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다정은 아직 세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는 못했지만, 일단 찾아온 사람을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 집에 들였다. 손님에게 대접할 거라곤 커피밖에 없어 그거라도 탔다. 그사이 세희는 몇 번이고 와 본 다정의 집이 마치 생전 처음 와 본 곳이라는 듯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쟁반을 내려놓은 다정이 세희 앞에 커피를 밀어 줬다.
“마셔.”
무의식중에 머그에 손을 대긴 했지만, 세희는 커피에 입을 대기는커녕 철천지원수 대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든다.
“보통 이럴 땐 서로 어색하게 잘 지냈니, 같은 말로 대화 트지? 근황 토크는 짧게 끝내자. 난 잘 못 지냈어. 너는?”
다정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나는, 그냥.”
“…….”
“그냥 그랬어.”
제일 친한 친구가 인생에서 사라졌었는데 어떻게 다 덮어 두고 잘 지냈다고 그래. 세희의 얼굴도 침울해진다. 이내 침묵이 찾아오고, 다정과 세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머그 손잡이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번에도 침묵을 깬 건 세희였다.
“운을 이렇게 텄는데도 어색하네. 집에 술 있니?”
다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세희가 제가 가져온 가방을 열었다. 소주가 두 병 나왔다. 여자답게 잔도 필요 없다며 바로 뚜껑만 따서 벌컥벌컥 들이켠 세희가 크, 하는 추임새와 함께 입술을 닦았다. 그러곤 다정에게도 마시라며 뚜껑을 딴 새 소주병을 건네줬다. 다정이 고개를 저었다.
“나 감기 기운 있어서.”
“그래?”
그럼 나 혼자 마시지 뭐. 다시 소주를 수혈하듯 들이켜는 세희를 다정이 못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본다. 그러다 소주 반절 이상이 세희 입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손을 뻗었다. 손에 닿은 따뜻한 감촉에 세희의 입에 정확히 꽂혀 있던 소주병 주둥이가 옆으로 조금 비껴갔다. 바닥에 물방울이 조금 생기고 세희의 티셔츠 자락이 좀 젖었다. 그러나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너도 감기 기운 있는 거 아니야?”
조심스레 세희의 손에서 소주병을 빼앗은 다정이 제 뒤에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네가 저번에 딜도 보냈을 때 그랬잖아. 우리 몸 우리가 알아서 보살피고 챙겨야 한다고. 감기 걸렸을 때 술 그렇게 마시면 안 좋은 거 알면서.”
말하다 보니 되게 옛날 일을 말하는 것 같아 다정의 기분이 이상해진다. 가까스로 문장의 끝을 맺고 세희를 보던 다정이 순간 조금 놀랐다.
“세희야?”
세희가 연신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어, 응.”
얼른 무릎걸음으로 휴지를 가져온 다정이 되는 대로 뜯어 세희의 손에 쥐여 줬다. 하지만 세희는 눈물만 뚝뚝 흘릴 뿐. 다정이 쥐여 준 휴지가 꼭 금단지라도 되는 것처럼 꼭 쥐고만 있었다. 한참 그렇게 훌쩍거리며 울던 세희가 이내 울음 섞인 말을 토해 냈다.
“나, 그 새끼랑 잤었어.”
다정의 눈썹이 짐짓 찌푸려진다. 세희가 말하는 그 새끼가 짐작이 안 가기 때문이었다. 세희 탓을 하는 건 아니지만 세희가 역대 먹다 버린 남자 리스트를 A4용지에 글씨 크기 9 정도로 채운다면 한 바닥은 다 채울 수 있었다. 다정이 머뭇거리는 사이, 세희가 뺨을 거칠게 문질러 닦고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김상훈 그 새끼.”
아, 그건 진짜 놀랍다. 무심코 다정이 뒤로 짚은 손에 소주병이 밀려 넘어졌다. 꼴 꼴 꼴, 소주병이 알코올을 뱉어 낸다.
사랑을 잘 모르겠어.
이게 그동안 다정을 대해 왔던 윤하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오윤하가 웬일이야. 오픈하자마자. 상무 되고는 코빼기도 안 비추더니.”
막 오픈 준비를 마친 바 안에서 얼음을 깎고 있던 석현이 윤하를 반겼다. 성의 없이 고개만 끄덕인 윤하가 바로 바에 앉았다. 그리고 가타부타 없이 독한 술을 한 병 시켰다. 오픈하자마자 매상 올려 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며 낄낄거리던 석현이 윤하 앞에서 술병을 땄다. 그러곤 얼음을 반쯤 채운 잔에 술을 넣고 흔든 다음, 윤하의 앞에 밀어 줬다. 술이 희석되기도 전에 바로 낚아챈 윤하가 바로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쯤 해서 석현도 웃음을 거뒀다.
“무슨 일인데?”
“아무것도.”
무표정으로 대답한 윤하가 술병을 낚아챈 뒤 잔에 잔뜩 부었다. 그리고 다시 희석되기도 전에 입에 털어 넣는다. 코끝까지 찡한 독한 맛에 내쉬는 숨결에도 취하는 것 같다. 석현이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위스키의 삼분의 일을 해치운 윤하가 허공을 노려봤다.
술에 취해 가는 게 아니라, 윤하는 지금 사랑을 체득하는 중이다.
아트 스쿨을 다닐 때 고전 문학 중 한 작품을 골라 감상을 제출해야 하는 에세이 과제가 있었다. 도서관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책 저 책 뒤져 보던 미성년의 윤하가 생각한 게 있다. 사랑이 뭐라고 다들 이렇게 울고 짜고 난리지. 좀 쿨하지 못하게.
