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한송이 대단하다. 역시 내 친구야. 그래야 한송이지.
수화기 너머에서는 박수까지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안 닥칠래. 오늘 최악이네 진짜.”
정 과장의 냄새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뛰쳐나와 바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변기통을 붙잡고 10분은 계속 게워냈던 것 같다. 그제야 좀 온몸의 알코올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듯하여 살 것 같았다. 진이 다 빠진 상태로 사무실에 들어가면 정 과장의 공격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옥상으로 올라왔다.
평소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피우던 이 공간은 이제 업무가 막 시작된 시각인지라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냐 오늘? 조 부장한테 졸라 까이는 거 아니야?
“어제는 진짜 참으려고 했는데… 조 부장 그 새끼 얼굴 보니까 그게 안 되잖아.”
-친구야 고생이 많다. 너를 보면 가끔 백수여서 다행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그래, 백수 많이 해라.”
송이는 머리를 한번 크게 넘기며 숨을 내쉬었다. 탁 트인 곳에서 공기를 들이마시니 좀 나았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 안에는 뭔가 콱 막혀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박경수한테 연락은 없어?
송이가 어제 술로 달리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요즘 회사 일 때문에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했더니 그사이에 어린 여자를 꼬셔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아프다는 경수에게 죽이라도 사다 줄까 하여 그의 자취집을 방문했다가 현장을 딱 걸렸다.
더 짜증 나는 건 대학생 정도 된 앳되어 보이는 여자가 덜덜 떨고 있자 송이와 시선이 마주치지 않게 그 앞을 가로막고 서는 태도였다. 홧김에 그대로 그의 중심부에 발길질을 하고 그의 자취집에서 나와버렸다.
“어제 술 마시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 잘 걸렸다 싶어서 한마디 해줬지.”
-뭐라고?
“니 꺼는 졸라 작아서 그 여자애 만족이나 시켜줄지 모르겠다고. 그 여자애도 젊고 거기 졸라 큰 애하고 양다리 걸치고 있을 거라고.”
수화기 너머에서는 지나가 큭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새끼 고자나 됐으면 좋겠다. 더 세게 차줄걸.”
송이는 그날을 생각하니 다시금 울분이 차올랐다. 더 퍼붓지 않고 온 게 한이 되었다. 그 앞에서 쌍욕을 마구 날려줬어야 됐는데.
“그 집에 다시 찾아가서 욕이라도….”
수화기에 대고 말을 하고 있는데 쎄한 기분이 들었다. 송이는 잠시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벤치에서 다리를 꼬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야, 이만 끊자. 이따 연락할게.”
송이는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다 들은 건가. 조금 전에 통화를 한 내용들을 복기해 보았다. 조 부장 이야기도 했고, 박경수 씹는 이야기도 했고.
“ㅆ…”
순간 입 밖으로 다시 욕이 새어 나올 뻔했다. 얼굴은 번지르르한 게 입가에는 기분 나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거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다른 부서 사람인가? 머릿속의 기억을 빠르게 뒤지며 스캔하고 있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나이는 비슷해 보였다. 그러면 직급이 그렇게 높지는 않을 텐데. 또 이상한 소리 퍼지는 거 아니야? 조 부장 씹은 얘기도?
물밀 듯이 밀려드는 불안감에 송이는 슬금슬금 벤치 쪽으로 가서 앉았다. 흘금 그의 동향을 살피면서 어디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인지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비주얼이 상당했다. 이런 남자가 우리 회사에 있었나? 의심이 들 정도로.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에, 콧대도 높고, 눈매도 인상적이었다. 얼굴도 작아서 비율도 좋았다. 꼬고 있는 다리도 길쭉길쭉했다.
“담배?”
남자가 담뱃갑을 내밀었다. 송이가 아닌 척하면서도 다가와 앉아서 흘금거리며 쳐다보고 있으니 담배가 없어서 그런 줄 알았나 보다.
여기서 거절을 하면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까 통화를 하던 걸 듣기는 했는지, 어떤 부서 사람인지 알려면 뭐라도 접점이 필요했다. 그녀는 슬쩍 담뱃값으로 툭 삐져나온 담배 한 대를 손으로 쏙 빼 왔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슬쩍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지만 남자는 받아주지도 않고 담배를 옆에 툭 놓아두었다. 그가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는 것을 그녀가 홀린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화보가 따로 없었다. 어느 잡지에서나 보던 풍경이었다. 담배 연기를 뿜으며 살짝 인상을 쓰고 있는 어느 연예인의 모습.
남자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송이를 미심쩍게 바라보다가 안 주머니를 뒤지더니 라이터를 꺼냈다. 그의 정갈한 손가락이 지포라이터의 불을 켜 그녀의 앞에 가져다 주었다.
이번에는 라이터가 없어서 보는 줄 알았나 보다. 송이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불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스르륵.
