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 (4권)3화 (15/17)

15장

어쩐 일인지 같이 회를 먹은 다정은 멀쩡한데 서 팀장만 탈이 났다. 밤새 설사했다는 말에 얼굴을 다시 보니 달달 떨리는 마른 어깨며 얼굴이 창백했다. 이러다 송장 치르겠다 싶어서 다정이 일단 병원에 가시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호텔에서 운영하는 리무진도 다 예약이 되어 나갔다고 하고, 비가 오는 바람에 바쁜지 콜택시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정이 로비까지 가서 약을 받아 왔다.

약을 가지고 돌아오던 다정이 윤하의 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뭐 하나 귀를 기울여볼 필요는 없다. 아침 일찍 나갔다는 말을 서 팀장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몰디브 쪽 사람을 만난다고, 처음부터 오윤하가 아는 사람이 다리를 놓아 주기로 했다는 말엔 다정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119라도 부를까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약도 먹고 따뜻한 물주머니까지 배 위에 올린 서 팀장이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웃는다. 그래도 약을 먹은 뒤에는 손도 떨지 않고 배도 안 아프다니 그쯤 해서 다정이 물러난다. 옆에 있으면서 상태를 본 뒤에 다시 권유해도 괜찮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아이고, 그놈의 고등어 회!”

끙끙 앓으며 서 팀장이 고등어 회를 원망한다. 시끄럽긴 하지만 일하는데 방해될 정도도 아니고, 방해된다고 해도 아픈 사람한테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으니 다정은 그냥 얌전히 서류만 넘기고, 본사에서 보내온 메일을 체크 해 자료를 취합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핸드폰 벨 소리에 서 팀장이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정이 잠깐 손을 멈추고 서 팀장을 본다.

“응? 아, 넥타이?”

서 팀장이 잠깐 다정을 봤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서 팀장이 다정을 본다.

“저기, 다정 씨.”

“네.”

전화 건 상대의 부탁이 엉뚱했는지 서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제 트렁크에서 가장 예쁜 넥타이를 골랐다. 그 모두를 지켜보던 다정도 고개를 갸웃한다. 얼마 뒤, 넥타이가 다정의 앞에 내밀어졌다.

“이것 좀 상무님한테 전해 드리고 오실래요? 잘은 모르겠는데 내 넥타이 좀 빌리자고 하셔서. 그쪽에서 택시 보낸대요.”

거기서 잠깐 다정의 표정이 흔들리지만, 빠르게 다잡는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다정이 일어났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삼다도라고 했다. 바람과 돌, 여자가 많다고. 옛날엔 물에 휩쓸려 죽는 어부가 많아 과부가 많았을진 몰라도 이젠 남는 과부가 드물어졌으니 현대 사회에 맞춰 과부는 빼고 그 자리에 비를 넣는 게 어떨까. 택시 뒷자리에서 다정이 생각한다.

대학생들에게 참으로 만만한 여행지가 제주도인지라, 동기들이 여름 방학이면 한 번씩은 꼭 놀러 갔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날씨가 구려서 여행이 망했다며 투덜거렸다. 세희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희가 기념품으로 사 온 감귤 초콜릿을 옆구리에 낀 채 다정은 항상 세희의 자취방에 끌려가 술을 마셔야 했다.

그러고 보니 세희. 생각을 세희의 이름에서 멈춘 다정이 핸드폰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메시지 창까지 들어가 봤다. 겨울에 받았던 연락 달라는 메시지에 답장을 안 했었다. 세희도 그 뒤로는 따로 메시지나 전화를 남기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답장해야 하는 걸까. 망설이던 다정의 손가락이 이내 물러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오전부터 낮까지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오던 비가 슬슬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택시에서 내린 다정의 뺨에 습하고 축축한 공기가 달라붙는다.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와 습기가 만나니 끈적끈적한 감각이 피부에 남았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던 다정의 시선이 이내 한쪽에 고정된다.

“근데, 넥타이는 왜?”