윤하가 입매를 비튼다. 쿨하고 찌질하고를 떠나서, 세상에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제법 많은데도 그중에서 사랑이 제일 심각하게 나쁜 거라서.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주구장창 슬프고 죽고 싶고 노란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호수 한복판으로 간 뒤 권총 자살하는 거라고.
“야.”
“왜.”
이제 윤하가 죽상으로 술만 푸는 이유를 알겠거니 싶어 석현이 바에 손을 짚었다. 하지만 윤하가 말한 것은 영 엉뚱한 거였다.
“양다리 걸쳐 봤냐.”
윤하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핸섬한 외모와 유들유들한 성격으로 나름 인기가 좋은 석현이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민다.
“한 번?”
“왜 했는데?”
그때 양다리 당했던 전 여친들도 묻지 않았던 걸 불알친구가 묻는다. 까짓 거 답해 주지 뭐. 윤하의 친구답게 생각이 심플한 석현이 어깨를 들썩였다.
“얘도 좋고 걔도 좋아서.”
그 말에 잠깐 윤하가 석현을 봤다.
“장난하냐, 당하는 사람 기분 좆같은 것 생각도 안 해?”
가끔 석현은 생각한다. 나는 얘 말고도 친한 친구들 많은데 얘는 나 아니면 친구도 없으면서 뭘 믿고 이렇게 싸가지가 없지. 그래도 성격답게 금방 털어 내고 어깨를 으쓱했다. 안주도 먹어 가면서 먹으라고 서랍에서 초콜릿을 까 윤하의 입에 물려 준다.
“양다리 걸치는 인간이 착할 거라 생각하냐, 너는.”
일리 있는 말이다.
“너랑 사귀기 전이었어.”
세희가 다정의 앞에 놓인, 아무도 입을 대지 않은 소주병을 끌어당겼다. 세희는 끊임없이 눈물을 토해 내는 중이었다. 다정은 여전히 아무 말 할 수 없다. 그저 한 행동이라곤 세희 때문에 구석에 박혀 있던 라라가 슬그머니 나와 거실에 웅덩이를 만든 소주 냄새를 맡는 걸 저지하는 정도였다. 세희에게 눈을 고정한 채 다정이 라라를 제 무릎에 앉힌다.
“나는.”
소주를 채 한 모금도 못 먹고 헛구역질을 한 세희가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그 새끼도 나 좋아하는 줄 알았어.”
지금도 그렇지만 대학 다닐 때는 유난히 술자리를 좋아했던 세희는 다음 날 시험이 있어도 부르면 나가곤 했다. 그런 술자리 중 하나였단다. 김상훈과 잤던 날이.
“알잖아. 남자 새끼들 오빠 같은 마음이니, 아빠라고 부르라느니 아껴 주는 척 다하면서 은근슬쩍 자 보려고 추근거리고 몸이며 얼굴 평가하는 거. 김상훈만 그걸 안 했어. 그래서 좋았어. 이 새낀 다른 남자들하고 다르구나.”
갑자기 생각하는 건, 언젠가 김상훈이 정상위로만 했냐며 깔깔 농담하다 갑자기 당황했던 세희의 얼굴. 그래서였구나. 어떤 야하고 상스러운 얘기도 서슴지 않던 세희가 그날따라 당황했던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이제야 맞춰지는 퍼즐.
“나는.”
드디어 다정이 쥐여 준 휴지로 얼굴을 문지르고 코를 푼다.
“솔직히 그 새끼랑 나랑 사귀는 줄 알았거든.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내 자취방에서 자고 갔으니까. 근데, 그 새끼가 어느 날 그러더라. 자기 윤다정 좋아한대. 그래서 고백하고 싶은데, 여태 우리 잔 거 비밀로 해 줄 수 있냐는 거야. 거기서 먼저 생각난 게 내 자존심이었어. 그때까진 너 그냥 은근 재밌는 애로만 생각해 왔으니까.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라고. 근데 걔가 너 좋다니까 자존심이 상하더라. 그래서 그러라고 했어. 상관없다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분한 거야. 처음으로 좋아한 새끼가 날 먹고 튄 것도 분한데, 그 새끼가 나랑 자면서도 반한 게 너였다고 하니까. 그런 게 뭐 별건가 하고 혼자 납득하려고 계속 혼자 애썼는데, 어느 날 네가 상훈 선배랑 사귀게 됐다고 그러더라.”
거기까지 말한 세희가 얼굴을 닦은 보람도 없이 다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래서 송희한테 그랬어. 송희가 말했던 거, 그거 그때 얘기한 거야.”
질투와 시기, 슬픔, 땅 끝까지 파고든 자괴감. 세희는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근데, 네가 김상훈 그 새끼랑 사귀게 됐다고 말했을 때는 이미 너랑 친해졌고 널 좋아하게 됐을 때란 말이야. 내가 널 아는데. 내가 너 쉽게 마음 안 여는 앤 거 아는데. 김상훈 받아들였을 땐 좋아하니까 그랬겠지. 그리고, 그리고.”
“…….”
“나한텐 진심이 아니었겠지만, 너한텐 진심일 수도 있겠지.”
세희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계속, 계속. 입술이 닳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한 번이었어.”
품에서 라라가 버둥거린다. 그래도 꼭 붙잡았다. 아직은 넘친 술을 닦을 정신이 없어서.
“네가 싫었던 거, 그때 술에 취했던 한 번이었어.”
다정은 그저 세희의 눈물을 봤다. 웃긴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상처 줘서 미안해. 정말이야.”
신을 믿지는 않지만, 어쩌면 지구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 더 슬퍼지지 말라고 신이 만들어 놓은 공간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믿는 거다. 신을. 그리고 사랑을.
