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다시 겨울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코가 꽁꽁 묶은 머플러와 두툼하게 챙겨 입은 점퍼에도 불구하고 찡하니 빨갛게 달아오른 계절. 그래도 히터가 빵빵하게 돌아가는 가게 안 사람들의 옷차림은 한결 가볍다.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친 기획실 류수미가 아직 오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는 대신, 미리 주문을 넣었다. 다행히 수미의 친구는 금방 왔다. 유명 건설 회사에 다니는 어릴 적 친구인데, 남자라 종종 부부냔 질문을 받지만 둘 다 서로가 취향이 아닌 데다 비혼주의라 지금까지 종종 같이 어울려 논다. 친구가 코트를 벗고 자리에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집게를 넘긴 수미가 음료수를 시켰다.
“너네 회장 구속됐다며?”
친구가 고기를 뒤집으며 대뜸 뱉는 말에 수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음.”
“돈 많은 것들이 더 하다. 가사 도우미를 때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주제가 불편하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까. 수미가 그쯤 해서 도끼눈을 거뒀다. 주가가 좀 떨어지긴 했지만 케이마이엔 여행 사업이 대대적으로 대박을 치고 있기 때문에 회사가 망할 일도 없을 테고. 어깨를 으쓱한 수미가 사이다 캔을 따서 잔에 정확히 반반 따랐다.
“그러게, 그런 인간은 콩밥 좀 먹어야지.”
그런데 변호사 오지게 비싼 놈으로 구했다던데. 그래? 확실히 돈은 많고 볼 일이네.
시답잖은 대화를 끝으로 그 주제는 사라졌다. 대신 주식 얘기가 좀 나왔다. 고기를 집어 먹으며 열심히 지금이 미국 전기차 회사 주식을 매수할 타이밍인지 아닌지를 토론한다. 그걸로 한참 떠들자 불판 위가 비었다.
고기를 2인분 더 시킬까, 아니면 자리를 옮겨서 가볍게 맥주라도 할까 이야기를 나누던 수미가 막 가게로 들어오는 어떤 사람을 보고는 어, 했다. 친구도 자연스레 수미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 가게로 막 들어와 두리번거리던 이도 수미를 발견했다.
“어, 다정 씨. 밥 먹으러 왔어요?”
수미가 말을 하며 다정의 뒤를 살핀다. 다정은 혼자였다. 어깨를 조금 넘는 길이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에서나 밖에서나 다분히 사무적인 표정.
“오늘 동창들 좀 보기로 해서요.”
다정이 잠깐 수미의 친구에게도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다정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던 수미의 친구가 젠틀한 미소를 지으며 같이 눈인사를 건넨다. 그걸 지켜보던 수미의 어깨가 잠깐 으쓱.
“그래요. 가 봐요.”
“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다정은 넓은 홀에 자리를 잡는 대신, 단체 룸이 있는 안쪽으로 이어지는 복도로 갔다. 친구가 다정이 사라진 복도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누구야?”
“같은 팀 직원.”
“으음, 괜찮네. 애인 있어?”
비혼주의자가 연애를 안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니니까. 친구의 사심 듬뿍 담은 질문에 수미의 눈썹이 다시 치솟는다.
“어.”
“그래? 아쉽네. 손에 반지는 없던데.”
반지가 왜 필요하겠니.
“개랑 사귀거든.”
“걔? 걔가 누군데.”
“걔가 아니라 개. 주인 뒤 졸졸 따라다니는.”
그쯤 해서 수미는 말을 아꼈다.
“아서라. 마흔 줄 넘은 아저씨면 또래를 찾으세요.”
남은 사이다를 마저 비운 수미가 일어난다. 그냥 관심도 못 가지냐며 친구가 잠시 투덜거린다.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끼리 모이기로 했다. 방엔 이미 고기 익는 냄새가 한참이었다. 자기도 가면 안 되냐고 자꾸 조르는 윤하를 따돌리고 오느라 다정이 제일 늦었다. 왜 이제 오냐며 여기저기서 다정을 반겼다. 뭔가 야한 농담을 하고 있던 세희가 제일 크게 다정을 반겼다.
“왔어?”
“응.”
그러곤 룸을 한 번 돌아보고는 고개를 숙인다. 친구들 사이사이에 못 보던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연말이니 송년회 겸해서 각자 남편이며 만나는 남자들하고 같이 모이기로 했었다. 그리고 다정이 이 자리에 윤하를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뭐야, 다정이 너 혼자 왔어?”
저번에 세희와 만나는 자리에서 윤하가 단단히 깽판을 쳤기 때문이다. 둘이 잘 맞을 것 같은데 어쩜 그렇게 서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헐뜯고 싸우는지.
다정의 자리에 올려 둔 가방을 치우며 미영이 한소리 한다. 다들 다정의 남자 친구가 온갖 유명한 미녀들과 염문설을 뿌리고 다녔던 ‘그 회장님 아들 오윤하’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에, 세희를 제외하고는 윤하를 한 번도 못 본 친구들은 단단히 실망한 표정이었다. 다정이 대충 대꾸한다.
“바쁘대.”
“에이, 그래도 이런 자리면 시간 좀 내야지.”
미영이 섭섭하겠다며 다정의 손을 잡는다. 미영과 세희를 제외하면, 다른 친구들의 표정은 좀 애매했다. 다정과는 뜨뜻미지근한 사이이기 때문에 속으로는 슬쩍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이다. 다정이 눈치껏 말을 돌렸다.
