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한 대리야, 뭐 고민 있어? 왜 죽을상을 하고 그래.”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송이는 멍을 때리고 있다가 진만의 물음에 정신을 차렸다. 어젯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편의점에서 겪은 날벼락 같은 일이 계속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거의 정신이 반은 나갔는데, 이거. 간밤에 뭔 일 있었어?”
진만은 귀신같이 송이의 상태를 알아채고 물어왔다. 어제의 일은 다시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거구의 남자와 부딪히고 쓰러지는 순간 손에서 봉지를 놓치고 말았다. 가득 차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던 봉지에 든 간편식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편의점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지훈 역시 그 광경을 못 봤을 리가 없었다. 그 짧은 찰나에도 아직은 지훈이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믿으며 본능적으로 일어나 편의점을 뛰쳐나갔다.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까지 5분 동안 전력질주하여 뛰어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편의점에서 있던 일을 곱씹어 보며 수치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를 팡팡 내리쳤다.
아니,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왜 피해 가지고는.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불러온 파장은 너무 컸다. 편의점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주변에 흩어진 물건들 때문에 더 쪽팔렸다. 그게 대체 얼마어치야. 편의점 CCTV에 고스란히 찍혔을 텐데. 알바생들끼리 돌려보면서 낄낄거리지는 않을까. 다시 그 편의점을 갈 수 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새벽까지 자책을 하다가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출근을 했으니 상태가 아주 안 좋을 수밖에.
“아니에요. 잠을 잘 못 자서요.”
“잠귀신 한송이가 잠을 못 자?”
진만은 한껏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맞는 말이다. 송이는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자는 스타일이었다. 먹는 것, 자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제는 정신적인 타격이 컸는지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고민 있으면 말해 봐. 다 들어줄 테니까.”
진만은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말했다. 잠시, 어제 들어온 신입이 또라이 같은 놈인 것 같다고 말을 해보려다가 말았다. 진만에게 말을 한다는 건 사내에 빠르게 퍼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회사에서 발이 넓은 진만은 온갖 소문을 물어와 알려주는 사람이었다. 이 얘기는 반대로 둘 사이에 오간 말을 퍼뜨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신입이 또라이인 건 사실이지만 그 말이 퍼지면 그 또라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송이가 옥상에서 통화를 했던 내용 같은 것을 미친 척하고 회사 사람들에게 말을 한다면 앞으로 얼굴을 들고 회사를 다닐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 신입이 벌써부터 속 썩여?”
“아뇨. 무슨.”
송이는 과도하게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누가 봐도 티가 나게.
“어제 잠깐 불러서 같이 나가는 것 같던데. 한따까리 했나?”
그걸 또 언제 봤대. 정말 일 빼고는 다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냥 할 얘기가 있어서 불렀어요.”
“신입은 원래 초장에 확 잡아야 되는 거야.”
“대리님이 저한테 하신 것처럼요?”
“에이…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나는 외로운 신입 시절의 한송이한테 사랑의 손길을 먼저 내민 거고.”
“아무튼 그런 거 아니에요. 따로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요.”
“말 안 들으면 나한테 바로 말해. 내가 그냥 확.”
진만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냥 차라리 진만에게 맡겨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신입 출근한 지 고작 두 번째 날인데 벌써부터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진만과 하는 농담 따먹기도 별로 재미있지가 않았다.
“아직 다들 출근 전인가?”
그때 낯선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진만과 송이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정장을 칼같이 차려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떡 하니 서 있었다.
“어이구,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진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남자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곧 출근할 겁니다. 아직 15분 정도 남았네요 하하.”
남자는 무슨 시찰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떨떠름한 표정으로 계속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옆에 있던 진만의 입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전에 우리가 봤던가?”
남자는 너 따위가 뭔데 나에게 인사를 하냐는 듯한 띠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박동철 과장하고 몇 달 전에 요 앞에 바에서 한번 뵈었습니다.”
“아… 박 과장.”
남자는 아직도 기억이 가물가물한지 확신에 찬 표정이 아니었다.
“마케팅 3팀 최진만 대리입니다.”
진만은 남자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직감하고 빠르게 소개를 했다.
“그래, 최 대리.”
남자는 소매에 붙은 똥파리를 쳐다보듯 상당히 귀찮은 표정으로 지었다. 그제야 송이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조용히 고개만 꾸벅 숙였다.
“한송이 씨 맞죠?”
“네, 맞습니다.”
