 부장의 눈초리가 차가웠다. 송이가 회식 자리에서 사고를 친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조 부장을 필두로 팀원들이 속속 자리를 채웠다. 유일하게 비어 있는 신입의 자리. 송이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홉 시가 되기 1분 전이었다.

문득 어젯밤에 편의점에서 지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내일 쨀까.’

그래 차라리 나오지 마라. 그길로 관둬라. 신입 없어도 되니까, 과중한 업무는 자신이 다 떠안을 테니까 그냥 눈앞에 안 보이는 게 차라리 속 편할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송이가 이제 갓 이틀째 된 신입사원의 퇴사를 기원하고 있을 때, 지훈이 사무실로 들어와 인사를 했다. 아홉 시를 10초 남겨둔 시각이었다.

보통 신입이라면 지각을 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미리 출근을 하는 게 보통인데, 10초 남기고 사무실에 들어오다니. 제대로 강심장이었다. 하는 행동은 딱 낙하산인데.

“한송이 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씨익 웃으며 옆자리에 앉은 지훈이 나긋한 음성으로 송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제 편의점에서 들었던 껄렁한 말투와는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 잠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혹시 다른 사람은 아닐까. 그래,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도 이상하잖아.

송이는 지훈의 얼굴을 마주할 때부터 두근거리던 심장을 가라앉히며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지훈은 자리에 앉더니 별말이 없었다. 어제 그런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분명 뭐라고 한마디라도 했을 텐데. 괜찮냐고 묻거나, 어제 그 편의점에 있지 않았냐고 물어보거나. 이런 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조용히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지훈은 송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최대한 시선을 들키지 않으려고 흘긋거렸는데 그걸 지훈이 알아채고 던진 물음이었다. 송이는 당황하여 얼버무렸다.

“아, 아니… 저기 시계 봤어요. 시계.”

“아, 그러시구나.”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송이는 지훈에게 표정을 들키지 않도록 책상 쪽으로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살짝 숨을 내쉬었다. 너무 빤히 봤나.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정신을 차리고 업무를 봐야 하는데 사내 메신저에 계속 시선이 갔다. 지훈이 로그인을 했다는 표시가 떴다.

물어볼까. 어디 사냐고 그 정도는 물어볼 수 있으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물어보면 되잖아.

송이는 지훈의 아이디를 클릭하고 타자를 쳤다.

[지훈 씨 어디 살아요?]

이건 너무 직설적인가. 좀 돌려서 물어볼까. 썼던 걸 모두 지웠다.

[어디 사는지도 못 물어봤네요. 어디 사세요?]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업무 시간에 다짜고짜 어디 사냐고 묻는 것도 이상하고… 다시 지우고 새로 썼다.

[부장님이 물어보시더라고요. 김지훈 씨 어디 사는지.]

그래. 이 정도가 딱이다. 이러면 이상하지도 않고 자연스러우니까.

숨을 크게 한번 쉬고 엔터를 치려고 하는데 메시지가 하나 떴다.

[한 대리님. 어제….]

송이는 엔터를 치려던 손을 다급하게 거두고 키보드 위에 자리한 백스페이스를 아주 조용히 눌렀다. 송이가 친 글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두근두근두근.

이 인간이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어제 뭐.

정말 어제 편의점에서 자신을 본 건가. 송이의 목구멍으로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옆자리에서 타자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송이의 귓가 바로 앞에 대고 망치를 두들기는 것처럼 고막을 쾅쾅 자극했다.

계속 이어지는 타자 소리가 그녀의 불안을 부추겼다. 도대체 무슨 말을 쓰고 있길래 저러고 있는 거지? 어제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건가? 차라리 사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송이의 불안감이 극도로 치닫고 있을 때쯤 메시지가 왔다.

[보내주신 자료 있잖아요. 그거 다 봤는데 이제 뭐 하면 돼요?]

그가 보낸 메시지를 보는데 허무함이 들이닥쳤다. 뭔가 길게 치는 것 같았는데 이게 다라고? 이럴 거면 왜 메시지를 끊어서 보내는데! 이게 장난하나. 그냥 한 번에 보내면 되지!

아침부터 당했다는 느낌에 송이는 잠시 아찔한 기분을 느끼다가 겨우 진정을 찾았다. 일부러 사람을 놀리는 건가. 별생각이 다 들었다.

