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너 내가 우습냐? 한 대리, 야 한송이! 내가 만만해?”
죄인은 말이 없이 묵묵히 폭격을 받아낼 뿐이었다. 부장은 침까지 튀어 가면서 삿대질과 함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이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그는 흥분을 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코앞으로 다가와서 뭐라고 떠들어댔다. 지금은 흘려듣기 스킬이 필요할 때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저 막말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들이받을 게 아니라면 고개를 푹 숙이고 듣고 있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단 하나 참기 힘든 것이 있다면 커피 냄새만 해도 역한데 담배 냄새까지 뒤섞인 개 같은 향이 그의 입에서 마구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까 정 과장은 그나마 담배 냄새는 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난이도가 극상이었다. 여기에서마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간다면 앞으로의 회사 생활을 장담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극한의 인내심까지 끌어모아 냄새 공격을 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어제 뭐? 존나게 고생하셨습니다? 대놓고 개기는 거야?”
부장실에 들어와 까이는 동안에 어제의 만행이 새록새록 머릿속에서 더 피어났다. 새로 업데이트 되는 정보들이 속속 머릿속에 재연이 되었다.
‘한 대리, 오늘 왜 이렇게 달려. 안 좋은 일 있어?’
‘남자 친구하고 헤어졌어?’
‘여자가 저렇게 술을 마셔대니 나 같아도 도망가겠다. 쯧쯧쯧.’
2차로 노래방에 갔을 때 조 부장이 지껄였던 말들이었다. 앞의 말들은 어떻게 참아보겠는데 마지막 말에 핀트가 확 나갔다. 그렇게 취한 와중에도 그 말은 정확하게 들었는지 그때를 기점으로 이성의 끈을 확 놓아버렸나 보다. 박경수 그 새끼 때문에 울화통이 터진 것만 생각해도 열이 받는데 거기에 기름을 드럼통으로 들어부으니 미친 듯이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그래, 헤어졌다. 거기도 작은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딴년 만나길래 고자나 되라고 냅다 차줬다 왜!’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최 대리가 벙찐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노래방 기계에서는 음악만 흘러나올 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부장님도 작죠? 딱 봐도 그래 보여.’
그 당시에는 무슨 용기로 이런 말을 내뱉었는지 모르겠지만 송이는 마음속으로 되새겨보았다. 이건 엄연히 정당방위라고. 조 부장이 먼저 건드렸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상사에게 이런 발언을 내뱉었다는 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저 좀 제발 잘라주시겠어요?’하고 매달리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땀도 많이 흘리면서 이건 왜 쓰고 계세요.’
송이는 조 부장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가발에 손을 얹더니 훅 들어 올렸다.
훌렁.
매끈한 두상이 공기 중에 노출되었다. 노래방 조명의 빛을 받아 반짝반짝 잘도 빛났다.
‘시원하죠? 헤헤.’
거기까지만 하고 어떻게든 멈췄어야 됐는데. 송이는 바로 최 대리의 마이크를 뺏더니 노래를 부르면서 상모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 손으로 들고 있던 가발을 마구 돌렸다. 급기야 그 가발을 자신의 머리 위에 쓰더니 신나게 노래를 불러댔다.
그 댄스곡을 완창하고 그녀는 장렬히 전사했다.
노래방 기계에 찍힌 100점이라는 숫자와 함께 흘러나오는 기계의 음성.
‘와우! 가수 뺨치시네요!’
그와 함께 기계에서 나오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송이는 가발을 쓴 채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던 정 과장은 송이의 머리에서 슬쩍 가발을 들어 조 부장의 머리 위에 사뿐히 올려주었다. 그의 손끝이 덜덜거리면서 떨렸다.
조 부장은 눈동자에 이미 초점을 잃은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는 송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분노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어제는 정말 자신이 생각해도 제대로 미쳤다. 조 부장이 저렇게 노발대발하는 것도 오늘만큼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팀원들 앞에서 그 수모를 당했으니 저러는 것도 당연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은 나?”
“…….”
기억이 난다고 하기도 그렇고, 안 난다고 하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죄송하다고 그런 거냐고 제대로 털릴 게 뻔했다. 입은 있지만 말을 할 수 없어 입술에 본드라도 바른 것처럼 꾹 다물고 있었다.
“당장 시말서 써 와! 어제 뭔 짓을 했는지 하나하나 다 소상하게 적어.”
“네, 알겠습니다….”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최대한 한 귀로 흘리기 스킬을 시전했지만 그럼에도 내상이 상당했다. 거의 영혼이 털리기 직전까지 갔다. 아침에 오바이트를 몇 번이나 해대고, 여기저기서 탈탈 털리니 오늘 하루를 온전히 버틸 수는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냥 픽 쓰러졌다가 깨어나니 며칠이 훌쩍 지났으면 하는 상상을 하며 터덜터덜 부장실을 나왔다.
자리로 돌아가는데 부장실로 향하는 진태호와 마주쳤다. 태호는 썩소를 날리며 예의 얄미운 말투를 날려주었다.
“어제 그렇게 분위기 파악 좀 하라고 말을 해줘도.”
태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하찮은 생물체라도 보는 것 같은 시선을 던지더니 부장실로 쪼르르 들어갔다.
저 간신배 같은 새끼. 부장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저 안에 들어가서 그러겠지.
