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뭐?”
지나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웃어댔다. 얼마나 웃어재꼈는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꺼억꺼억 거리다가 웃는 데 힘을 너무 많이 썼는지 탈진한 표정으로 맥주를 원샷했다.
“니네 신입 그거 개또라이네?”
목을 때리는 맥주의 탄산에 포효라도 내지르듯 크하, 소리를 내더니 물음인지 확신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똘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송이였지만 처음 입사한 날에 상사한테 그따위 질문을 던질 깡다구는 없었다.
‘선배 취향이 큰 남자 맞죠?’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송이는 어떠한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반박을 하거나, 어디서 그따위 소리를 하냐고 받아쳐야 하는데 목구멍이 굳어서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곡을 제대로 찔리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하던데. 딱 그 꼴이었다.
굳은 송이의 앞에서 지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비열한 표정을 보고 있는데도 온몸의 세포가 활동을 멈춘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울리는 핸드폰의 통화음. 그 소리가 주문이라도 되는 듯이 몸이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받으니 조 부장이 부른다는 진만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조 부장의 호출이 이렇게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다. 그대로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다.
“어떻게 알았지? 크기에 집착하는 우리 송쓰 취향을? ”
“술 곱게 얻어 마시고 싶으면 닥쳐라.”
돈 좀 번다고 유세네. 서러워서 백수 하겠냐고 투덜대던 지나는 흘러가듯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건 집착을 넘어서 트라우마지.”
송이는 예전에 만났던 전 남친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똥차도 그런 똥차들이 없었다. 절로 손이 맥주잔으로 향했다. 소주를 과하게 섞은 소맥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소주의 쓴맛과 맥주의 탄산이 위장 속에서 오묘하게 뒤섞였다.
“크하.”
술을 크게 한 모금 마셔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만나 개강을 하자마자 사귀게 된 생애 첫 번째 남친은 귀염성 있는 외모가 사람을 끌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독하게 돈을 안 쓴다는 거였다. 제가 필요한 건 꼬박꼬박 잘도 사면서 데이트할 때 쓰는 돈은 뭐가 그렇게 아까운지 대학가 싸구려 맛집에 이골이 났다. 한 번은 기념일에 스테이크 좀 먹어보자고 하니 어제 고기를 먹었다는 둥 개소리를 하면서 인상을 쓰다가 송이가 쏜다고 하니 마지못해 가는 척을 하더니 고기를 잘도 입에 처넣던 그 역겨운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그 남자는 곧 군대를 갔고,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자연스레 헤어지게 되었다.
두 번째 남친은 반대로 돈을 시원시원하게 썼다. 그때는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이 그렇게도 어른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고 이래서 나이 많은 남자와 사귀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본색을 드러냈다.
‘급해서 그러는데 내가 잠깐만 쓰고 줄게. 돈 좀 있어?’
그때는 정말 그 말을 순진하게 믿었다. 집에서 받는 용돈과 간간이 하던 과외로 벌던 돈을 그 남자한테 건네주었다. 아니, 털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불법 스포츠 도박으로 이미 빚이 꽤 있었다고 들었다. 돈을 잘 썼던 건 도박으로 수입이 짭짭했을 때였다. 하지만 곧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쳤다고 했다. 경찰 조사를 받았다나 뭐라나 하는 소문을 들은 이후로 캠퍼스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세 번째는 바로 최근에 만난 박경수였다. 3년이 넘게 만남을 가지는 동안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적당하게 배려심도 있고, 눈치도 있고, 도박 같은 건 손도 대지 못하는 새가슴이었다. 이 남자라면 결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장난식으로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맞장구도 쳐주어서 미래를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이제 나이도 어느덧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그런데 간땡이가 크게도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온 어린 신입 직원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예전에 퇴근하고 경수의 회사에 말도 없이 갔다가 두 사람이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걸 발견한 적이 있었다. 신입 직원인데 적응을 잘 못 해서 조언을 해주느라 커피를 마셨다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거하게 날렸다.
가지각색의 매력을 자랑하는 세 똥차들은 공교롭게도 거기가 작았다. 한 명 정도는 클 법도 하건만 확률상 이건 말이 안 됐다. 관계를 맺을 때도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욕구라도 채웠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지. 마음의 상처만 입고 정말 남는 거 하나 없는 지난 연애였다.
세 번을 연속으로 거지 같은 연애를 하고 나니 앞으로 남자를 만나는 게 두려워졌다. 처음 봤을 때는 모두 멀끔하고 호감이 가는 상이었다. 연애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남자라면 내 마지막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불신만이 남았다. 또 어떤 쓰레기가 걸리지는 않을까. 사진을 보여줬더니 소개팅을 하고 싶어서 남자들이 줄을 서 있다는 지나의 오버스러운 말투도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그냥 그런 생각을 해봤다. 거기가 큰 남자는 어떨까.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라고나 할까. 가끔 혼자 상상도 해봤다. 큰 물건이 그녀의 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그런 상상. 상상이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남자를 만나는 것조차 두려우니 살면서 해볼 수 없는 경험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 들어온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신입이 그 트라우마를 단 한마디의 질문으로 찌르고 들어왔다.
뭔가 다 까발려진 기분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얬다. 다른 이들에게는 숨기고 싶은 나만의 비밀을 들킨 느낌.
“걔 왠지 느낌이 싸한데. 누가 출근 첫날부터 회사 옥상에서 담배 피우다가 지각을 해. 나같이 개념 없는 백수도 첫날은 각 잡고 조신하게 앉아 있어야 된다는 걸 아는데.”
정말 제대로 꼬인 기분이었다.
‘들어가기 싫어서요.’