“내가 너였으면 그때 그 자리에서 내 뺨 후려치고 다신 안 봤을지도 몰라. 집 앞까지 찾아와도 집에 들이지 않는다고. 나 같은 년 감기 걸리거나 말거나 뻔뻔하게 군다고 커피 뿌리지는 못할망정.”
그리고 친구를. 그래도 세상에 기댈 곳이 있노라고 믿기 위해서.
“세희야.”
세희의 횡설수설을 듣던 다정이 고개를 젓는다.
“그런 거 아니야.”
드디어 손을 풀자 라라가 다정의 허벅지를 박차고 소파 위로 올라갔다. 저 지독한 냄새 나는 물에는 더 관심도 없다는 듯. 무릎걸음으로 자리를 옮긴 다정이 세희를 끌어안는다.
“나도 상처받아. 상처받는 사람이야.”
다정의 눈에도 살짝 눈물이 고인다.
“그래도 그동안 네가 보고 싶었어. 그래서 그런 거야. 다른 거 없어.”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솔직한 사람을 동경하는 모양이다. 다정은 그들의 겉껍데기를 동경하고, 속엔 꾹꾹 담아 넘치는 것들이 있는 사람이 다정에게 끌리고. 세상은 뫼비우스의 띠.
“무서웠어. 난 미안하단 말없이도 벌써 널 용서했는데 날 싫어하는 게 네 진심일까 봐.”
뱉고 보니 뭔가 고백 같다는 생각이 들어 눈에 고인 눈물에도 불구하고 머쓱해지려 할 때,
“어어엉.”
우렁찬 울음을 터트리던 세희가 덥썩 다정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앞으로는 진짜 너한테 말 안 하는 거 없어. 진짜 내가 너무 미안해. 그리고 윤다정 존나 사랑해…….”
둘을 지켜보던 라라가 뒷발로 턱을 긁는다. 탈, 탈, 탈.
그 시간, 윤하의 옆에는 막 올해 미성년자 딱지를 뗀 나미가 앉았다. 나이도 어린 데다 중학교 때부터 오빠들이 심심찮게 불러내 여신이니 뭐니 찬양했었고 SNS에 셀카를 올릴 때마다 폭발하는 ‘좋아요’ 수를 볼 때마다 상승한 자신감이 이제는 하늘을 뚫을 정도가 된 나미였다. 처음 와 본 청담동 바에 나미에겐 입장할 때부터 눈에 띈, 고독하게 술을 마시는 이 잘생긴 오빠를 넘어트릴 자신감은 이백 프로쯤 있었다.
“오빠 왜 혼자 술 마셔요?”
윤하 앞에 놓인 텅 빈 양주병을 훑으며 나미가 묻는다. 그리고 윤하는 무시했다. 나미는 당황한다. 그래도 곧 회복했다. 그리 크지 않은 음악이 나오고 있지만, 노래에 제 말소리가 묻힌 건가 싶어 좀 더 큰 소리로 말한다.
“오빠! 왜 혼자 술 마시냐고요!”
드디어 윤하가 나미를 쳐다봤다.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나미를 쳐다보던 윤하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양다리 걸쳤어.”
어머, 대박. 나미의 자신감이 삼백 프로 상승한다. 자기 외모도 외모지만 이 정도면 거의 손가락 까닥하면 바로 남자가 바지를 벗을 만한 상황이었다. 나미의 눈이 천천히 윤하의 몸을 훑었다. 이내 얼굴도 기가 막힌 데 수구 선수처럼 늘씬하고 돈과 시간을 들여 가꾼 몸까지 확인한 나미가 요염하게 다리를 꼬았다.
“왜 그랬대요. 오빠처럼 이렇게 잘생긴 사람을 두고.”
자기가 잘생겼다는 걸 아는 윤하는 그런 칭찬에 그저 심드렁하다.
“그러게.”
거기서 나미는 이 잘생긴 오빠가 말을 하면서도 저를 제대로 안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나미의 입술이 부루퉁하게 부풀었다. 좀 생겼다고 튕기는 거야 뭐야. 나미가 속으로 투덜거릴 때, 문득 윤하가 입을 열었다.
“이 곡, 알아?”
“뭐요?”
나미는 그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여전히 표정은 멍한데, 익숙하게 피아노를 치듯 까닥까닥 움직이는 윤하의 손가락을 발견하고 나서야 윤하가 물은 곡이 지금 가게에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말하는 거구나, 깨달았다. 그러나 그래 봤자 클래식이라곤 학교 음악 시간에 들은 게 전부고 그것도 다 기억 못 하는 나미가 어물어물한다. 나미의 대답을 듣기 위해 입을 뗀 게 아닌 윤하는, 그저 계속 말을 이었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그리고 이제야 제게 말을 거는 나미를 똑바로 바라봤다. 매일 거울마다 보는 자기 미모에 익숙한 윤하는 나미를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귀여운 얼굴이긴 한데 그렇게 예쁘진 않네. 아무 생각 없이 뱉는다.
“슈만은 브람스가 얼마나 좆같았을까.”
“네?”
슈만-클라라-브람스의 삼각관계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정신병이 생겨 강에 뛰어들기까지 한 슈만이지만, 클라라는 자기 남편인 슈만을 계속 사랑했다. 정신 병원에 입원한 슈만을 보기 위해 클라라가 먼 길을 다닐 때, 슈만의 제자였던 브람스는 그런 클라라에게 연애편지를 썼다.
“I can’t do anything because no letters are coming from you this morning…….”
나미가 눈을 끔벅거리는 사이, 윤하는 계속 손을 까닥였다.
