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여름이 다가오는 밤. 선선하면서도 더운 기운이 섞여 있는 밤공기, 이맘때쯤 풍겨오는 공기의 냄새, 약간 끈적끈적하면서도 후덥지근한 밤에는 역시 맥주지.
종잡을 수 없는 의식의 흐름은 어김없이 맥주로 귀결되며 오늘도 송이를 편의점으로 이끌었다. 1인 가구가 몰려 있는 오피스텔 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는 편의점이었다.
근처에 다른 편의점이 있기는 했지만 이곳이 가장 규모가 커서 물건의 종류도 많고, 선택지도 많다는 이유 때문인지 제일 붐비는 곳이었다.
밤 10시가 된 시각임에도 송이와 같이 위장을 달래주려는 목적을 가진 이들이 눈에 띄었다.
“뭐 먹지.”
오늘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상당한 날이었기 때문에 지나와 1차만 하고 끝냈다. 어느 순간부터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와 자꾸 하품이 나왔다. 아쉬워하는 지나를 뒤로하고 나중에 또 보자고 하며 집으로 향했다.
걷기 좋은 기온이기도 하고, 배도 꺼뜨릴 겸 버스에서 한 정류장 빨리 내려 조금 걸었다. 그것 좀 걸었다고 약간 땀도 나고, 목도 타서 맥주가 땡겼다.
쌩으로 맥주를 먹기는 입이 심심하니 간단하게 먹을 만한 안주를 고르던 참이었다. 이 밤에 맥주에 안주까지 때리는 건 살을 찌겠다고 작정한 거나 마찬가지이지만 송이는 운이 좋게도 살이 잘 찌지 않는 유전자를 물려받아 위장에 밀어 넣는 양에 비하면 거의 뼈다귀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십대의 끝물을 달려가고 있으니 예전과 똑같이 먹어도 살이 찌는 것 같았다. 크게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늘어나는 몸무게가 신경 쓰여 야식을 자제하려다가도 이 편의점만 보면 절로 발이 향했다.
“어? 새로 나왔네.”
송이는 신제품을 보자마자 손을 뻗었다. 식품 회사의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면서 생긴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당신의 밤을 불태울 매운 불족발.’
제품의 포장지에 새겨진 문구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이 문구를 정하기까지 얼마나 까였을까.
송이는 입사하고 2년 차가 되었을 때 기획했던 가공식품을 떠올렸다. 편의점의 고객을 타깃으로 하여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면 요리였는데 포장지에 들어갈 문구 하나를 정하는 데도 한 달을 내내 고민했다. 그렇게 수십 번을 까인 끝에 결국은 조 부장이 정한 문구로 들어갔다. 나중에 최진만 대리에게 듣기로 처음부터 조 부장이 정해둔 문구가 있었다나 뭐라나. 그럴 거면 왜 사람을 들들 볶고 난리야. 답정너도 아니고.
그 제품은 SNS에서 당시에 대대적으로 홍보도 하면서 판매를 시작했는데 문구가 촌스럽다며 비아냥대는 글이 마구잡이로 늘어나 거의 조리돌림을 당하다시피 했다.
임원 회의에 들어가 까인 조 부장이 송이에게 책임을 떠넘겼다는 개 같은 후문을 들었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팀원을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사지로 내모는 조 부장 새끼.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임원들 사이에서 자신이 까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가 치솟았다. 조 부장은 잘한 건 자기 공이고, 못한 건 남의 탓으로 돌리기의 귀재였다. 자신이 정한 문구 때문에 지적을 당한 거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잠시 머리에 스팀이 돌던 송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옆에 있는 것들도 살펴보았다. 편의점에는 하루가 다르게 신제품들이 쏟아졌다. 1인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편의점에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간편식 시장의 규모는 나날이 늘어갔다. 식품업계의 화두이기도 하면서 초격전지이기도 했다.
진수 식품 역시 이 시장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다른 곳에서 나오는 신제품에 눈길이 갈 수밖에.
식품업계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는 유진 식품의 제품들이 눈에 띄었다. 선두 기업답게 편의점에 입점한 제품들 종류도 가장 많았다.