“너는. 애들은?”
“시엄마가 봐주고 있어.”
코트를 벗은 다정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하나하나 친구의 남자 친구들을 소개받았다. 미영의 남편은 결혼식 이후에도 두어 번 봤기 때문에 인사말이 가장 간단했다.
“수지, 프러포즈 받았대.”
누군가 제일 늦게 온 다정을 위해 한차례 자리를 휩쓸고 지나간 주제를 꺼낸다. 작년 겨울쯤 지금 남자 친구를 소개팅에서 만났다는 것쯤은 다정도 기억하고 있었다. 막 양파 절임을 입에 넣으려던 다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축하해. 축하드려요.”
이미 한차례 들었지만 언제 들어도 축하는 기분이 좋은 법. 수지가 수줍게 웃고 수지의 남자 친구는 안경을 약지로 올리며 헛기침한다. 어색한 자리에선 자기나 자기 사람을 깎은 농담이 제일 편하다고 생각하는 수지의 남자 친구는, 팔꿈치로 수지의 어깨를 톡 친 뒤 이런 말을 했다.
“프러포즈 반지를 두 번이나 바꿨다니까요. 수지가 반지 호수를 속여서.”
수지의 얼굴이 잠깐 빨개진다.
“속인 게 아니라 예전엔 그 호수로 반지 맞췄었다니까.”
“언제. 자기 애기 때? 돌 반지 얘기하는 거 아니지?”
좌중에 가벼운 웃음이 터진다. 유달리 손가락만 통통한 게 남모르는 콤플렉스인 수지만 웃지 않고 남자 친구를 째려본다. 눈치껏 세희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다정이 너 밥 안 먹고 왔지. 고기 좀 더 시킬까? 뭐 먹을래.”
“괜찮아. 있는 거 먹으면 돼.”
말없이 있던 은혜의 남자 친구가 조용히 말한다.
“따뜻한 거 드세요. 제가 구울게요.”
그러곤 호출 벨을 누른다. 세희가 깔깔 웃었다.
“진규 씨는 지금이 인사 빼고 첫 마디인 거 아세요?”
은혜의 남자 친구가 멋쩍다는 듯 뺨을 잠깐 긁적인다.
“그런가요.”
막 들어온 직원에게 술도 좀 더할 겸 고기를 넉넉하게 주문한다. 직원이 막 나가기 전에 미영이 남편의 전화가 울렸다. 잠깐 나가 전화를 받고 돌아오더니, 이윽고 미영에게 잠깐 귓속말을 한다. 미영이 대번에 싫은 표정을 지었다.
“뭐 했다고 벌써 가재?”
“애가 당신 찾는다잖아. 벌써 한 시간째 계속 울고 있어서 엄마가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전화 왔어.”
“그래도 그렇지. 내가 이렇게 친구들 만나는 일이 흔해? 정 그럼 당신 먼저 가.”
“어떻게 그래. 엄마 찾는다는데 엄마가 가서 달래 줘야지.”
그렇게 말을 주고받은 미영의 남편이 미영의 어깨를 주물거리며 좌중에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미영의 표정은 영 좋지 못하다. 그걸 빤히 지켜보던 세희가 소주를 한 모금 털어 넘기고는 잔을 내려놓는다.
“석호 씨 먼저 가세요. 미영이 말마따나 친구들 만나는 것도 오랜만인데. 자리 주최하는 게 보통 전데 제가 성깔이 더러워서 자리가 몇 개월간 없었거든요. 그렇다고 미영이를 애 없이 외출하게 도와주시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 디스인 줄 알았는데 역시나 마지막 말에 뼈가 있다. 세희가 편들어 주는 것에 힘을 입은 미영이 제 옆자리에 있는 다정의 팔을 꼭 껴안으며 남편을 돌아봤다.
“그래. 오늘 하루는 당신이 애 좀 봐.”
미영의 남편이 당황한 표정으로 묻는다.
“엄마한테는 뭐라 그래?”
“뭐 하긴. 나 친구들이랑 고기 먹고 술 먹는다 그래!”
미영은 보란 듯이 다정에게 술을 권유하고는, 자기 맥주를 홀랑 비운다. 민망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미영의 남편이 더 말 못하고 점퍼를 챙겼다. 뭐라 미영에게 귓속말하더니 그래도 어색한 미소는 하나 남기고 가는데, 남편이 나가자마자 미영이 큰소리로 콧방귀를 뀐다.
“웃겨. 집에 가서 보자면 누가 무서운 줄 알아.”
원래 부부싸움은 건너 건너 귀로 들을 때 재밌는 거지 앞에서 벌어지면 누구 편 하나 들기도 껄끄럽고 불편한 법이라,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쌓인다. 미영만 안 좋은 심기를 떨쳐 내려는 듯 부지런히 술을 마셨다. 그에 세희가 맞춰 준다.
“우리 짠 한번 할까요, 마지막 멤버도 왔는데 아직 짠을 못 했네요.”
차를 가져왔다며 사양하는 은혜의 남자 친구만 빼고 다들 술잔을 든다. 벌써 몇 개월째 금주 아닌 금주 중인 다정도 맥주를 조금 받아 잔을 들었다.
“미영이의 성공적인 외박을 위하여!”
언제 술자리가 외박까지 번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영의 마음엔 쏙 들었다. 술을 마시기도 전에 웃음을 깔깔 터트린 미영이 좋다고 후창한다.
“좋아! 오늘 처녀 적 기분도 낼 겸 나이트도 가고 그러자.”