제가 자기 스폰서를 소개하면 뭐 해 줄 거냔 민영의 당돌한 질문에 윤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공중파 광고에 모델로 기용하겠다고 했다. 실체가 어쨌든 지적이고 단아한 이미지의 민영은 호감도가 높은 연예인이었다. 뭐, 여행사업 홍보 때릴 때 연예인 광고도 있으면 나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대뜸 윤하의 얼굴을 보자마자 넥타이 바꿔 오라는 말을 던진 민영이 윤하의 뒤늦은 질문에 다리를 꼬았다.

“그 사람. 질투 엄청나거든.”

윤하가 눈을 깜박인다. 민영이 담배를 물며 말을 이었다.

“젊고 잘생긴 남자 안 그런 척 엄청 싫어해. 네 얼굴을 어떻게 할 순 없으니 옷차림이라도 촌스러워야지.”

그래서 구린 넥타이 구해 오라고 한 거군. 서 팀장에게 가진 것 중 제일 예쁜 넥타이를 가져오라고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윤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윤하를 지켜보던 민영이 라이터를 밀었다. 뻥 뚫린 테라스라 흡연이 가능한 곳이었다. 윤하가 별생각 없이 민영에게 불을 붙여준다. 민영의 눈썹이 잠깐 까닥인다. 안 그런 척 윤하를 뜯어보는 중이다. 껍데기나 기본 매너는 훌륭한데. 하지만 알맹이가 싸가지 바가지라는 걸 알아서 더는 찔러 보지 않을 생각. 저 사소한 헤픔에 끌려 서승연 꼴 나긴 싫으니까.

“저기 오네. 넥타이 든 사람.”

민영이 윤하의 어깨너머를 턱짓했다. 여자가 담배 피우는 데는 딱히 반대 의견도 없고 오히려 섹시한 편이라고 생각하는 윤하는 엉뚱하게 민영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며 다정이 담배 태우는 걸 상상 중이었다. 되게 섹시하겠는데? 상상을 마치고 뒤늦게 고개를 돌린 윤하의 어깨가 굳는다.

민영과 좀 떨어진 곳에서 멈춘 다정이 까닥, 인사했다. 민영도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곤 머뭇거리는 윤하를 쳐다봤다. 왜 저래?

“안 받아 와?”

가까워지기 전부터 오윤하와 같이 있는 게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상대가 TV에서 몇 번 본 연예인이라 다정이 좀 놀란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윤하가 움직이지 않으니 다정이 먼저 다가간다. 넥타이를 내려놓았다. 민영이 넥타이를 보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구리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다정이 돌아선다. 민영이 넥타이를 들고 윤하의 얼굴과 번갈아 쳐다보는 동안, 윤하는 눈을 내리깐 채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그러다 민영이 얼른 넥타이 바꾸자고 손을 뻗을 때, 벌떡 일어났다.

윤하는 아직도 모른다. 사귀자는 말에 왜 다정이 상처받는지. 떠본 거 인정. 자길 좋아하니 당기면 당기는 대로 끌려 올 거라는 생각에 던져본 말이란 것도 인정.

“기다릴래?”

나를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가 얼만큼인지, 궁금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다정이 걸음을 멈추고 윤하를 돌아봤다.

“오래 안 걸려. 금방 내려올 거야.”

“…….”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가.”

다정이 코로 한숨을 쉰다.

“팀장님이 아파요.”

“어디가?”

다정이 어깨를 으쓱한다.

“배탈 난 모양이에요.”

“그 정도는 뭐…… 택시 보낼 테니까 타고 병원 가라고 할게.”

다정의 한숨이 좀 더 깊어졌다. 이내 잠깐 웃고 윤하의 팔을 잠깐 만진다.

“갈게요.”

“……다정아.”

다정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미안해.”

운을 떼고도 윤하는 한참 주저했다. 시선이 길어진다. 이윽고 마른 침을 삼킨 윤하가 입을 뗐다. 여자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것쯤이야 자존심 상하는 일도 아닌데. 어렵지 않은 것도 다정의 앞에선 늘 어렵다.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 여자를 옆에 두는 게 왜 이렇게 어렵지. 세상에 보기로 던져놓으면 다정이야말로 제일 쉬운 여자인데.

“그런 식으로 시험하지 않을게.”

다행히 윤하가 정답을 골랐다. 윤하를 물끄러미 보며, 다정은 숨을 죽였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일까. 머리가 멍했다.