부장님 어제 많이 당황하셨죠? 동기를 대신해서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부장은 그새 좋다고 웃어댈 게 뻔했다.
생각만 해도 역겨워서 진태호가 사라진 쪽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려주었다.
어찌 됐든 이 모든 건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어제 같은 날은 술을 자제했어야 됐는데.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박경수 일까지 더해져서 아직 터지지 않았을 뿐,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하고 말 시한폭탄이었다. 그게 하필 팀 회식 자리에서 터져 가지고.
“아침부터 제대로 한따까리 했네.”
송이가 자리에 앉자 옆자리의 최 대리가 부스스한 몰골로 의자를 쭉 밀며 다가왔다. 이 인간도 어제 꽤 달렸구만. 상태가 좋지 않은 얼굴을 보니 대충 사이즈가 나왔다. 어제 하필 최 대리 옆에 앉아서는. 말술인 이 사람하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달렸으니 나가떨어질 수밖에.
송이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주당 유전자를 타고났지만 최 대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주가였다. 180이 넘는 키에 100kg에 육박하는 체형이니 술빨 하나는 제대로 받았다.
“한송이, 어제 노래 잘 부르더라. 골반도 제대로 돌리던데. 손에는 부장님 가발 들고.”
최 대리는 입으로 박자를 흥얼거리면서 놀리듯이 몸을 흔들어댔다. 이 인간들이 하나같이 속을 못 긁어서 안달인지.
“입사할 때만 해도 피부 미인이었는데. 피부 푸석해진 거 봐라. 절대미녀 한송이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 이거나 마셔.”
최 대리는 한껏 놀리더니 숙취해소 음료를 그녀에게 건넸다. 일주일에 7일은 술을 마셔대는 인간답게 그의 자리에는 언제나 숙취 음료가 세팅되어 있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주당은 주당이 챙긴다고, 그가 건네는 숙취 음료를 받아들고 바로 입에 들이부었다. 이게 진짜 숙취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믿고 마시면 플라시보 효과라도 있다면서 최 대리가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어제 집에는 잘 들어갔어?”
“잘 들어갔으니까 오늘 출근을 했겠죠.”
“그렇게 뻗어놓고도 집은 참 잘 들어간단 말이야. 어제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내가 택시 같이 타주겠다고 했더니 됐다고 어찌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지. 내가 더러워서 안 데려다줬다.”
그것도 송이는 다 생각이 났다. 얼마나 위태위태해 보였으면 최 대리가 데려다준다고 했을지. 그런데 주당이라고 자존심은 있어서 술 마시고 누가 데려다준다고 하면 기겁을 하고 거절하곤 했다. 대학교 때도 차라리 길바닥에서 잤으면 잤지 누가 데려다준 적은 없었다. 그것도 주사라면 주사였다.
이놈의 술 다시는 마시나 봐라.
이런 다짐만 적어도 500번은 했을 것 같다. 내일까지만 먹고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다짐처럼, 다시는 이렇게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 또한 얼마 가지 못했다. 며칠 뒤면 또 술을 마시다가 아침에 속이 쓰리다며 후회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점심 콩나물국 콜?”
“콜.”
이것만큼은 최 대리와 의사가 잘 맞았다. 과음을 한 다음 날은 회사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콩나물국 집에서 해장을 하는 게 거의 루틴이었다.
아침에 먹은 것도 없이 속만 비워냈더니 속이 더럽게도 쓰렸다. 점심시간이 되려면 2시간도 더 버텨야 했다. 오늘따라 숙취 음료의 플라시보 효과도 잘 먹히지 않았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메일함을 열었다.
“하… 씨….”
오늘따라 거래처에서 온 메일이 수두룩했다. 오늘 제대로 날을 잡았는지 거의 메일이 폭탄급으로 쌓여 있었다. 오후에는 외근도 나가야 되는데. 외근 갔다가 바로 퇴근도 못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야 될 판이었다.
“한 대리야. 오늘 부장님이 왜 더 빡쳤는지 알아?”
최 대리는 일을 하러 자리로 돌아갔다가 다시 송이에게 다가왔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저기.”
최 대리가 턱짓으로 송이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컴퓨터와 모니터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책상의 의자가 텅 비어 있었다.
“오늘 신입 들어오기로 했잖아.”
“신입이요?”
“이게 아주 그냥 정신을 놓고 사는구만. 전에 신입 들어온다고 드디어 부사수 들어온다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아… 맞다.”
송이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 지난주에 조 부장이 팀원들을 불러 모아놓고는 신입이 들어올 예정이라고 공지를 했었다. 새로 들어가는 프로젝트의 PPT 자료를 만드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일주일에 딥야근을 5일이나 하는 부작용으로 기억 상실까지 오고 있었다.
“아직 안 왔어.”
“네?”
“신입이 첫날부터 한 시간 넘게 지각이야. 부장이 빡칠 만하지. 어디서 폐급 들어오는 거 아니냐고 지랄하던데.”
순간 아까 옥상에서 마주쳤던 그 껄렁껄렁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표정이 왜 이래?”
최 대리는 송이의 표정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마 아니겠지. 설마.
“여기가 마케팅 부서 맞나요?”
그때 낯설면서도 귀에 익은 듯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니 아까 담배를 권하던 얼굴이 씩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