미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이 드르륵 열린다. 다정을 붙잡고 너도 오늘 남자 친구 없으니 같이 가자고 막 꼬시던 미영도 고개를 들었다. 다정이 뒤늦게 돌아보기 전, 다정이 쥐고 있던 맥주잔이 쏙 빠져나간다.
“많이 기다렸어요?”
흠칫, 소름이 돋아 다정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이내 돌아본 다정이 제가 들고 있던 맥주잔을 강탈한 이를 위아래로 조심스레 훑었다. 여기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둘째 치고, 아침에 봤을 때랑 왜 옷이 달라졌을까?
다정의 친구들 시선이 윤하의 발끝부터 천천히 움직였다. 윤이 반지르르하게 흐르는 회색 코트와 한쪽 손에 든 브리프 케이스, 안에 받쳐 입은 푸른빛의 슈트와 흰 셔츠의 색 조합이 훌륭하다.
긴 다리와 떡 벌어진 어깨를 타고 시선이 올라가면, 거기엔 사진으로만 봤을 땐 자기 같은 사람들에겐 눈길 한번 안 줄 것 같던 차가운 인상 대신, 시종일관 다정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황홀한 얼굴이 있다. 멍하니 윤하를 보던 미영이 더듬더듬, 자기 남편이 앉았던 의자로 옮겨가 다정의 옆자리를 내줬다.
“늦어서 미안해요. 다정 씨.”
다들 그러거나 말거나 다정은 지금 상황이 못내 떨떠름하다. 방금까지는 ‘오윤하가 여길 어떻게 왔지’가 최고 의문이었다면 지금은 윤하의 말투가 왜 저 모양인지가 가장 큰 의문이 된다.
어제까지만 해도 잠자리에서 이상한 거 요구하는 바람에 거실에서 잤으면서. 그래서 아침까지도 툴툴거렸던 걸 기억하는 다정이 소름 돋는다고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떤다. 그때 여태 조용하던 미영이 드디어 입을 벌렸다.
“우와…….”
가장 가까이서 ‘그 오윤하’를 보게 된 미영의 첫 음성이었다. 그걸 받으며 수지와 은혜도 중얼거렸다. 저 얌전한 윤다정이 포털 사이트에 이름을 치기만 해도 아직 스캔들 기사가 수십 개 남아 있는 오윤하와 왜 사귀나 했더니.
“다정이가 얼굴을 봤구나.”
감추지 못하고 속에서 진심이 우러나온다. 그냥 잘생긴 게 아니라 미친 듯이 잘생겼다. 드디어 윤하가 다정에게서 눈을 떼고는 좌중을 훑었다. 시선이 잠시 세희 쪽으로 갔을 땐 눈에서 스파크가 튄 것 같지만, 눈치챈 사람은 없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윤하라고 합니다.”
깍듯하고 정중하게 말한 윤하가 싱긋, 웃었다. 얼굴에 걸린 근사한 미소가 더 깊어졌다.
“다정 씨한테 들었을 때보다 훨씬 미인분들이시네요.”
얼빠진 다정은 그냥 이 사람이 오윤하의 껍데기를 강탈한 도깨비쯤이 아닐까, 싶다. 다정 씨 호칭 뭐야. 저 사회적인 겸양과 예의를 골고루 떠는 저 남자는 누구냐고.
“어머, 다정이가 그랬어요?”
“에이 뭐 그런 말을.”
별말도 아닌데 분위기가 막 화기애애해지며 앞다퉈 까르르 웃는다.
“윤하 씨는 다정이 어디가 좋아요?”
처음 친구들이 다정의 연애에 가졌던 의문이 다정이 왜 저 오윤하와 사귀냐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왜 오윤하가 다정과 사귈까?’로 바뀌었다. 시종일관 매너 있고 진중하니 상냥하게 행동하고 성격도 좋아 보이는 저 미남이, 윤다정이랑 왜? 그래도 계속 얼굴 보며 쌓은 정이 있으니 의문이 더럽게 추저분해지지는 않지만, 잠깐의 질투 같은 건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나도 궁금해. 누가 먼저 반했어요? 다정이 쟤가 자기 얘기는 원체 말 안 하는 애라.”
지금 다정의 옆을 딱 지키며 쉽게 깨질 수정 다루듯 다정을 챙기는 것만 봐도 그런데 심지어 돈도 많다. 술잔도 몇 바퀴 돌았겠다. 배도 적당히 살살 부르겠다. 안주로는 그만한 게 없다. 원래 이런 얘기 좋아하는 미영도 질문에 한 숟가락 얹는다.
“윤하 씨가 말 좀 해 봐요.”
이 자리에서 시큰둥한 건 세희뿐이다.
“글쎄요.”
말해도 돼? 하듯 윤하가 다정을 잠깐 본다. 다정은 이쯤 되니 그냥 이걸 윤하의 새로운 장난쯤으로 여기기로 했다. 처음 윤하와 엮일 때부터 혼비백산할 일을 너무 많이 겪어서 그런지 이젠 놀라는 것에도 지쳤다. 알아서 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윤하가 다시 웃으며 턱을 괬다.
“제가 먼저 반했어요. 데이트하자고 조르고 꽃 보내고.”
“어머머.”
얼씨구.
“그래도 저 싫다길래 밥 세 번만 딱 같이 먹어 달라고 그랬죠. 그래도 싫으면 깔끔하게 포기하겠다고.”