“……그럼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바라던 대답을 들었는데도 윤하는 웃지 않았다. 가만히 무표정한 다정을 보다 품에서 카드 키를 꺼낸다. 제 방에서 지갑도 같이 들고나오란 말에 다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문득 윤하의 시선이 다정의 운동화에서 멈췄다.

“끈 풀렸다. 운동화.”

다정의 눈도 제 발로 내려갔다. 윤하가 무릎 굽혀 운동화 끈 매 줄 위인도 아니고 그런 기대도 한 적 없기에 다정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윤하가 돌아서는 걸 보고 나서야 다정이 무릎을 굽혀 운동화 끈을 맸다. 담배를 태우며 멀찍이서 둘이 뭘 하나 지켜보던 민영이 돌아오는 윤하에게 넥타이를 내밀며 담배를 껐다.

“골프 치자고 해. 내일쯤. 그리고 티 안 나게 져 줘. 일 얘기는 술 마실 때 하고.”

윤하와 나란히 걸으며 민영이 도움이 될 말을 읊는다. 그러다 문득 멈춰서 윤하를 훑어본다. 윤하가 왜 말을 하다 마냐고 돌아봤다. 저렇게 구린 넥타이를 해도 근사하다니. 잠깐 입을 닫고 속으로 감탄한 민영이 고개를 예쁘게 기울이며 말을 꺼냈다.

“너 말이야. 방금 그 여자 좋아해?”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더위를 먹고 미쳤나, 싶은 표정으로 윤하가 민영을 본다. 윤하의 표정을 잘 파악한 민영이 코웃음 친다.

“살다 살다 오윤하가 여자 앞에서 긴장하는 모습을 다 보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먼저 오른 민영이 빨리 타라고 고갯짓을 했다. 윤하가 뚱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벽에 기댔다. 잡지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근사한 몸을 훑던 민영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그 여자가 귀찮게 구는 거면 솔직하게 말해. 가볍게 만난 사이에 질척이는 여자 걷어차는 거, 잘하잖아?”

윤하와 눈을 마주한 민영이 또박또박 말한다.

“잘하면서 왜 그래? 진짜 좋아하는 것처럼. 진짜 좋아해?”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린다. 대답 없는 윤하를 두고 시선을 돌린 민영이 탈 때처럼 먼저 내리다 말고 다시 윤하를 봤다. 살짝 윙크를 곁들이며 반쯤 농담 섞인 말을 던졌다.

“하긴 서승연도 걷어찬 천하의 오윤하가 누굴 진심으로, 뭐 그럴 수 있겠나 싶지마는.”

그래서 똑똑한 나는 너 안 좋아하는 거고. 덧붙인 민영의 도도한 말에 그때야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운 윤하가 민영을 붙잡아 세웠다.

“진짜 좋아하는 게 무슨 느낌인데?”

말을 잃고 윤하를 보던 민영이 허, 웃었다. 그리고 다소 진지하게 말했다.

“너는 솔직히 나쁜 놈은 아닌데.”

“…….”

“졸라 나쁜 놈이야.”

민영의 대답을 들으며 눈썹을 찡그리던 윤하가 순간 입을 틀어막고 돌아선다. 민영만 까닭 모르고 당황한다. 구석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간 윤하가 변기를 붙잡고 웩웩 속에 든 것을 쏟아냈다. 의사의 경고를 어긴 대가다. 사탕 까먹듯 먹으면 안 되는데.

하지만 잠이 안 오는 걸 어떻게 해?

“야, 오윤하 괜찮아?”

윤하를 쫓아 남자 화장실에 들어온 민영이 묻는다. 윤하가 나온 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세면대에 두 손을 짚고 입을 헹구는 윤하를 두고 민영이 걱정스럽게 말을 건넨다.

“너 어디 아파?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니?”

“그래서.”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턱 아래로 흐르는 수돗물을 대강 훔친 윤하가 거울을 통해 민영을 쳐다봤다.

“진심으로 누굴 좋아하는 게, 곧 토할 것처럼 숨 턱턱 막히는 그런 기분이야?”