다른 회사에서 나온 것들이라면 일단 먹고 보는 송이였다. 경쟁업체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아야 영감도 얻고, 더 좋은 상품도 기획할 수 있을 테니까.
곱창, 볶음밥, 면, 닭다리… 보이는 대로 바구니에 넣었다. 어려서부터 식성이 좋았던 송이는 엄마가 식당을 해서 이것저것 먹는 것이 익숙했다. 오늘 다 먹지는 않더라도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을 수도 있으니 우선은 담고 봤다. 오늘 돈도 많이 썼는데… 이상하게 음식만 앞에 있으면 이성을 잠시 놓는다. 가끔 집에 가면 아쉬울 때가 있었다.
이 정도로는 배가 안 차는데… 그것도 담을걸. 어차피 냉장고에 두고 언제든 먹으면 되잖아, 이 바보야. 이러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송이는 이것은 연구의 한 과정일 뿐이라고 되뇌며 손에 집히는 대로 바구니에 넣었다.
“이건 왜 이렇게 구석에 있어….”
잘 팔리는 물건들에 밀려 저 멀리 구석에 박혀 있는 진수 식품 로고가 박힌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이 떡볶이는 기획 과정에서 의견도 보탠 제품이었다. 허리를 한참은 숙여야 손이 닿을 곳에 비치된 그것은 사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진열해 놓은 대로 꽉 차 있었다.
얼마 전에 확인해 봤을 때도 매출이 줄어드는 모양새가 확연히 보였다.
“에휴….”
송이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였으면 하는 마음에 제품을 괜히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정돈을 하다가 두 개 정도 집어서 바구니에 넣었다. 이렇게 팔린 흔적이라도 보여야 사람들의 손이 갈 테니까.
바구니가 꽤 묵직해졌다. 월급의 반은 식비로 나가는 느낌이었다. 가끔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오늘은 맥주에 닭다리나 하나 뜯고 끝내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맥주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편의점 문에 달린 종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위아래를 검은색으로 깔맞춤한 트레이닝복에 하얀 운동화. 굉장히 몸매가 잘빠진, 훈내가 풀풀 나는 남정네가 귀에 핸드폰을 대고 통화를 하며 들어오는데 왜 송이의 머릿속이 새하얘진 건지. 머리로는 맥주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뇌에서는 도망치라는 명령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오류가 난 듯 삐걱대던 몸은 재빨리 간편식 코너가 있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뭐 하는 거지. 내가 왜?
송이는 뇌에서 내린 명령을 재빠르게 이행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쟤를 피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저 새끼가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 건데.
분명히 김지훈이었다. 오늘 그녀를 뒤흔들어놓고 첫날부터 칼퇴를 한 개 같은 신입, 김지훈.
“출근하기 싫어 뒈지겠네.”
아까 회사에서 송이에게 취향을 들먹거리면서 비아냥거리던 그 목소리와 완전히 동일했다. 통화를 하는 상대에게 출근을 하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듯 말을 하는 투였다.
그녀와 그 사이에는 여러 매대가 있어 그는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송이의 가슴은 계속 쿵쾅거렸다.
그냥 마주쳤어도 아무 문제 없었다. ‘김지훈 씨. 이 동네 살아요?’ 이런 식으로 쿨하게 넘어가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런데 굳이 왜 피하기까지 했을까.
아까의 트라우마가 다시 떠올랐다. 발가벗겨진 채로 그의 앞에 서 있던 그 느낌. 비열해 보이던 그의 표정.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바구니에 가득 찬 갖가지 음식들.
이 시간에 편의점에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사 가는 직장 동료를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아직 이미지 정립도 되지 않은 관계에 이런 이미지로 보이는 것도 싫었다. 저 양아치 같은 인간한테는 이런 모습을 보이면 꼬투리를 잡힐 것 같았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가냐. 내일 그냥 쨀까.”
미친 새끼. 절로 욕이 나올 뻔했다. 입사 첫날부터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지각을 하질 않나, 무슨 학교도 아니고 째긴 뭘 째. 듣고 보니 열이 받았다. 누구는 어떻게든 회사에서 목숨 부지하려고 아등바등하면서 다니는데. 첫 출근한 신입이 한다는 말이.