첫 출근인데 사무실에 들어가기 싫어서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남자. 사수가 누굴지 회사 생활 더럽게 꼬였다고 혀를 찼는데 그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올 때 사수로 당첨되었다는 절망감.
며칠은 꼬박 새워야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을 앞에 두고 내일까지 마무리를 해야 하는 막막함을 마주한 심정이랄까.
어제 술을 마시다가 부린 주사의 대가로 조 부장에게 아침부터 대차게 까인 것만 해도 정신이 어질했는데 난데없이 들이닥친 개념 없는 신입 때문에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신입이 하필… 술이나 마셔.”
대학 신입생 시절에 처음 만나 지금까지 거의 10년을 알고 지내온 지나였지만 이렇게 동정심이 가득한 표정은 처음이었다.
얼마 전에 신입 사원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송이는 기대가 아주 컸다. 조 부장의 꼰대력 때문인지 들어온 몇몇 사원은 1년도 되지 않아 그만두기 일쑤였다. 자기 딴에는 젊은 여직원들과 친한 척을 하고 싶었는지 쓸데없는 스킨십을 하거나, 철 지난 농담을 던질 때마다 주둥이를 꿰매버리고 싶었다.
같은 팀에서 근무하던 여직원 3명 중 2명은 질색을 하여 이직을 했다. 나머지 1명은 출산을 앞두고 출산 휴가를 냈다. 팀의 유일한 여성으로 남은 송이는 조 부장을 꿋꿋하게 견디며 버텼다. 조 부장도 처음에는 송이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려고 했으나, 송이의 똘끼를 경험하고는 거리를 두었다. 나름 대기업이고, 어렵게 들어왔는데 차마 제 발로 나갈 수는 없었다. 통장 잔고를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6개월 동안 인원 충원이 되지 않다가 신입이 충원될 거라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들어온 신입이라는 게….
“후우…….”
안에 있는 숨을 모조리 뱉어 폐가 쪼그라들 정도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야.”
지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송이를 불렀다. 그래도 이런 얘기라도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에 송이는 위안을 삼았다.
“왜.”
“모듬 소세지 하나만 시켜도 되냐?”
지나는 더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조금 전에 보이던 걱정스러운 표정이 이것 때문이었나. 송이는 정수리부터 타고 내려오는 갑작스러운 두통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너는 밥도 안 먹고 다니냐.”
들어오자마자 배가 고프다고 하더니 4인 세트 정도는 먹어줘야 되지 않겠냐고 하면서 다섯 명은 충분히 먹을 만한 양을 시켰다. 그러면서도 소세지를 하나 더 먹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가상했다.
“저녁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너한테 딱 연락이 왔지 뭐야.”
“먹어라, 먹어.”
더 말싸움을 할 기운도 없었다. 알아서 시키라고 하면서 손짓을 했다. 그러자 지나는 이모! 하고 주인을 부르면서 야무지게 소세지를 주문했다.
“내가 나중에 취직하면 다 갚을게. 나 취직하고 1년 동안은 지갑도 갖고 나오지 마. 지갑 보이기만 해. 혼날 줄 알아.”
그 말만 지금 몇 년째인지. 백수 탈출을 할 의지는 있는지 궁금했다. 졸업 시즌에는 여러 기업에 지원서를 넣었다가, 공무원을 준비한다고 했다가, 자기 길은 헤어 디자이너인 것 같다며 미용실을 잠깐 다니다가. 지나가 갈팡질팡한 세월만 벌써 3년이었다.
그래도 대학 시절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 지나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있어서 지나에게 돈을 쓰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좀 과했다. 소세지까지 하나 더 시키면 얼마야. 이번 달은 관리비도 많이 나왔는데. 이놈의 관리비는 왜 많이 나오는 거야. 쓴 것도 없는데. 이것저것 짜증이 나니 애꿎은 관리비 생각에 화가 났다.
“신혜도 얘기 들어보니까 골 때리는 신입 때문에 고생한다던데.”
지나가 몇 개 남지 않은 튀김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정신혜?”
“어. 입사하고 첫날부터 가관이었대. 일을 던져줘도 대충하고, 대답도 건성건성 하고. 팀장이 뭐라고 해도 한숨이나 쉬고 있고. 그런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더라.”
“뭔데?”
“낙하산이었대. 이사 중에 한 명 빽으로 들어왔다나 뭐라나. 걔도 혹시 그런 거 아니야?”
“아니야. 걔는 공채야. 낙하산 쪽은 아니야.”
진수식품은 입사 절차가 까다롭기도 소문이 난 회사였다. 낙하산으로 간간이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도 들었지만 공채 절차는 아주 공정하기로 업계에 소문이 났기에 공채를 통하여 낙하산으로 들어왔을 리는 없었다.
“그러면 더 이상한 거 아니냐? 낙하산도 아닌데 뭔 깡이야.”
깡이 남다르기는 했다. 보통 첫날이면 퇴근을 하기 전에 분위기가 어떤지 눈치라도 볼 텐데 전혀 그런 것이 없이 6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까딱 고개를 숙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신입이 들어오는 날은 어김없이 부장이 주관하는 회식을 잡는 것이 마케팅 3팀의 암묵적인 룰이었는데 정작 신입이 사라졌으니 회식을 할 명분도 사라져버렸다.
오늘 들어온 신입은 어디 갔냐며 황당한 표정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보던 부장의 말에 연락을 해보려고 했지만 업무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핸드폰 번호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조 부장은 그대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송이는 쌓인 업무들이 많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하여 그냥 사무실을 나와 지나에게 연락을 했다.
“친구야. 너무 걱정하지 마. 사회생활 하다 보면 개념도 생기겠지. 술이나 마셔.”
지나가 이번에는 소주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오늘따라 술맛이 왜 이리도 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