어둑하게 그늘진 윤하의 얼굴을 보던 민영이 입을 다문다. 그런 민영을 좀 더 쳐다보던 윤하도 이내 입을 다물고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기분이 최악이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약국에 들른 다정이 이것저것 약을 샀다. 룸서비스로 시킨 죽과 함께 건네주자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으로 연신 고맙다고 하던 서 팀장이 한 시간도 안 돼서 도로롱 곯아떨어졌다. 이쯤이면 직장 동료로서는 충분히 한 셈이라. 더 지켜보지 않고 다정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캐리어에서 대충 챙겨온 옷을 꺼내 늘어놓는다.

웃기지만, 그래도 같이 밥 먹기로 했으니까.

사랑에 빠지면 옷 하나 고르는 것도 신경 쓰이고 새삼스러워진다. 벗어둔 운동화 대신 비닐로 꽁꽁 묶어 데려온 구두를 꺼내고, 혹시 몰라 챙겨온 블라우스와 치마도 꺼낸다. 오윤하가 특별한 의미를 두고 사 준 블라우스도 아닌데, 윤하와 뭐 할 때마다 이런 거에 손이 가는 자기가 바보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어울리는 재킷이 없어 고민하던 다정은 이내 블라우스만 걸치기로 했다. 제주도의 밤바람은 계절과 상관없이 싸늘한 편이지만 어차피 식당과 호텔은 차를 타고 이동할 테니 괜찮을 거란 판단이었다. 가방까지 챙긴 다정이 이번엔 윤하의 방으로 들어간다. 다정의 방보다 크기는 좀 더 컸고, 싱글 투베드가 아니라 킹사이즈 원 베드라는 것만 빼면 딱히 크게 다른 것도 없었다. 아니 화장실이 좀 더 큰가? 열린 욕실 문 안쪽을 살짝 들여다본 다정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두리번거렸다. 딱히 짐을 꺼내놓거나 한 건 아닌데 뭔가 어수선하다.

다행히 지갑은 침대 옆 작은 탁자에서 바로 찾았다. 더 챙길 건 없겠지, 싶다가도 요청한 것도 없는데 주인 없는 방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도 이상해서 그쯤 걸음을 뗀다. 그러다 다정의 걸음이 잠깐 옷장 옆 미니바 근처에서 멈췄다. 술 마셨나.

뚜껑이 열린 채 반쯤 빈 브랜디를 쳐다보던 다정이 집에서 하는 버릇대로 무심코 정리했다. 뚜껑을 닫고 똑바로 올려놓는다. 그러다 문득 뭔갈 발견했다. 약 봉투 표면엔 서정수, 라는 이름이 쓰여있다. 왜 서 팀장 약이 여기 있지. 손을 뻗던 다정이 추가적으로 뜯긴 비닐을 발견한다. 총 세 개. 순간적으로 다정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오른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똑똑히 새기는 건. 서 팀장에게 전달받아 윤하에게 내던지듯 건네줬던 그 약. 그때는 겉면에 아무것도 안 쓰여있어 그냥 감긴가, 부자는 감기약도 제 손으로 안 타서 먹나 했던. 다정이 손이 약 하나를 거침없이 뜯는다. 다른 손엔 핸드폰을 들었다. 얼마 뒤, 다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저녁은 해안도로 인근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먹었다. 가게는 콩알만 한데 메뉴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쌌다. 물론 마을 해녀들이 잡아 오는 대로 바로바로 구매한다는 해산물은 신선했고, 이천 쌀로 지은 밥도 고슬고슬하니 맛이 좋았지만, 제가 먼저 저녁을 먹자고 한 주제에 윤하는 반 이상을 남겼다. 다정도 별반 다를 처지는 아니라 더 먹으라 억지로 권하지 않는다. 식사 중엔 딱 두 마디가 오갔다.

“형은?”

“약 먹고 괜찮아진 것 같아.”

이상하게 느물거리는 악센트를 가진 인간을 상대하느라 피곤한데 깔깔한 속에 억지로 밥을 넣었다고 금세 윤하의 속이 더부룩해진다. 티는 내지 않았다. 그보단 다정이 신경 쓰였다. 아직도 화가 났나? ……아까 내가 미안하다고까지 했는데. 시무룩한 윤하의 눈길에 다정의 어깨가 잡힌다.