“여기 동네도 구려. 괜히 여기 왔어.”
이 동네에 사는가 보다. 참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었다. 경기도에 있는 그 수많은 동네 중에 왜 하필.
“그냥 풀로 땡겨서 강남으로 갈까.”
강남 같은 소리 하네. 이 동네 시세를 훤히 아는데. 생긴 것부터 껄렁하게 생겨 가지고 허세만 부릴 줄 아는 스타일이 뻔했다.
“인생이 아주 개 같네. 언제 때려치우지?”
그의 음성이 계속 귀로 흘러들어왔다. 송이가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너 때문에 인생이 아주 개 같아질 것 같다고. 저 인간을 데리고 업무를 가르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꼰대 천지야. 그리고 골 때리는 애도 하나 있고.”
꼰대는 누군지 알겠는데… 골 때리는 애?
그 말이 귓가 깊숙이 박혔다. 왜 죄라도 지은 것처럼 찔리는 거지.
“오늘 아침에… 아니다. 나중에 얘기해줄게. 아무튼 좀 또라이 같아.”
훗. 그의 비웃는 소리까지 들렸다. 또라이? 미친놈한테 또라이 소리를 들으니 심기가 아주 좋지 못했다. 그 말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송이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아주 동네방네 떠들 작정인가. 당장이라도 저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던 그때,
“저기.”
“네?”
옆에 있던 사람이 송이의 앞에 있는 식품을 눈짓하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다 골랐으면 거기서 개기지 말고 비키라는 의미였다.
지훈의 통화 소리에 집중하느라 옆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다. 통로가 비좁아 송이는 옆 사람에게서 두 발짝 정도 떨어져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죄송합니다….”
민망하여 쥐똥만 한 목소리를 뱉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남자는 잠시 이상한 눈으로 장바구니를 보았다. 하긴, 바구니에 먹을 걸 가득 담아둔 채로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이 이상해 보일 법도 하겠지.
송이는 입가를 억지로 올리며 가볍게 웃어주고는 그에게서 더 물러나 멀어졌다.
“오긴 뭘 와. 쥐뿔도 없는 동넨데. 내가 강남으로 넘어갈게.”
어? 조금 전보다 지훈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송이는 영문을 모른 채 잠시 고개를 돌려보는데 매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건너편에 지훈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물건들 사이에 자그마한 틈으로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키도 커서 그가 마음만 먹으면 송이를 내려다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송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남자 때문에 계산대 쪽으로 바로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가면 지훈과 마주할 확률이 높았다. 오늘은 어떻게든 그를 피하고 싶었다.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마주할 수도 있었다. 결단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옆에 있는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남자는 무엇을 먹을지 고르다가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송이를 향해 인상을 쓰며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 송이는 재차 그에게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면서 빠르게 계산대로 향했다.
“이거 빨리 계산해주세요.”
송이는 혹시 지훈이 물건을 들고 계산대로 오지는 않을까 초조해하며 알바생에게 빠른 계산을 종용했다.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던 알바생은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폰을 잠시 옆에 두고 느릿하게 바코드를 찍었다.
“이거 원플러스원이에요. 하나 더 가져오세요.”
아까 무심결에 집어 든 우유가 1+1이었나 보다. 송이의 다급한 속도 모르고 알바생은 안 가져오고 뭐 하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됐어요. 그냥 이것만 빨리 계산해주세요.”
알바생은 싫으면 말라는 표정으로 바코드를 찍어나갔다.
“봉투 드려요?”
“네. 빨리요.”
송이는 알바생이 꺼내든 봉투를 낚아채듯 가져가 빠르게 구매한 것들을 담았다. 그러면서도 간혹 고개를 돌려 지훈을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물건을 골랐는지 계산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게 보였다.
더 다급해진 송이는 거의 구겨 넣다시피 하면서 빠르게 몸을 돌려서 나가려고 했다.
“악!”
그녀의 앞에는 거대한 산이라도 되는 것 같은 거구의 남자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계산을 하려고 기다리다가 급하게 나가려는 그녀와 부딪히고 만 것이다. 그는 아무 미동도 없는데 송이의 가느다란 몸은 속절없이 튕겨 나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