[보내드리는 자료 엑셀로 정리하면 돼요. 정리하는 방법은 같이 보내는 파일 참고하시고요.]

[네!]

아주 경쾌해 보이는 한 글자가 메시지로 떴다. 씩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메시지 옆에 떠 있는 듯했다.

설마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어제 그 편의점에 있었으면서 나 쫄리게 하려고 메시지도 나눠서 보내고?

송이는 이렇게 불안에 떠는 것보다 그냥 확인을 하고 해명할 게 있으면 해명하는 게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송이의 성격상 이렇게 질질 끄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고.

[집이 어디예요?]

송이는 이번에는 고민하지 않고 엔터를 눌렀다. 지훈의 답변을 기다리는 1초가 1분 같았다. 잠시 뒤 지훈의 자리 쪽에서 타이핑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이요.]

그 글자를 보자 먼저 안도가 흘렀다. 저 짧은 문구가 왜 이리 반가울까. 서울에 산다는 건 어젯밤의 그 시각에 송이가 사는 연자동에 있을 확률이 제로에 수렴한다는 의미였다.

[아, 부장님이 여쭤보시더라고요. 지훈 씨 어디 사냐고.]

[제 정보가 더 필요하세요?]

[그런 건 아니고 핸드폰 번호 정도만 알려줘요. 업무적으로 급하게 연락할 때 필요할 수 있으니까.]

[010-xxxx-xxxx]

바로 지훈의 연락처가 날아왔다.

[저장해둘게요.]

송이는 저장 버튼을 누르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렇게 비슷한 사람도 있나? 도플갱어라는 게 정말 존재하나. 아니면 쌍둥이? 형제? 먼 조상이 같을 수도?

갖가지 상상이 송이의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선배 번호는 안 알려줘요?]

응?

예상치 못한 메시지였다. 번호를 받았으니 자신의 번호도 알려주는 게 예의인 것 같기는 한데. 이 또라이한테는 왠지 가르쳐주고 싶지가 않았다.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개인적으로?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송이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다시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회사 선배 번호 알려달라고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그거야 그렇기는 한데… 그냥 알려달라고 하면 되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느니 그딴 소리는 왜 해서 사람 찝찝하게 만드는 건지. 송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걸었어요. 번호 뜰 거예요.]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되죠?]

[그렇게 해요.]

사람 찝찝하게 만드는 방법만 연구하는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지 말 하나하나가 송이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번호로 연락이나 할 일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할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오늘 회식 있어요. 지훈 씨 입사 환영회. 원래 입사날 했어야 됐는데 어제 지훈 씨가 그냥 퇴근해서 오늘 하는 거예요.]

너 때문에 어제 해야 할 회식을 오늘 미뤘다고 탓을 하듯이 말했다.

[그거 꼭 참석해야 돼요?]

하아… 그냥 뭐 하나 넘어가는 게 없냐.

송이는 단전에서부터 끌어모은 한숨이 짙게 흘러나왔다.

[조 부장하고 얼굴 보고 밥 먹기 싫어서요. 어제 점심시간에 입에 밥알이 들어있는 상태로 뭐라고 떠드는데 토할 뻔했거든요. 선배도 싫잖아요?]

뭐 맞는 말이기는 한데, 사내 메신저로 조 부장을 까는 신입의 대범함에 이상하게 짜증이 나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송이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지훈 쪽으로 돌렸다.

“김지훈 씨.”

“네?”

지훈은 무슨 일이라는 듯이 천진한 표정으로 송이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까지 머금으며.

“신입 환영회인데 지훈 씨가 안 가면 어떡하자는 건데.”

송이는 이 답도 안 나오는 신입을 보며 절로 화가 치솟아 말이 짧아졌다. 지훈은 송이의 반응에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의자를 송이 쪽으로 가까이 움직여 그녀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주 중요한 비밀이야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숙이고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중얼거렸다.

“안 가면 조 부장이 지랄하겠죠?”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냥 지랄도 아니고 지랄지랄을 해대겠지. 그리고 이딴 소리를 왜 입을 가리고 해. 이게 미쳤나.

“알면 가죠.”

“선배가 원하시니… 그러면 갈게요.”

얘는 말이 또 왜 그렇게 되는 건데.

“회식 가면 뭐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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