“내가 피아노를 배울 때, 가르치던 교수가 이런 말을 했어. 기계적으로 악보를 외우고 미스 터치를 내지 않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게 아니라, 곡을 치면서 작곡가의 인생과 곡에 담긴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윤하는 왜인지 브람스가 좋았다. 서정적이지만 달콤할 정도로 낭만적이진 않아서. 처음 피아노를 칠 때부터 그랬고,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최고의 음악가가 누구냐 묻는다면 브람스라고 즉시 대답할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윤하가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가졌던 그 길고도 열정적이었던 사랑을 이해해 왔단 말은 아니었다.
“I can’t play anything and I can’t think about anything. I love you beyond words.”
불현듯 윤하의 뺨이 움찔거렸다.
윤하를 쳐다보던 나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털썩 윤하의 무릎에 앉았다. 윤하는 뭔가를 체득하는 중이었다. 무릎에 파리가 앉았는지, 웬 여자가 앉았는지. 느끼지도 못했고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보지 못했다.
“많이 슬픈 거면 내가 위로해 줄까요?”
나미의 손이 윤하의 턱에 닿았다. 그 순간, 갑자기 머리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뭐지. 여태껏 윤하가 계속 던져 왔던 질문이다. 사랑이 뭐지, 사랑은.
“내가 그 나쁜 여자 친구 잊게 해 주는 약 줄게요. 되게 단 거로.”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런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을…… 나미가 윤하의 입술에 돌진하는 순간, 윤하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깨어난 건 개 같은 괴물.
윤하가 인지하고 있는 것 중,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화가 난다고 이성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된다면 그 끝이 건강한 사람으로 돌아가거나, 괴물이 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야.”
“네?”
“꺼져.”
형처럼 자살 시도해 호스를 잔뜩 낀 괴물이 되어 죽거나.
“어머, 뭐야.”
보통 사람들이 일컫는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든가.
근데 윤다정 없이는 사람이 될 수 없어. 내 약은 윤다정뿐이야.
윤하의 손에 밀쳐진 나미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뭐야 저 오빠? 가만히 있을 땐 언제고 뽀뽀하기도 전에 나를 밀쳐? 이렇게 예쁜 나를? 막 윤하의 뒤통수를 향해 욕을 퍼부으려던 나미가 제 앞에 불쑥 들어온 손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예쁜 동생이 왜 바닥에 앉아 있어. 초콜릿 줄까요?”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석현의 개입이다. 나미의 화는 금방 풀렸다.
화해까지 했으니 기분 좋다고 술 더 마시자 조르는 퉁퉁 부은 눈의 세희를 택시 태워 거의 쫓아 보내듯 보낸 다정이 허공에 대고 손을 탈탈 털었다. 어느새 해가 져서 깜깜한 밤이다. 저녁 먹을 시간은 넘겼는데, 간단하게라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라라 목욕을 오늘 해야 할까, 내일 해야 할까.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다정은 계속 고민했다. 어차피 내일부터 주말이니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은데, 라라의 반항을 생각하면 오늘 생각한 김에 끝내야 할 것 같고. 세희의 고민이 덜어졌다고 일상적인 고민이 심각해진다. 비밀번호를 치고 현관에 설 때까지 고민하던 다정이 이내 판단을 내렸다.
“라라.”
목욕하자, 막 그 말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에 놀란 다정이 돌아봤다. 이 시간에 누구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연신 울리던 초인종이 그치고 비밀번호가 삑삑 눌렸다. 놀라 얼어붙은 다정을 두고, 두어 번 틀린 뒤에 현관 잠금장치가 열렸다. 놀라 동그래졌던 다정의 눈이 더 커진다.
“오윤하?”
고요한 눈으로 다정을 쳐다보던 윤하가 불쑥 손을 뻗었다. 다정의 뺨과 턱이 윤하의 손에 완전히 가려진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냐는 문장은 윤하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입술을 깨물고 들어와 다정을 전부 삼켜 버릴 듯 혀와 이에 닿는 모든 것을 깨물고 빨아들이다, 고개를 조금 틀어 입술을 뗀다. 가만히 다정을 내려다보던 윤하가 픽, 웃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술 냄새가 확 풍긴다. 오윤하, 취했어?
“잠시, 잠깐만.”
다정이 다시금 당황한다. 그런 다정에게 윤하가 손을 뻗었다. 손에 힘을 주면 그대로 깨져 버릴 것 같은 여자의 목이 윤하의 손에 쥐어졌다. 윤하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다정은 그저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윤하의 심정이 거기서 포악해진다. 다른 남자 앞에서도 이런 얼굴 했어?
“내가 당신을 처음 울렸던 날.”
윤하의 엄지가 다정의 벌어진 입 속으로 들어간다. 나머지 손가락은 아래턱을 감쌌다.
“내 기분이 왜 이럴까, 딜도를 가지고 쫓아와서 난리 피우는 여자가 우는데,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좆같을까.”
“…….”
“그 뒤로는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런 줄 알았어. 약을 먹으면서는 소화가 안 돼서 턱, 음식이 목구멍에 걸린 줄 알았다고. 근데, 그때부터 알았어야 했나 봐.”
윤하의 손아귀에 힘이 가해진다. 다정의 입술이 아픈 신음과 함께 벌어졌다. 고개를 숙인 윤하가 그런 다정의 표정을 오래 감상했다.
“내가 당신 좋아하고 있다는 거.”
손길과 표정은 당장 칼로 찌를 정도로 포악한데, 목소리는 더없이 상냥했다. 윤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윤하에게 붙잡힌 다정이 어쩔 줄 모르고 뒷걸음질 친다. 이내, 다정의 등에 벽이 닿았다. 어디에 어떻게 세워진 벽인지는 판단이 불가했다. 손으로 가하는 악력을 이용해 다정의 턱을 들어 올린 윤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마치 꽃을 문 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지금부터.”