“그래서 세 번 밥 먹고 다정이가 받아 준 거예요?”
“아니요.”
“그럼요?”
“그때부터 다정 씨 옆에 남자가 서 있기만 해도 질투 나서 못 견딜 정도였는걸요. 아마 그 뒤에도 싫다고 해도 기회 노렸을 거예요.”
절씨구. 북 치고 장구 치며 그때를 포장하는 윤하 때문에 다정은 코에서 맥주가 나올 지경이다.
“다정이가 그렇게 좋았어요?”
“네.”
“그럼 그래서 대체 둘이 어떻게 사귀게 된 건데요. 사귀자고 할 땐 뭐라고 했어요?”
성급한 질문에 윤하가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더니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고는 천천히 다정의 손을 찾아 잡는다. 이번엔 또 어떻게 나오나 보자며 잠자코 가만히 있던 다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윤하의 입술이 잠깐 다정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가볍게 부딪히고 떨어진 자리를 쓰다듬으며 윤하가 다정을 길게 쳐다봤다.
“좋아하면서,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다정 씨 많이 울렸어요.”
문득 윤하가 품에 손을 집어넣는다.
“그때 다정 씨한테 말했죠.”
달칵, 소리를 내며 보드라운 벨벳으로 싸인 조그마한 상자가 입을 벌린다.
“당신이 흘렸던 눈물만큼 보석을 선물하겠다고.”
과장 좀 보태 된장찌개 뚝배기만 한 다이아가 올라간 반지에 미영이 벌떡 일어나기까지 하며 지켜봤다. 반지가 손에 끼워질 때까지 윤하의 얼굴만 보던 다정이 뒤늦게 눈을 내리깔았다. 망설이던 다정이 일단 궁금한 것부터 묻는다.
“반지 호수는 어떻게 알았어.”
미영이 괜히 다정의 등을 찰싹찰싹 친다.
“어우, 그렇게 손 자주 잡는데 윤하 씨가 모르시겠어.”
젠틀한 미소를 짓고 있던 윤하가 슬쩍 다정의 귀에 속삭인다.
“아닌데, 많이 빨아 봐서 알았는데.”
아무래도 이 남자가 오윤하의 탈을 쓴 도깨비란 말은 취소다. 겉모습이며 행동이야 어쨌든 속 알맹이야 어제 잠자리에서 얼굴에 싸도 되냐, 안 되면 자기랑 결혼해야 한다고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던 인간하고 똑같았다.
다만, 어젯밤 다정이 기함하며 밀쳐 냈던 그 말의 중심이 ‘결혼’에 있던 게 아닐까……. 다정이 그제야 윤하의 문장을 재조합한다.
자리에 늦은 죄로 자기가 와인 좀 대접하고 싶다는 윤하의 청에 모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다. 차를 안 가져온 사람은 택시를 잡았고 다정은 술 한 모금 안 마신 윤하의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자꾸만 손을 들여다보던 다정이 반지를 빼려고 할 때, 곁눈으로 다정을 계속 살피고 있던 윤하가 손을 뻗었다.
“잘 어울리는데 왜. 끼고 있어.”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쏟아지는 윤하의 물량 공세엔 다정도 좀 지쳐서 지금은 ‘그냥 그래’, ‘제발 그냥 두고 가.’ 그리고 ‘왜 안 입냐, 안 신냐, 안 먹냐 묻지는 마.’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된장 뚝배기만 한 다이아 반지는 아무래도 부담스럽고, 회사에 만약 이걸 끼고 간다면 결혼한다는 소문이 쫙 퍼질 게 자명했다.
“부담스러워.”
“부담 가지라고 준 거 아니야.”
반지를 못 빼게 다정의 손을 꼭 잡으며 윤하가 딱 잘라 말한다.
“회사에도 비밀로 하고 있는데 내가 갑자기 이런 반지 끼고 가면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어.”
다정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윤하의 손을 쳐내지도 않았다. 침착한 다정의 설득에 윤하가 속으로 코웃음을 친다. 이 여자는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비밀 연애 중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긴.”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말을 잇는다.
“윤다정이 새끈하고 돈 많은 남자 만나는구나 하겠지.”
신호에 걸려 잠시 차가 멈췄다. 이내 완전히 고개를 돌려 다정을 쳐다보던 윤하가 둘만 있는 차에서 목소리를 살며시 내리깔았다. 비밀스럽고 끈적끈적한 투로.
“떡도 잘 치고.”
“에휴.”
이젠 저런 말엔 진저리도 안 쳐진다. 그런 다정의 반응에 윤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왜? 나 며칠 전에 되게 감동받았잖아. 당신 입에서 쌀 것 같단 말 나온 건 처음…….”
감동 받을 거 참 없다고 생각하며 다정이 윤하의 입을 턱, 막았다. 그러곤 세모눈을 한 채 노려보다 코로 나오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거 가지고 더 말 꺼내면.”
“꺼내면?”
“이 반지 네 입에 쑤셔 넣어 버릴 거야.”
나중에 변기에서 나온 거 찾아 뒤적거리든가 말든가. 다정이 덧붙이는 말에 눈을 깜박이던 윤하가 뒤차가 빵빵거리는 것에 뒤늦게 차를 출발시킨다. 자긴 상식적인 척하지만, 속으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윤다정이라면 진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안 들어가?”
목적지는 석현의 바였다. 윤하 손에 이끌려 네 번 정도 이곳에 와 주인과 인사를 나눈 적 있는 다정이 익숙한 계단을 밟다 말고 세희를 돌아봤다. 담배도 안 피우면서 가만히 서 있던 세희가 길 반대편을 고갯짓했다.