“추워?”

국산 차는 익숙하지 않은 도련님이 여기저기 만져 보다 히터를 틀었다. 침묵 속에서 해안도로를 천천히 서행한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이 이정표처럼 빛나다 지나갔다. 원래도 말이 많지 않은 다정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없다. 역시 아직 화가 난 건가. 윤하가 손을 뻗어 이번엔 라디오를 켰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인지 라디오 패널들이 하하 호호 웃고 떠들고 있었다. 히터를 튼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다정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리는 걸 본 윤하가 뒷좌석에 대충 던져 둔 제 재킷을 다정에게 건넸다.

“덮어.”

“괜찮아.”

거기서 윤하의 미간이 좁혀진다.

“자꾸 떨면서 사람 신경 쓰게 하지 말고 줄 때 받아.”

자길 쳐다보지 않고 말을 하는 윤하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다정이 재킷을 순순히 받았다. 순순히 받았는데 왜 더 짜증이 나지. 윤하가 코로 한숨을 쉬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긴다. 라디오는 화기애애한데 차 안엔 북풍처럼 차가운 침묵뿐이다. 그 대비가 거슬린 윤하가 기껏 튼 라디오를 오 분도 듣지 않고 다시 꺼 버렸다.

다정은 생각 중이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지. 감기약도 아니고 그런 항정신성 약물은 대리 처방받으면 안 된다고? 그게 불법인 거 아느냐고? 애초에 왜 직접 병원에 가지 않고 서 팀장이 네 약을 받아다 주냐고? 어떤 말을 꺼내도 말에 달린 모서리가 제 속부터 할퀼 것 같다.

더 무서운 건, 이 사랑이 실패할 거라고 이미 다정이 점찍어 놨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오윤하를 알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오윤하의 황폐한 마음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게 윤하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 생길 거란 뜻도 아니다. 오로지 그 주인의 마음에 달렸을 뿐. 다정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냥 덮어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모른 척 지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막 그렇게 생각할 때, 윤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속도를 조금 줄인 윤하가 곁눈으로 다정을 봤다. 미간에 주름을 지어 가며.

“화 많이 난 거면, 때려도 돼. 뺨 정도는 내줄 수 있어.”

다정의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진다. 말을 잃고 멍청하게 윤하의 옆얼굴을 들여다본다. 여전히 무고한, 나는 할 만큼 했고 미안하다고도 했지만, 화가 덜 풀린 거면 말 좀 하고 표현 좀 해. 그런 표정. 다정은 정말 울고 싶어졌다. 너는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기에.

“……넌 대체 무슨 생각 하면서 사는 거야.”

다정의 말이 달달 떨려 나온다. 생각과는 다른 반응에 윤하가 조금 당황했다.

“아니 또 왜 화를.”

“맞아서 그 모양 그 꼴 나한테 보여줬던 게 얼마나 지났다고,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

윤하가 눈을 빠르게 깜박인다. 내가 말을 뭐 잘못했나?

“너는 왜 그런 게 아무렇지 않은데. 왜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속상해 미칠 것 같아져야 하는데!”

뭔가가 아무렇지 않아질 때까진 아프고 또 아픈 시간 들이 있어야 함을 다정이 알고 있기에 속이 상한다. 실제로 다정이 그렇게 수년을 걸쳐 말을 아끼고 감정을 감추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다정을 윤하가 흔든다. 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남자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바락바락 악을 쓰는 다정에 놀라 윤하가 잠깐 차를 세웠다.

놀란 얼굴의 윤하와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에 다정은 참고 있던 감정이 북받치는 걸 느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말 몇 마디 했다고 숨까지 흐트러졌다. 숨을 씩씩거리며 윤하를 보던 다정의 얼굴이 순간, 울상이 되고 만다. 난 뭐 이런 놈을 좋아하지.

“윤하야.”

잔뜩 일그러진 입술이 발발 떤다.

“나는 네가 아파…….”

실패할 걸 아는 사랑을 하는 것도 벅찬데, 네가 아프기까지 해.

“체한 것처럼 뭐가 턱 걸려서, 뱉어지지도 않고 넘어가지도 않아.”