다정이 걸치고 있던 카디건의 단추가 뚝, 뜯겨 나갔다.
“내가 시키기 전까지는 아무 말 하지 않는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정의 입술이 다시 깨물렸다. 이건 섹스의 전초 정도가 아니다. 윤하는 정말 다정을 혀와 손으로 뼈까지 발라 먹을 생각이었다. 아, 다정이 무심코 미간을 찌푸리며 흘리는 신음까지 모조리 빨아먹는다. 키스 도중에 티셔츠 자락이 가슴 위까지 올라가고, 티셔츠를 벗기기도 전에 브래지어 끈이 먼저 헐렁해진다. 손길이 급하다 못해 거칠다. 입이 닿는 모든 곳을 깨물고 빨아들이는 걸 못 견딘 다정이 손이 힘을 줬다.
“윤하야, 잠시만.”
윤하가 눈을 모로 떴다. 한동안 핀트가 나간 얼굴로 계속 다정을 내려다보던 윤하가 혀를 길게 내어 다정의 뺨을 핥았다. 왜 짭조름할까. 방금 그 새끼라도 만나고 왔나?
“내가.”
연약한 짐승을 잡아먹는 소리가 윤하의 목뼈에서 난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윤하의 눈에 방금 벗겨진 게 분명한, 다정의 슬리퍼가 눈에 걸린다. 현관에서부터 어떻게든 말 못 하게 다뤘으니 신고 있던 거 벗을 시간이 없었겠지.
“말하라고 했어, 다정아?”
윤하의 무릎이 다정의 허벅지를 벌린다. 다정의 등이 벽과 좀 더 밀착됐다. 거기부턴 다정도 슬슬 느끼고 있었다. 평소의 오윤하가 아니라는 점을. 어디라고 콕 짚을 수는 없다. 평소와는 다르게 몸이 녹을 듯한 상냥한 말투? 아니면 말투와는 다르게 반항이라도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 내리누르는 손길. 몇 초간 저를 내려다보는 윤하의 얼굴을 보던 다정이 윤하의 뺨을 붙잡는다.
“무슨 일 있었어?”
그게 기폭제가 된다. 다정의 뺨을 붙잡고 있던 손이 내려와 목덜미를 붙잡는다. 바로 팔딱팔딱 뛰는 혈관이 느껴지는, 그리고 그 안엔 콱 누르면 숨도 못 쉬고 버둥거릴 기도가 있겠지.
“다정아.”
윤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다정이 그저 목을 감싼 윤하의 손을 쓰다듬으며 대답한다.
“내가 오늘 너.”
다정의 목에 손을 댄 채 다른 손으로 다정의 뺨을 꾹 누른다. 이미 반항하지 않는 몸이지만 혹시 모른다. 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까. 사람이 서로의 생각을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이럴 일도 없다고 윤하가 자위하며 속삭인다.
“죽여 버릴 거야.”
어떤 새끼랑 섹스해도, 오윤하. 윤하야. 그 이름만 튀어나오게. 아니, 그 정도는 안 돼. 윤다정이 다른 새끼를 선택해도 종국엔 제게 다시 찾아와 자기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울 정도. 거기까지 도달한 제 생각이 마음에 들어 윤하가 킥킥 웃었다. 섹스로 죽이는 거, 괜찮은데?
다정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윤하를 본다. 모르긴 몰라도 섹스하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섹스하는 것 자체는 상관이 없지만.
“저기, 오늘은 좀 그런데.”
가만히 다정의 말을 듣던 윤하가 생각의 결론을 냈다. 저 입부터 막아 놔야겠다.
할퀴고 물어뜯는다. 욱신거리는 곳을 빨아들이고 핥는 행위. 이게 정말 키스인 걸까. 다정이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키스가 생각할 틈 없이 몰아쳤다. 온전히 키스에 집중하는 윤하의 긴 속눈썹을 오래 바라보던 다정이 이내 눈을 감는다.
오윤하를 좋아한다는 건, 오윤하를 욕망한다는 뜻.
윤하의 손이 다정의 티셔츠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티셔츠 위로 손의 윤곽이 들어간다. 누워서 하는 편한 자세도 있다는 걸 서로 알면서도 하나는 하나를 벽에 내리누르고, 하나는 생각할 틈 없이 벽과 하나의 틈에 꼭 낀 채 정신없이 입을 맞춘다.
잠깐 입술을 뗀 윤하가 다정이 숨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돌려세웠다. 등을 덮은 커다란 손이 힘을 주는 것에 다정의 뺨이 벽에 눌린다. 그대로 다정의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내려갔다. 거기서 다정이 수치스러움에 귀를 확 붉혔다. 옷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아래만 까고 있는 상태가 부끄러웠다. 심지어 바지가 다 내려간 것도 아니었다. 무릎에 걸린 바지를 내려야 할지 완전히 벗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오윤하를 말려야 할지.
혼란스러움을 거기서 끝났다. 지퍼 내려가는 소리에 정신이 든 다정이 잠시 다리를 버둥거렸다. 집도 절도 없는 절박한 애들처럼 이렇게 서서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명. 지금 윤하에겐 그런 다정의 행동은 하나하나 전부 거절로 느껴진다. 한 손으론 다정의 등을 내리누르고 있던 윤하가 다정의 등에 바짝 가슴을 붙였다.
“왜.”
손이 내려가 다정의 둔부를 힘껏 움켜쥐었다. 고개를 숙인 윤하가 다정의 귀를 잘근잘근 씹었다. 목이 마른 사람처럼 씹고, 파헤친다. 다정의 살 아래 있는 혈관과 뼈까지 모두 입 안에 넣고 굴리고 싶다.