“아이스크림 사 먹게.”
잠깐 말없이 세희를 보던 다정이 팔짱 끼고 있던 윤하의 팔을 풀었다. 그러곤 먼저 들어가 보라고 훠이훠이 손을 젓는다.
“나 세희랑 같이 편의점 갔다가 들어갈게.”
“아이스크림은 가게에도 있는…….”
“씁.”
다정이 입을 앙다물며 노려본다. 거기서 윤하의 입술이 비죽, 오리처럼 튀어나오지만 다정은 빨리 가라며 등을 떠민 뒤 이미 세희의 옆에 선 뒤였다. 자기 팔에 자연스럽게 끼워지는 다정의 팔을 보던 세희가 문득, 코트 안에 들어간 다정의 손을 찾아 깍지를 꼈다. 그러곤 윤하를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다정아, 내가 아이스크림도 사 주고 젤리도 사 줄까?”
잠깐 마주친 윤하와 세희 시선 사이에 스파크가 파바박, 튄다. 소리 없는 전쟁.
“무슨 젤리야.”
“내가 사 주는 건데 안 먹을 거야?”
“……다 먹어야 해?”
승자는 세희.
“그러엄. 하나 먹을 때마다 내가 뽀뽀도 해 줄게.”
“어휴, 싫어.”
패자로 남겨진 윤하가 있는 힘껏 미간을 구기다 쿵쿵 계단을 밟으며 내려간다. 왜 저런 여자를 친구로 두고 사는 거야, 윤다정은? 성질도 나쁘고 사사건건 시비인데. 그 문장이 자기소개가 될 수도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하지도 않는 윤하의 마음.
“토끼 알 아이스크림 먹을래? 아니면 비행기 보이?”
“아냐, 됐어.”
“아이스크림 먹으러 와서 다 싫대. 그러면 왜 따라왔대. 그 성질 나쁜 양아치랑 싸웠냐?”
저번에 세희의 가게에서 윤하와 대판 싸운 이후로 세희는 윤하를 성질 나쁜 양아치라고 칭했다. 자기 남자 친구 일이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다정도 거기엔 별로 반론을 꺼내지 않는다.
“네가 할 말 있는 거 같아서.”
그 말에 아이스크림을 고르던 세희가 잠깐 고개를 빼고 다정을 봤다. 아르바이트생의 눈치에도 문 한참 열어 놓고 고르던 게 무색하게,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걸 쥐고 냉동고 문을 닫는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세희가 아이스크림의 꼭지를 뚝 따서 다정에게 건넸다. 그것까지 다정은 사양하지 않았다. 불룩한 다정의 주머니엔 윤하의 약을 올린 젤리도 들어갔다.
“송희 말이야.”
아이스크림만 쪽쪽 빨며 걷던 세희가 불쑥 어떤 이름을 꺼냈다. 대충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정은 놀라지 않았다. 나중이지만 세희에게 자기가 상훈 선배에게 섹파로 이용당하고 버려졌단 사실을 송희에게도 고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송희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임신했대.”
그러나 마지막 말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순간 사레가 들린 다정이 콜록콜록 기침을 뱉는다.
“뭐?”
“결혼한다더라.”
세희와 다정이 서로 말없이 마주 본다. 세희가 먼저 눈을 피했다.
“혼전 임신도 혼전 임신인데, 그 새끼가 회사에 또 썸녀 만들어 놓고 지랄하다가 한 번 걸렸었대. 근데 이송희 그년은 다 용서해 준 모양이더라. 제 팔자 지가 꼬는 거지.”
악담이라고 하기엔 쓸쓸한 어투.
“송희가 너한테는 그냥 뭐, 드라마에 나오는 일차원적 악녀 정도겠지. 가만히 있는 너한테 지랄하고 뭐 너나 내가 버린 쓰레기 주워다가 재활용해 보려 애쓰는 멍청이. 뭐, 그 정도.”
이내 세희의 고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근데 나는 그게 안 되네. 걔가 자존심만 세지 여기저기 구멍 난 년이란 거 알아서 그런가.”
반도 안 먹은 아이스크림을 눈에 띈 쓰레기통에 쑤셔 넣고 돌아온 세희가 손을 탈탈 턴다.
“어차피 이제 만날 일 없겠지. 너한테 괜히 얘기겠다 싶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
“속상해서. 또 이런 말 꺼낼 게 너밖에 없네.”
한숨을 푹 쉰 세희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휴, 그 미친년. 제대로나 살까 몰라.”
저 말이 ‘제발 내 귀에 더 얘기 들어올 것 없이 평범하게만 살아라.’라는 말인 걸 아는 다정이 그냥 세희의 팔에 자기 팔을 꼭 끼워 넣는다. 얼마간 걷자니 다정이 세희에게 불쑥 말을 꺼낸다.
“나, 송희 이해할 것 같아.”
김상훈을 그렇게 사랑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뭐? 무슨 성모 마리아세요? 나한테 왜 그 기집애 얘기는 꺼내냐고 머리채 잡지는 못할망정?”
다정이 킥킥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화해하고 얼굴 마주 보고 웃고 싶다고 말하는 거 아니야. 그럴 생각도 없고 계획도 없어.”