남자가 송이의 이름을 바로 언급하는 것을 보고 진만이 놀라 송이에게 눈빛을 쐈다. 상무님이 왜 한낱 대리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냐고 묻고 있었다. 같이 술까지 마신 진만의 이름은 까맣게 잊고 있으면서 전혀 접점이 없는 송이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을 상황이었다.
“여전히 뻣뻣하네.”
송이는 이번에는 아무 말이 없이 가만히 있었다. 좋지 않은 인연이니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여기 팀장이 누구지?”
“조영철 부장입니다.”
진만이 싹싹하게 대답하자 남자는 다시 한번 사무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출근하면 나한테 좀 오라고 해요.”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진만은 보지도 않는 남자를 향하여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남자가 사라지자 진만이 바로 물음을 던졌다.
“한송이, 너 김 상무하고 아는 사이야?”
“제가 상무님을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상무님이 한 대리 이름을 어떻게 알아?”
예전에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마케팅 관련 자료를 보내라고 한 사람이 있었다. 나 김 상무야, 라며 짧게 자기소개를 한 사람에게 송이는 대외비라 함부로 보내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 사람은 전화로 노발대발하며 당장 안 보내면 잘릴 줄 알라고 했지만 그래도 송이가 꿈쩍도 하지 않자 바로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때는 다들 외근을 나가 있어서 사무실에는 송이뿐이었다. 송이는 직접 찾아온 남자에게 자료가 필요하면 공식적인 루트로 요청을 하는 게 절차라며 절대 자료를 줄 수 없다고 버텼다. 아주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다가 조 부장이 때마침 복귀를 하여 김 상무를 겨우 달랬다.
지난번에도 참 재수가 없는 인간이었지만, 오늘도 그 띠껍고 거만한 표정에 툭툭 반말을 내뱉는 게 참으로 재수가 없어 보였다. 마치 어제부터 출근한 신입처럼.
“예전에 자료 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제가 공식적으로 요청하라고 그랬거든요. 자기가 상무라고 하면서 자료 달라고 하면 제가 줘야 되나요. 그게 고까웠나 보죠.”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도 상무님이면 드리지 그랬어. 한송이 좀 세게 나갔네.”
“그냥 해프닝이죠 뭐.”
진만은 갑자기 목을 쑥 빼고 누구 들어오는 사람이 없는지 사무실 입구를 보더니 송이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채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김 상무가 도는 소문이 안 좋아. 보다시피 싸가지도 없고.”
송이는 진만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었다.
“김태중 회장이 원래 김 상무한테 진수 식품을 물려주려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김 상무가 손대는 것마다 다 개판 치니까 주주들 사이에서 평판이 너무 안 좋아서 나가리 될 판이거든. 원래 김 상무가 부사장으로 가야 되는데 올해 못 가고 계속 상무하고 있잖아.”
“그럼 김 상무는 완전 나가리예요?”
“그건 봐야 알기는 하는데… 대안이 없어요, 대안이. 김 회장한테 아들이 하나 더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쪽은 완전 쌩날라리여서 아예 외국으로 보냈대잖아. 사고 쳐서 애 가진 여자만 수십 명은 된다고 하더라. 그거 뒷수습하느라 김 회장이 지쳐서 나가서 살라고 그런 거고. 밑에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는 하는데 그쪽은 아예 예술가의 길로 들어섰다나.”
“외국으로 보냈다는 아들 얘기, 그거 찌라시 아니에요?”
송이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다른 팀의 여직원들과 차라도 한잔 마시면 회사 내의 이야기가 수없이 오갔다. 누가 사귀었다가 헤어졌느니, 유부남인 윤 과장이 바람을 피웠다느니, 정 대리 아이 아이큐가 몇인데 어느 학교를 들어갔다느니, 뚜렷한 주제도 없이 온갖 신변에 관한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중에서도 김 회장의 둘째 아들에 대해서는 송이도 아주 흥미롭게 들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들어보면 개차반도 그런 개차반이 없었다.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 수준이었다.
“한 대리야. 나는 확인된 정보만 융통하는 거 몰라? 찌라시라니 어디서.”
진만이 얘기하는 건 대부분 맞기는 했다. 간혹 틀린 것도 있기는 했지만. 열애설을 터뜨리기로 유명한 어느 신문사도 가끔 틀릴 때도 있으니, 진만 정도면 신뢰할 만한 수준이었다.
“둘째 아들 관련해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다. 살면서 그런 쓰레기는 안 만났으면 할 정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