“다른 새끼들은 너 이런 식으로 따먹은 적 없어?”
다정의 살에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어떤 인공적인 향이 가리지 않는 무색무취. 그러나 혀로 진득하게 핥으면 예민하게 집중해야 알아챌 수 있는 짠맛이 잔뜩 끌려온다. 벌어진 둔부 사이에 그저 다정을 물고 빨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금방 사정할 듯 발기된 제 페니스를 비볐다. 축축하게 젖은 다정의 목덜미와 귀에 윤하의 뜨거운 숨결이 쏟아졌다. 화상을 입을 것 같아. 다정이 신음을 목 안에 욱여넣으며 고개를 가까스로 들었다.
“코, 콘돔.”
그 말에 잠깐 맞붙은 아랫도리에서 움직임이 멎었다. 완전히 욕망 하나만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윤하는 차분한 척, 다정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픽, 다정이 당황한 건 저를 조소하듯 입매를 비트는 윤하의 표정 탓이 아니었다. 눈 깜짝할 새 다정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윤하가 조심성 없이 다정의 머리를 뒤로 젖혔다. 아픔을 덜어 내려 반사적으로 다정이 허리를 부자연스럽게 휜다.
“다정아.”
윤하가 제법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 새낀 되고, 난 안 돼?”
대체 윤하가 말하는 그 새끼가 뭔지. 일그러진 다정의 눈가에 윤하의 입술이 부드럽게 부딪혔다. 동시에 난폭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맞붙은 하체에 물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정의 성감대라면 눈 감고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속속들이 알고 있다. 다정이 제일 예민하게 반응하는 구슬을 찾아 비비자 다정의 목구멍에서 완성되지 못한 문장이 진동으로 울렸다. 내친김에 드러난 옆구리를 힘껏 힘을 줘 쥐었다. 아, 다정이 잠시 새된 신음을 뱉은 것에 윤하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호선을 그렸다.
“윤다정 이런 데도 느끼지. 너 그전엔 몰랐잖아, 이런 곳도 느끼는 거.”
아직 처박지도 않았는데 콘돔 없이 닿는 생살의 뜨거움과 축축함에 흥분한 윤하가 목구멍에서 뜨겁게 끓는 소리를 뱉는다.
“내가 벌써 쌌나? 아니면, 원래 이게 취향인 건가.”
일부러 상스러운 단어만 골라 다정의 귓속에 차곡차곡 밀어 넣는다.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는 다정의 표정이 마음에 든다. 곤란하게 하고 싶다. 절벽 끝까지 밀어붙여서 저도 모르게 속에 든 말을 전부 꺼내도록 만들고 싶어. 나야, 그 새끼야. 그래도 나지?
근데, 내가 아니면?
“하, 아……!”
딱 붙은 다리 때문에 더 비좁은 곳을 단번에 윤하가 치고 들어간다. 버거움에 다정의 눈썹이 한계까지 찡그려지고, 목에 핏줄이 선다. 그런 다정의 뺨을 개처럼 윤하의 혀가 핥고 맛봤다.
“아파?”
마침 또르륵 떨어지는 눈물까지 모조리 빨아먹은 윤하가 낮게 쉰 목소리로 속삭인다. 뻣뻣하게 굳은 다정의 엉덩이와 허리를 만지작거리던 윤하가 다정의 머리카락을 좀 더 바짝 찾아 쥐었다.
“아프면 직접 벌려 봐. 잔뜩 벌려서, 환영해 보라고.”
기가, 막혀. 잠깐 눈을 뜨고 윤하를 쳐다보던 다정이 이내 간신히 붙들고 있던 벽에서 손을 뗐다. 주저앉을 것 같지만, 뒤에서 받치는 윤하의 몸에 다리만 조금 후들거렸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직접 제 둔부를 잡아 벌리는 모습을 윤하는 똑똑히 지켜봤다. 다정이 질색하는 이런 식의 행동, 말들. 아니나 다를까 다정의 열기가 윤하에게까지 똑똑히 느껴진다. 잠깐 윤하의 눈 아래가 부르르 떨렸다.
“아, 흐!”
전조 없이 뿌리까지 치고 들어오는 것에 다정의 입에서 날카로운 신음이 나왔다. 여전히 다정을 짓누른 채,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섹스를 지속한다.
“윤, 하. 윤하야. 윤하.”
못 견디겠어. 뭔진 모르겠지만 못 견디겠어. 저를 연신 부르는 다정의 입을 윤하가 틀어막는다. 추저분한 소리가 찔꺽찔꺽 난다. 감각이 마비된 것 같다. 동시에 윤하의 머릿속에 하얘진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흘러 다정의 턱을 적신다. 부자연스럽게 휜 허리, 오싹하게 치고 올라오는 쾌감. 힘없이 둔부를 잡고 있던 다정의 손이 떨어졌다. 상관은 없다. 이미 길은 만들어졌고 그 길에 둘 다 익숙해졌으니까. 어떻게든 잡을 게 필요해 헤매던 다정의 손이 가까스로 윤하의 뺨에 닿는다. 뺨을 지나 윤하의 목덜미를 쥔다.
입술을 뗀 윤하가 이를 드러내며 그런 다정의 손을 뿌리친다.
“이렇게 쑤셔 주면 아무나 좋은 거지, 그렇지.”
윤하의 속에서 울룩불룩, 뭔가가 자꾸만 치고 들어온다. 왜 이렇게 서럽지, 화만 내야 하는데 뭐가 이렇게 서럽지.
“씨발, 나 좋다고 했으면서. 사람 잡아 흔들어 놓고.”