다정이 눈물 없이 꺽꺽 소리를 낸다. 잔뜩 곤두섰던 어깨가 힘없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 모두를 윤하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절벽 끝에서나 선 사람이 지을 법한 표정으로, 다정이 좋아한다는 말 없이 저를 좋아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토록 알고 싶던 다정의 마음의 무게가 느껴지는 순간이거늘, 다정을 지켜보던 윤하가 갑작스레 차 문을 벌컥 열었다.

낮에나 드라이브 명소지, 깜깜한 밤이 되면 바다에 인접한 도로는 그다지 인기 있는 코스가 아니다. 하물며 해안도로가 낀 마을에 대부분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사람들만 모여 산다면 더더욱. 인기척 따윈 없는 곳에서 윤하가 무릎을 꿇고 또다시 웩웩, 속에 든 것을 토해 낸다. 그래 봤자 입에 넣었던 것들이 별 볼 일 없어 그냥 액체만 후드득 떨어진다. 놀란 다정이 따라 내렸다.

“오지 마.”

입가를 훔치며 윤하가 소리친다.

“내가 좋다고 내가 뱉은 토사물까지 좋은 거 아니면.”

얼굴이 허옇게 뜬 와중에 또 농담이랍시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데 다정이 또다시 울컥한다. 오지 말라는데 기어코 오지, 오라 그럴 땐 안 오고.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윤하가 다시 웩, 속에 든 것을 게워 낸다.

이래서 약 먹는 게 싫다. 사람 멍청해지고 조금만 의존하면 몸이 난리 나고. 잠 못 자고 버티다 여기저기서 픽픽 기절해 버리는 게 나은 건지 아니면 지금이 나은 건지 갈피를 못 잡은 윤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차에 물 있으니까……”

“병원 가.”

윤하의 말이 뚝 끊겼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윤하의 생각도 뚝뚝 끊긴다.

“……뭐?”

“잘 못 자는 거 맞지.”

“…….”

“자고 싶어도 못 자는 거, 맞지.”

금방 울 것 같은 다정을 보며 윤하가 애써 코웃음을 쳤다. 그쯤이야 같이 보낸 밤이 몇 번인데 모르겠어.

“그게 뭐라고.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쓸 거 없어.”

물은 내가 가져와야겠네. 다정을 두고 윤하가 갓길에 세워 둔 차로 향했다. 막 운전석 문을 붙잡는데, 다정이 다가왔다. 윤하의 팔을 붙든다.

“먹을 거면, 제대로 처방받은 약 먹어.”

거기서 윤하의 사고가 정지된다.

“네 말대로 그거, 별거 아니잖아. 감기 걸린 사람이 병원 가는 게 이상해? 아니잖아, 윤하야.”

윤하야. 윤하야. 다정이 윤하를 부르는데 윤하의 귀엔 들어오는 게 없다. 멍청하게도 아무렇게나 늘어놨던 약을 그제야 떠올린다. 머리가 텅 비어 버린 윤하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운전석 문을 열고, 물을 꺼낸다. 입을 헹구고, 뱉고. 남은 몇 모금은 세 차례로 나눠서 삼켰다.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열어둔 문 위에 얹은 윤하가 천천히 숨을 고른다.

그런데 어쩌지. 가라앉지 않는다.

“……봤어?”

다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울 것 같은 표정이다. 다정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가 위로 올라오는 게 슬로 모션으로 잡힌다. 그 순간 윤하는 수천 명 앞에서 발가벗겨진 수치심을 느낀다.

“하.”

처음 이상할 정도로 잠을 못 잔다는 걸 깨달은 건, 윤하가 막 인턴 생활을 시작했을 때였다. 아직까진 아버지 말 잘 들으며 열심히 살고 있었을 때. 그때까진 윤하도 별생각이 없었다. 카운슬링 같은 거야 미국에선 흔하게들 받으니까. 별 거리낌 없이 정신과에 스스로 발을 디밀었다. 가벼운 불면증 증세가 있으니 정 잠이 안 올 때만 드세요. 먹었을 때 평소랑 다른 증상이 있으면 꼭 전화하시고요. 젊은 의사는 친절했다.