그냥, 자기 인생을 다 빼 건네줄 수밖에 없는 사랑이 있음을 이해하는 것뿐이다. 뒷말은 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가만히 멈춰 서서 자길 쳐다보는 세희의 손을 이끈다. 그런 사랑은 어리석다. 도박보다 더 위험하다. 역시, 이 말도 밖으로 꺼내진 않는다.
“너 양아치가 속 썩이냐?”
“아니야.”
“야. 말 나온 김에 반지 좀 보자. 이 새끼가, 너한테 뭐 잘못하고 돈으로 때우려는 거 아니지?”
다정의 손을 쥐고 빤히 들여다보던 세희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와, 씨. 몇백이 다 뭐냐. 천도 우습게 썼을 것 같은데.”
다른 건 몰라도 윤하의 돈만은 인정하는 세희가 거대한 다이아의 가격을 측정하다 이내 고개를 한 번 더 젓는다.
“난 너야말로 묻고 싶다. 애인 친한 친구한테도 질투하는 그 성정의 자식이 뭐가 그렇게 좋니? 뉴스에 난 회장, 걔 아버지 맞지?”
다정이 쿡쿡 웃었다. 그러다 마지막 말에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박.
그 시각. 와인이나 양주를 얼마 이상 시키지 않으면 입장도 안 되는 룸, 그것도 사람이 많을 때면 양주를 시킨다고 해도 줄 서야 하는 가게에서 당당히 제일 크고 몫도 좋은 방을 차지한 다정의 친구들이나 친구의 남자 친구들은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방금과 달리 묻는 말에 대꾸하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응하던 윤하가 이쯤 되면 윤다정 친구들한테 점수 다 땄겠지, 싶어 슬쩍 자리를 떴다.
건물 자체에서 흡연이 금지된 건 꽤 오래전 일이라, 손님들이 이용하는 흡연실 말고 직원들이 이용하는 건물 뒤편으로 석현이나 찾으러 어슬렁거리던 윤하의 눈에 뭐가 걸린다. 냉큼 달려가 세희와 하하 호호 웃으며 걸어오는 다정의 앞으로 달려간 윤하가 대뜸 다정을 낚아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근 백 년은 떨어져 있었던 사람처럼 애틋한 뽀뽀를 다정의 볼이며 이마에 쪽쪽 남기는 윤하가 세희는 그저 볼썽사납다. 다정 씨, 다정 씨, 하면서 닭살 돋게 예의 차릴 땐 언제고.
“어디 뭐 파병 갔다 오셨어요?”
잔뜩 비꼬는 말이 쏟아진다. 잠깐 다정을 붙들고 애정 행각을 벌이는 데 정신없던 윤하가 멈칫하고 세희를 꼬나봤다.
“댁은 집에 안 가?”
이름까지 다 아는 놈이 호칭도 없이 집에 안 가냔다. 그것도 반말로.
“뭐래? 나 오늘 윤다정 집에서 자고 갈 건데?”
세희는 윤하의 지뢰를 잘도 밟았다. 즉각 반응이 터졌다.
“뭐? 왜 댁이 다정이 집에서 자고 가.”
“근데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밥공기는 천 개도 덜 먹었을 놈이 말끝마다 다정이, 다정이. 나한테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런 말에 타격받을 윤하가 아니다. 그저 오늘 밤 다정의 집을 선점하겠다는 포고에만 집중한 윤하가 다정을 확 끌어당겨 제 뒤에 세웠다.
“어짜라고. 내 여잔데. 다정이도 별말 안 하거든?”
신경을 안 쓰는 것도 있지만 말해 봤자 윤하가 들어 처먹지 않을게 자명해서 말 안 하고 있던 다정이 살며시 윤하의 손을 뿌리쳤다.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자 윤하가 반대로 손의 방향을 바꿔 다정의 손을 힘껏 움켜쥔다.
“당신 가만히 있어. 혹시 이 여자 당신 좋아하는 거 아니야?”
“뭐?”
말 한마디에 레즈비언이 되어 버린 세희가 펄쩍 뛴다. 레즈비언이 뭐 이상한 사람들이란 뜻이 아니니 화낼 이유도 없고 오히려 화내는 쪽이 이상한 게 당연한 상식이지만, 엄연히 이성애자인 사람의 성적 취향을 의심하는 말엔 화를 내도 된다. 그러나 윤하는 그저 당당했다.
“그렇잖아. 다정이한텐 내가 있는데, 왜 자꾸 우리 사이에 끼어드냐고.”
“너, 너, 너는 친구가 없니?”
얼이 빠진 세희가 말을 먼저 더듬고 말았다. 섹파가 집착하며 찾아와도 당황하는 법 없는 세희의 저런 모습에서 윤하가 얼마나 강력한 미친놈인지를 알 수 있다.
“온 세상 사람이 애인 아니면 남. 그게 전부야? 가족도 없어?”
“어. 없어.”
방금까지 같이 윤하의 아버지가 구속된 걸 입에 올렸던 다정과 세희는 그냥 그런 윤하의 대답이 어이가 없다. 윤하도 좀 그랬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고개를 기울이더니,
“외할머니가 있긴 한데.”
멀쩡히 살아 있는 양친을 그냥 보내 버린다.
“뭐, 댁이 알 바는 아니고.”
그렇단다. 그쯤 해서 다정이 끼어들었다. 윤하와 세희 사이를 딱 가로막은 다정이 한 명 한 명 돌아보며 짐짓 인상을 썼다.
“너희 만날 때마다 왜 그래. 오윤하 특히 너.”
세희가 아니라 자기 먼저 잡는다고 윤하의 입술이 비죽 나온다.