일부러 못된 말만 골라 뱉는 데도 나아지는 게 없다.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도망치기만 해 봐. 팔이고 다리고 부러트릴 거야. 그래도 도망치면 개 목줄 채워서 나만 들여다볼 수 있는 골방에 가둬 놓고, 나랑 이 짓만 하게 만들 거라고.”
흠칫, 섬찟한 말에 눈을 깜박이던 다정이 윤하를 쳐다봤다. 동시에 아래서 올라오던 쾌감이 그쳤다. 다정이 미간을 찡그린 채, 가만히 윤하의 말을 들었다.
“앞으로 내 좆에서 나오는 것만 먹으면서 살게 할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은 별생각이 없었다. 잠깐 한 생각은 오윤하의 섹스 스타일은 알면 알수록 좀 짜증 난다는 것쯤. 조금 더 가면 섹스가 끝난 뒤에 한 번만 더 그러면 스테이플러로 입술을 찍어 버리겠다, 엄포를 놓아야지. 그 정도. 다정이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윤하야.”
정신 나간 것처럼 지껄이던 윤하가 제 이름에 반응한다.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던 다정이 조심스레 윤하의 턱에 손을 댔다.
“……왜 울어?”
거기서 윤하는 제 뺨이 흠뻑 젖어 있음을 눈치챘다. 다정을 보며 눈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유성우가 떨어지듯 눈물이 낙하하고 있다는 사실도.
내가, 울어?
거기까지 가자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몰아 쳐오는 게 있었다. 윤하의 턱이 덜덜 떨렸다. 자칫하면 혀를 씹을 듯이. 몸이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흔들린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 몸이며 다정을 훑어보던 윤하가 불에 덴 듯 아직 쥐고 있던 다정의 머리카락을 놓았다. 동시에 밑을 가득 채우고 있던 윤하의 것도 빠져나간다. 이물감에 다정이 또 잠시 눈을 찡그렸다. 단순한 이유였다.
“……아니야.”
턱을 덜덜 떨던 윤하가 그런 다정의 표정에 서둘러 몸을 굽혔다. 이내, 무릎을 꿇고 절절하게 비는 모양새가 된다. 정신없이 다정의 손을 찾아 뺨을 부비고 입을 맞추던 윤하가 다정을 올려다보았다. 제 유일한 신에게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종교인만큼 간절하고 절절하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어릴 때 이후론 울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윤하였다. 언제나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었기에, 어떤 슬픈 이야기를 봐도 코웃음 치고 말았고 누가 저 때문에 울더라도 한숨부터 쉬고 마는. 그런 사람.
“방금 한 말 거짓말이야. 다정아. 응?”
화낼 생각이 없던 다정만 당황한다. 제 손을 놓아주지 않으며 정신 나간 것처럼 속삭이는 윤하 때문에 엉거주춤하게 한 손으로 바지와 속옷을 끌어 올린다. 그리고 윤하의 앞에 같이 무릎을 꿇었다. 제 뺨을 붙잡는 다른 손까지 붙든 윤하가 자꾸만 다정의 손을 고쳐 잡았다. 피난길에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가 저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의 옷깃을 붙들 듯이.
어떻게 좀 해 주세요. 무서워요.
“당신이 원하는 거 다 할게. 하자는 거 다하고 가지고 싶은 거 다 줄게. 나한테 없는 것도 다 줄게. 당신이 죽으라면 죽고, 죽이라면 죽일게. 다정아, 다정아. 내 옆에만 있어 줘. 나한테 정떨어져서 싫다고 해도 돼. 옆에만…….”
그러다 어느 순간엔 또 돌변한다.
“싫다고 해도 상관없어. 내가 주저앉힐 거니까.”
다정은 말을 잃는다. 그저 당황한 얼굴로 윤하를 내려다보던 다정의 눈이 시큰해진다.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다정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다정에게 어떻게 손도 못 뻗고 손만 하얗게 질릴 정도로 붙잡고 있던 윤하가 덜컥 겁을 먹었다.
“다정아, 다정. 다정아. 나 좀 봐.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너 지금 네가 무슨 말 하는지는 알아?”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이내 도리질을 친다. 쉴 새 없이 낙하하는 윤하의 눈물에 다정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대체 너는 어떻게 살아왔기에, 사랑한다는 말을 이따위로 밖에 못 할까.
“무서워서 그래? 아니야, 나 당신한테 손 못 대. 내가 어떻게 그래.”
오윤하가 뱉은 축약된 단편만으로는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몰려온다. 그냥 사랑한다고 하면 안 돼? 간편하잖아. 쉽잖아.
“윤하야. 나 너 사랑해.”
겨우 한 손을 빼낸 다정이 제 눈가를 얼른 훔쳤다. 그러곤 붙들고 있던 손이 하나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하얗게 질린 윤하의 머리와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던 윤하가 얼른 그 손길에 자신의 모든 걸 맡긴다.
“그러니까 너도 말해 봐, 사랑한다고.”
오랜만에 섹스하다가 이게 무슨 난장판이야. 다정이 코를 훌쩍인다. 오늘은 참 다사다난하다고. 사실은 오윤하를 만났을 때부터 제 삶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탔던 것 같다. 저번에도 했던 생각. 이미 다짐이 되어 버린 결론.
발을 빼기엔 한참 늦었지.
“얼른.”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눈도 깜박이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있던 윤하가, 조심스레 다정의 티셔츠를 끌어당겼다. 아까 막무가내로 쥐어뜯어서 군데군데 흉하게 늘어났다. 그게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조심스레 손가락으로만 살살 쥐고는, 다정을 끌어당긴다. 이내 다정의 어깨가 제 이마에 닿았을 때, 윤하의 입에서 참고 있던 숨이 헉, 터져 나왔다.