그러라니까 그렇게 했다. 몇 번 먹으니 집중력도 좀 떨어지는 것 같고 식욕을 비롯한 모든 욕구가 시들시들해지는 것도 느꼈다. 그래서 또 멀리했다. 정 잠이 안 올 땐 만나는 여자와 섹스를 했고 더 잠이 안 오면 러닝머신 위에서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까진 괜찮았다.

아버지한테 들키기 전까진.

“그래서 뭐. 내가 불쌍해?”

참 웃기게도 따귀를 얻어맞으며 들었던 그 말들, 그 말들이 아직 윤하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꾸역꾸역 삼키다 씨발, 다 좆까. 하고 여태 해온 모든 것을 뻥 차 버렸을 땐 좀 시원해지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때처럼 윤다정이 날 한심해하는 건 괜찮아.

“아, 윤다정 나 좋아하지. 그게 불쌍해서 좋은 거였나? 그거 좀 만져 주면 내가 개새끼처럼 학학거리면서 나도 너 좋아, 이럴 것 같아? 씨발, 좆까.”

하지만 불쌍해하는 건 안 돼.

불쌍하고 나약한 인간은, 저기 저 길가에 버려진 토사물 같은 거니까. 모두가 혀를 쯧쯧 차지만 건드리기도 싫어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모습은 안 돼.

나오는 대로 말을 뱉은 윤하가 사납게 다정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떡이라도 칠까? 사람도 없고 딱 좋네.”

다정을 앞에 두고, 가시 돋친 말이 연신 튀어나온다.

“너 내가 쑤셔 주는 거 좋아하잖아. 옷 입었을 때나 꼿꼿하지 옷 벗으면 만지는 대로 질질.”

블라우스를 찢어 버릴 듯이 다가가던 윤하의 손이 잠시 멈칫한다.

“옷, 벗으면…….”

떨리는 눈을 든 윤하가 다정을 봤다. 정확히는 다정의 눈을. 울고 있기라도 하면 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어 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다에 콱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 생겨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봤던 눈이다. 겁에 질린 얼굴.

웃기게 막말을 한 건 전데, 제가 울고 싶어진다. 천천히 다정을 밀어낸 윤하가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도 떨리고 뺨도 떨려서 뭐가 가장 많이 떠는지 구분도 못 하겠다.

“핸드폰, 챙겨.”

가까스로 꺼낸 말에 다정이 윤하를 봤다. 커다란 손에 가려져서 지금 오윤하가 짓고 있는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모르겠다.

“콜택시 번호 모르면, 호텔에 전화해. 호텔에 전화해서 리무진 보내 달라고 하면 금방 올 거야. 차로 십오 분 정도만 가면 되니까.”

다정이 윤하에게 뻗던 손을 움츠렸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보지도 않고 그런 다정의 시도를 눈치챈 윤하가 조소했다. 조소하려고 했다. 나오는 건 속이 텅 빈 깡통 같은 말뿐이다.

“건드리지 마.”

“…….”

“나 지금, 당신 얼굴 보면 개 같은 짓거리 할 것 같아. 그러니까.”

제발 건드리지 마. 제발.

그 뜻을 읽은 다정이 손을 완전히 거둔다. 핸드폰과 가방을 챙기고 물러나자, 차가 출발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혼자 있을 곳을 찾아서.

멍하니 차가 사라진 도로를 보고 있던 다정이 손을 움직인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호텔 번호를 찾았지만 어쩐지 엄지가 전화 버튼 위에서 망설인다. 이내 손을 거둔 다정이 가방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한 걸음 떼니 다른 한 걸음도 쉬웠다. 쌀쌀한 바닷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들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별생각은 없다. 그저 차로 십오 분이면 내 걸음으로는 얼마나 걸어야 할까. 그런 시답잖은 것들. 어깨를 움츠린 채 조용히 걸음을 옮기던 다정이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걸음을 한 번 더 옮긴다. 잘 닦인 평평한 도로인데 발을 딛자마자 찌르르, 가시를 밟은 듯한 통증이 올라온다.

어느 순간 다정이 깨닫는다. 제가 울고 있다는 것을.

하도 덤덤하다고 세희가 로봇 아니냐 놀린 적도 많았는데. 오윤하는 저를 울리는 일이 아주 쉽고 많다. 하지만 다정은 멈추지 않는다. 발에서 이상한 통증이 올라와도, 눈물에 시야가 흐려져도.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탑 위의 외로운 왕자님.