“아무리 그래도 너보다 나이도 많고 내 친군데 만날 때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떻게 해. 아까 다른 친구들한텐 잘했으면서. 그리고 세희 너도 마찬가지야.”
그저 다정의 등 뒤에서 윤하를 약 올리느라 바쁘던 세희의 입도 튀어나오고 만다.
“저번에 네가 먼저 윤하가 전에 사귀었던 여자들 언급하면서 시비 걸었잖아. 다시 만났으면 그거 사과할 생각 해야지 왜 애한테 또 먼저 시비 걸어.”
둘이 입술 삐죽거리며 자기에게 원망 섞인 눈을 던지거나 말거나, 다정은 둘의 싸움이 그냥 피곤하다. 오랜만에 맥주도 조금 마셨고. 빨리 화해하라고 악수시킨 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뭐, 저쪽이 먼저 사과하면 나도 할 생각이 조금은 들 것 같고.”
그런데 윤하가 또 어깃장이다.
“윤하야.”
다정이 뭐라 또 말하기 전에 세희가 펄쩍 뛰었다.
“뭐? 저쪽? 내가 왜 너한테 사과해야 하냐.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네가 세상 온갖 여자 다 만나고 돌아다닌 게 협작, 모략이야?”
“그러니까 윤다정 앞에서 왜 그런 얘길 꺼내냐고!”
그런 쪽에선 머리 한편에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가진 윤하도 펄쩍펄쩍 뛴다. 가까이 붙어서 서로 으르렁거리는데 밀려나 그걸 지켜보는 다정의 마음은 그냥 착잡하다. 얼마나 가는지 보자, 싶어서 그냥 지켜보는데 아무래도 금방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이내 허리에 손을 얹은 다정이 미간을 찡그렸다.
“오윤하!”
왜 또 나한테 그래, 윤하가 씩씩거리며 돌아봤다. 그리고 다정의 미간을 발견하고는 이내 시무룩하게 입을 다문다. 뒤에서 꼼지락거리는 윤하의 손을 다정이 목격하지만,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다. 세희야 잠깐만, 그런 말을 두고 다정이 윤하를 확 낚아채서 골목으로 데려간다. 세희만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그럼 그렇지. 윤다정하고 나하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고작 일 년도 안 만난 애송이 편을 들 리가 없지. 실컷 머리채 쥐어뜯기고 오라고 세희가 소리 없이 골목 안의 다정을 응원한다. 그러다가 또, 저 자식이 심기 거슬린다고 자기 애비처럼 사람 때리는 거 아니야? 싶은 생각에 목을 쭉 빼고 왔다 갔다. 그걸 전부 다하고도 둘이 오지 않아 세희가 못내 심란하게 머리를 헝클일 때였다. 경찰 불러? 아니면 내가 쳐들어가? 결판이 나지 않는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던 세희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뭐니?”
뚱하게 다정과 윤하를 번갈아 본다.
“둘이 합체한 거니?”
정확히는 덤덤한 얼굴의 다정과 그런 다정의 허리를 찰싹 끌어안은 채 오고 있는 윤하를. 찰싹 붙어 있는 건 둘인데 어쩐지 세희가 민망해진다. 다정이 자기 허리를 끌어안은 윤하의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다정을 끌어안은 채 시무룩하게 세희를 노려보던 윤하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뭐, 대충 미안.”
미안한 거면 미안한 거지 대충 미안한 건 뭘까. 뭐라 하려던 세희가 다정의 눈짓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한다.
“뭐, 나도 대강 미안.”
어쩜 둘이 저렇게 똑같은지. 어쨌든 둘의 입에서 미안하단 말이 나왔으니 이만 들어가자며 다정이 걸음을 떼는데, 세희가 다정을 붙잡았다. 그러곤 영 이상한 얼굴로 다정과 윤하를 번갈아 쳐다봤다.
“너 그러고 들어가게?”
안 떨어지고?
“아니지?”
세희의 말에 다정이 왜? 하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내 자기에게 찰싹 달라붙은 윤하를 보고는 으음,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만 내주면 얌전히 있어. 괜찮아.”
“……정말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
아, 그날로 세희는 깨달았다.
“왜? 윤하보고 제대로 사과하라고 할까?”
제 가장 친한 친구 다정이 이 이상하고 성질 나쁜 양아치에게 일방적으로 코가 꿰인 게 아니라, 둘이 왜 이제 만났는지 모를 정도로 졸라 잘 맞는 커플이었단 사실을. 넋이 빠진 채 둘을 지켜보던 세희가 잠깐 피식 웃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정의 뺨에 올라간 분홍빛을 보면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자리가 끝난 건 자정 무렵이었다. 맥주에 와인도 마셔 택시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던 다정이 졸린 눈으로 윤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평소보다 눈높이가 높았다. 택시에서 내릴 때부터 자기한테 업히지 않으면 이대로 버티겠다고 고집부린 윤하 때문이다. 그리고 다정은 내심 윤하가 그런 고집을 부릴 때가 좋았다.
“내가 업어 주는 몇 번째 여자야?”
뻔뻔하고, 솔직해서.
“너 은근 여자들한테 약하고 잘해 주잖아. 많이 업어 줬지?”
그래서 그만큼 다정도 안심하고 은근하게 뻔뻔해진다. 다정 스스로는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술 때문에 생각나는 대로 뱉는 것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반면 왜 자꾸 다정이 가벼워지는지 모르겠다고 혼자 심각하던 윤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잠깐 다정을 돌아봤다.