담배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년 전에 끊고 처음 피우는 담배였다. 오랜만에 피우는 거여서 깊게 들이마시지는 않고 내뱉었다.
“어느 부서에서 근무하세요? 처음 뵙는 거 같은데.”
송이는 ‘딱히 네가 궁금해서 묻는 건 절대로 아닌데 그냥 담배 피우는 김에 묻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속으로는 혹시라도 마케팅 부서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며.
남자는 대답은 하지 않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그딴 질문을 던지냐는 듯이.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여쭤본….”
“첫 출근이에요. 당연히 처음 봤을 거고.”
“아, 첫 출근….”
송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력은 아닌 것 같고, 딱 봐도 신입인데. 첫 출근하는 신입이 이 시간에 여기서 담배를 피우고 있어도 되는 건가. 사수하고 같이 나와서 피우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들어가기 싫어서요.”
들어가기 싫다고? 사무실을? 뭐지, 이 또라이는. 첫 출근이면 사무실에 앉아서 어리버리 타고 있어야 정상인데, 직장 10년 차는 되는 것처럼 이 여유 있는 말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출근이면 상사분들께 인사 드리고 있어야 할 시간 아니에요?”
“그런 것도 해야 되나.”
“…….”
“귀찮은데.”
남자는 한없이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담배를 깊게 빨더니 후우, 하고 길게 뱉어냈다. 이 회사가 그래도 명색이 대기업인데 너무 호구 취급을 당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울컥하기도 했지만 그냥 참았다. 어차피 같이 일할 사람도 아닐 텐데 뭐라고 하는 것도 웃긴 거고.
그나저나 이 사람은 전혀 회사를 다니고 싶어 하는 의지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첫 출근을 하는 신입사원이라면 으레 지니고 있을 만한 적극성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나온 티가 역력하다고나 할까.
이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면 채용 과정을 어렵게 통과했을 텐데 저 시건방짐은 뭐지.
“회사 일이라는 게 귀찮다고 안 하거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요?”
개념을 아주 말아먹었나. 이 인간이 들어갈 부서가 어디일지 벌써부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제대로 된 고문관이었다. 얼굴은 그나마 반반해서 잠깐 보는 즐거움이나 있지, 이런 신입을 받게 되는 부서는 정말 절망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재떨이에 담배를 툭툭 털더니 물었다.
“그런데 조 부장이 누구예요? 같이 일하는 사람이에요?”
남자는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로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송이를 바라보았다. 송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아까 통화를 다 듣고 있었다.
“뭐 새끼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 같던데. 조 부장 새끼라는 인간이 많이 갈구나 보네요.”
송이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귀가 밝은지 아주 정확하게 들었다. 그런데 남자는 조 부장을 아는 것처럼 ‘새끼’를 붙이며 까는 듯이 말을 했다. 이 인간은 뭐지, 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게 아니라… 전 직장에서 조 부장이라고 있었거든요. 하하. 그 사람 생각이 나서. 하하.”
“아… 그 조 부장 새끼가 생각이 나셨구나.”
그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까딱거렸다. 아까는 잘난 비주얼에 가려져 몰랐는데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참 불량스러웠다.
“그러면 졸라 작다는 사람은 헤어진 남친 얘기예요?”
“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송이는 이번에는 정말 욕이 나올 뻔했다. 아무리 통화가 들렸다고 해도 모르는 사람 얘기인데 저렇게 노골적으로 해도 되는 건가. 예의라고는 밥 말아먹은 태도에 점점 짜증이 올라왔다.
“왜 헤어졌어요?”
오늘 생전 처음 봐놓고서 친한 사이처럼 묻는 건 뭔데. 뭐 이딴 게 다 있나 싶었다. 혹시 이전에 본 적이라도 있었나? 그럴 리는 없었다. 이런 비주얼이라면 기억에서 지워졌을 리가.
“남의 사생활이 뭐 그렇게 궁금해요?”
“다 들리게 통화한 게 누군데.”
저게 진짜. 자꾸 신경을 살살 긁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나랑 놀자는 거야 뭐야.
“그렇게 작나.”
“저기요.”
“양다리 걸치는 새끼는 빨리 손절하는 게 답이에요.”
그 와중에 또 맞는 소리를 지껄인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것 같은 기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들어보니 진태호였다.
“왜.”
-어디야? 부장님이 찾으셔. 빨리 와.
송이는 바로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옥상에 괜히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가면 얼마나 까일지 앞이 캄캄했다.
“조 부장이 오래요?”
송이는 대답도 하지 않고 쓴웃음만 짓고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러고는 사무실로 돌아가려다가 멈춰서 돌아섰다. 오지랖 같기는 했지만 한마디는 해주고 싶었다.
“여기 그렇게 쉬운 곳 아니에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가 멀어져 가는 동안 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재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