“다른 여자는 옆에 서기만 해도 욕해서 쫓아낼게. 매일매일 팔 베게 해 줄게. 싫다고 해도 해 줄게. 누가 너한테 뭐라 하기만 해도 쫓아가서 대신 싸울게. 하늘의 별 따 달라면 따 주고. 나, 나 진짜야.”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뱉던 윤하가 갑작스레 제 품을 뒤졌다. 그러곤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터치하는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는 데다 그 위로 자꾸만 눈물이 떨어져서. 다정에게 보란 듯이 여자 이름으로 된 전화번호를, 그것도 회사 사람 이름까지 전부 지워가던 윤하가 견디지 못하고 전화기를 하찮은 쓰레기처럼 내던졌다.
“달에 가 보고 싶다고 하면 데려가 줄게. 네가 낳는 아이의 아빠도 되어 줄게. 너를 사랑하는 만큼, 얘도, 얘도 아껴 줄게.”
윤하의 손이 다정의 배를 톡, 건드리다 이내 부드럽게 감쌌다. 윤하가 하는 말과 행동을 모두 지켜보고 듣고 있던 다정이 더는 참지 못하고 윤하를 끌어안았다. 다정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든다. 웃기게도 이 순간이 숨을 쉬기도 어려울 만큼 벅차다. 돌아올 것이란 기대가 없던 이의 사랑이란 단어 없는 모든 문장이 감동스럽긴 한데,
다정이 눈물을 훔치다 말고 잠깐 눈을 깜박였다.
“응?”
퉁퉁 부은 눈이 서로를 마주한다. 여전히 다정의 배에 닿은 윤하의 손을 한 번 내려다본 다정이 한 번 더 소리를 냈다. 으응?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데?”
다정이 저를 선택했고 옆에 있어 줄 거란 감격에 빠져 있던 윤하도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속눈썹에 눈물방울을 단 채 눈을 깜박인다.
“어?”
다정이 잠시 윤하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곤 아까 오늘은 좀, 이라고 했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 어제 생리 끝나서, 그래서 섹스하기도 좀 그랬던 건데.”
혹시 모르니까. 이제 안 나오겠지 싶어서 패드를 뗐다가 팬티에 묻어나오는 바람에 열받았던 일까지 설명해야 하나 싶어 다정이 잠깐 입을 다물고 어물거렸다. 멍청한 얼굴로 다정과 다정의 배를 번갈아 보던 윤하가 제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다시금 흉폭해진 얼굴이 다그치듯 다정의 시선을 붙들었다.
“그럼 그 새낀 뭐야.”
“그 새끼?”
맞다. 오윤하가 아까 섹스 중에 헛소리 좀 했지. 다정도 궁금했던 차라 묻는다.
“그게 누군데?”
“응?”
“어?”
그때 거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자고 있던 라라가 막 깼는지 야옹, 소리를 냈다.
“옭?”
“으응?”
“어엉?”
비척비척 다가오던 라라가 중간에 윤하를 발견했다. 뭔갈 망설이던 라라가 이내 윤하의 무릎에 발을 얹고 다정의 품에 점프했다. 다정이 잠깐 라라를 밀어내기 전, 윤하가 먼저 손을 뻗어 라라를 다시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지갑을 뒤져 누런 지폐를 잡히는 대로 꺼냈다. 라라 앞에 지폐를 내려놓는 윤하의 표정이 심각하다.
“넌 좀 나가서 놀다 와.”
고양이가 나가서 술을 마실 것인가 PC방에 갈 것인가. 네깟 것 주제에 내 몸에 손대냐고 귀를 젖히고 윤하를 노려보던 라라가 방귀를 뿡 뀌고 뒤돌아섰다. 지폐만 덩그러니 거실 바닥에 남았다.
“한 달 전쯤에.”
눈을 내리깔고 망설이던 윤하가 다정과 눈을 맞췄다. 태도가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당신 연차 냈을 때, 그때 어떤 남자가 전화 받아서 윤다정 남자 친구라고 했는데.”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듣고 있던 다정이 어리둥절하게 뺨을 긁었다. 윤다정 남자 친구라고? 잠시 있어 봐, 그날이. 아.
“재원이.”
“재원?”
윤하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진다. 아직 그걸 발견 못 한 다정이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매만진다.
“동생이야. 윤재원. 윤하 너도 본 적 있어.”
“……내가 언제?”
동생 욕 하나만큼은 마음에 잘 두고 있던 다정이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예전에 우리 처음 밥 먹었을 때. 그때 배경 화면으로 해 놓은 남자애. 이직 막 했을 때 곤란한 일이 좀 있어서 걔가 계속 남자 친구 행세해 주고 있었거든. 나이 차이도 좀 나고, 생긴 것도 별로 안 닮아서.”
벌떡 일어나 제 핸드폰을 가져온 다정이 병원에 면회 갔던 날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가는데, 말을 하면서 차츰차츰 다정이 깨달아 간다. 그럼 지금 그때 재원이가 그랬던 것 때문에 질투 나서 이런 짓을 했던 건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다 늦게 제가 어떤 놈을 좋아하게 됐는지를 깨달은 다정이 뒤늦게 후회로 가득한 한숨을 쉰다.
“윤하, 너…….”
한소리 하려던 다정의 숨이 턱, 막혔다. 당장 다정을 끌어당긴 윤하가 으스러질 듯 다정을 꽉 품에 안은 탓이었다. 다정의 눈이 빠르게 깜박인다.
“그럼, 윤다정이 좋아하는 건 세상에 나뿐이야?”
아니, 그건 아닌데.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