“백 명 업어 줬는데, 왜.”
다정의 눈이 세모가 된다. 잠깐 사람 없는 골목에 윤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 누굴 대머리 만들려고.”
“숱도 많으면서.”
손가락 사이에 낀 윤하의 머리카락을 후 불어 버린 다정이 한 번 더 윤하의 머리를 쥐어뜯을 기회를 노린다. 윤하가 하지 말라는 듯 머리를 이리저리 흔든다. 그러면서도 다정을 내려놓지는 않는다. 이내 허벅지를 받친 손이 다정의 궁둥이께를 슬금슬금 간질이자, 그때서야 다정이 웃음을 터트리며 윤하의 어깨를 꼭 붙들었다. 다정이 뒤로 넘어갈까 봐 긴장한 윤하가 간지럼 태우기를 멈추고 마찬가지로 다정을 꼭 붙든다.
“진짜, 백 명?”
“빵 명.”
“정말?”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남자한테 많이 업혀 본 거 아니야? 무슨 술버릇이 아무 데서나 조는 거야.”
흠, 사무실에서 맨날 퍼질러 잤던 전적이 있는 남자한테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은데.
“너뿐이야.”
거짓말 좀 보태서.
“구라 치지 말고.”
윤하의 저렴한 언어에 다시 눈을 샐쭉하게 뜨지만, 금방 넘어간다.
“정말로.”
말을 하다 말고 다정이 킥킥 웃는다. 가만히 걸음을 옮기던 윤하가 왜 말을 하다 마는지, 하고 미간을 찡그리지만, 굳이 닦달하지 않는다. 윤하는 다정이 가끔 이렇게 순간순간의 감정에 솔직할 때가 좋다. 아직은 자기 마음에 차려면 멀었지만.
가로등이 드문드문 어둠을 쫓아내고 있는 골목이다. 로맨틱하다고 하기엔 뒹구는 쓰레기가 많고 불법 주차된 차들이 많지만, 그런 것쯤은 둘 다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떤 칠칠치 못한 꼬마가 내버려 두고 간 작은 자전거를 둘이 동시에 쳐다본다.
“나 업는 데 환장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윤하의 귀에 속삭여지는 말들. 뚱한 표정이던 윤하의 얼굴에도 잠시 뒤 꽃이 핀다.
“나도 업고 싶어 환장하게 만드는 여잔 윤다정이 처음.”
어느 정도 술에 깬 다정이 동네 사람들 다 보니 창피하다고 윤하의 등을 토닥여도, 끝끝내 다정을 업고 동네 한 바퀴 돈 뒤에야 빌라 입구에서 내려 준 윤하가 짐짓 엄살을 피웠다. 어깨를 주무르며 괜히 피곤한 척하더니 다정의 옆구리를 콕콕 찌른다.
“나 피곤한데, 자고 가면 안 되나?”
쳐다보지도 않고 가방을 챙기던 다정이 단칼에 그 말을 자른다.
“내가 뭐랬어.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안 된다고 했지.”
그리고 너 그 두 번 다 채웠어. 다정이 덧붙이는 말에 윤하가 시무룩한 표정을 꾸며 낸다. 이런 표정에 다정이 약하기 때문인데, 오늘 윤하가 갑자기 친구들과의 자리에 나타났을 때부터 마음 단단히 먹고 있던 다정은 그냥 고개만 저었다. 그러곤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걸 묻는다.
“어떻게 알고 왔어.”
윤하가 그런 걸 왜 묻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핸드폰 봤지.”
남의 핸드폰 봤다는 말이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 나올 일인가.
“남의 핸드폰을 왜 마음대로 봐?”
“그럼 어떻게 해? 윤다정이 만나는 장소 안 알려 주는데.”
평범한 연인 사이라면 이 대화에서 화를 내야 하는 건 다정이다. 그런데, 말을 하던 윤하의 눈이 점점 가늘어진다.
“그것도 애인 동반 모임에.”
썰렁한 바람이 휙, 한 번 불었다. 무심코 어깨를 움츠리는 다정을 쳐다보던 윤하가 코트를 벗어 다정의 어깨에 둘러 준다. 그러곤 다정을 끌어당겨 자기 팔 안에 확 가뒀다. 꼼꼼하고 섬세한 손길. 그냥 사소해서 아무렇지 않고 어렵지 않게 잘해 주는 게 아닌, 진심으로 걱정해서 나오는 상냥함.
“내일 병원 가는 날이지?”
가만히 윤하의 가슴팍에 뺨을 기대고 있던 다정이 묻는다.
“응.”
“상담 잘 받고 와.”
요즘 윤하는 상담 전문 심리학 교수에게 상담을 받고 있다. 병행하던 약물 치료는 서서히 양을 줄이다 저번 주로 완전히 끊었다. 끊었다고 표현하긴 뭐하지만, 약에 대한 윤하의 의존도도 낮은 데다 거부감이 계속 심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
“잘 다녀왔다고 뽀뽀도 해 줄 거지?”
윤하의 물음에 다정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알면 알수록 이 도련님은 참 까탈스러운 게 없다고 생각하며. 성격은 좀 이상하지만. 문득 다정이 제 손을 내려다본다. 아직 끼워져 있는 다이아가 어둠이 무색하게 반짝거렸다. 대화 잘하다 갑자기 꼼지락거리는 다정을 내려다보던 윤하가, 이내 반지를 만지는 손을 보고 눈썹을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