탑으로 가는 길에 핀 꽃이 나를 환영하는 선물인 줄 알았는데, 실은 오지 말라고 심어 둔 찔레꽃이었다.

차에서 내려 로비까지 걷는 것만으로도 윤하는 벅차 죽을 지경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은 일 초가 백 시간 같아서, 힘에 부친 몸뚱이를 벽에 기댔다. 로비에 상주하는 직원이 다가와 괜찮냐고 묻는 것을 손짓으로 쫓아 보낸다.

카드를 인식해 문을 여는 데만 몇 분을 소요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찾아오는 기분이었다. 신발을 벗을 때까지도 몇 번이나 쉬었다. 평소엔 생각 없이도 가능한 일들인데 몇 번이고 숨을 고쳐 쉬고 생각을 떠올려야만 가능하다. 멀쩡한 의자며 침대를 내버려 두고 바닥에 앉은 윤하가 그대로 옆으로 몸을 눕혔다. 딱딱한 바닥이 차갑다. 하지만 본인에겐 이 정도가 어울린다.

다신 그딴 개 같은 짓거리는 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어겼다. 이내 고개를 잠깐 든 윤하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다. 쿵, 쿵. 소리가 울린다. 반복할수록 통증이 진해진다. 진해질수록 머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에 계속 반복하던 윤하가 이내 전부 관뒀다. 숨 쉬는 것도 버거워진 탓이다.

이제 끝났어.

돌이킬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윤하는 제가 왜 다정을 시험했는지에 대한 답을 이제야 알았다. 내가 왜 윤다정이 얼마나 날 좋아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을까. 왜, 왜 그래야 내가 윤다정을 무슨 마음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을까. 수도 없는 질문이 무색할 정도로 답이 간단하다.

길가에 취객이 뱉은 토사물 같은 제 속을 보고도 다정이 안아 줄까. 좋아할까. 그게 궁금했던 거다.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서 온갖 호스를 끼운 채 숨도 제 스스로 못 쉬는 형과 저는 다를 거라고. 아버지가 내게 손을 뻗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때처럼.

그러다 따귀나 얻어맞고 아들 둘이 있는 게 둘 다 병신 새끼냐고 욕먹었지만.

이젠 약 먹을 생각도 안 든다. 얼마나 지났을까. 멍하니 누워 있던 윤하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약을 죄다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버리다 못해 어젯밤 뜯었던 브랜디도 쓰레기통에 전부 쏟아부었다. 그것도 모자라 침도 뱉는다. 그걸 전부 변기에 쏟아붓고 내릴 때, 누군가 노크했다. 흠칫한 윤하가 숨을 죽인다. 노크에 반응이 없자 이번엔 벨이 울린다. 가까스로 눈을 한 번 깜박인 윤하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맥이 풀려 잠깐 벽에 기댄다.

“왜.”

“아니이. 너는 내가 아픈데 한번을 들여다보질 않니.”

아프다고 하더니 얼굴만 멀쩡하네. 밤새 서 팀장이 설사를 얼마나 했는지 모르는 윤하가 코웃음을 친다. 뭐, 설사를 얼마 했는지 알았다고 해도 지금은 딱히 반응해 줄 정신이 없긴 하지만.

“메시지 보냈잖아.”

“전화도 아니고 메시지가 뭐야.”

“병원 다녀왔어?”

서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다정 씨가 약 사와서 그거 먹었지 뭐. 에휴, 너는 어때. 잘 만나고 왔어? 뭐래.”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윤하는 저녁 먹을 때 다정에게 똑같은 걸 물었었다는 걸 떠올렸다.

“겨우 한번 만났는데 뭐가 잘되고 말고야. 나가. 나 피곤해.”

윤하가 밀어내는 것에 힘없이 밀려나던 서 팀장이 어어, 한다.

“아이. 자식이.”

문틈을 잡고 버티는 것에 윤하가 바로 문을 닫아버린다. 오윤하라면 눈 깜짝 안 하고 능히 사람 손 찧어 버릴 놈이라 서 팀장이 재빨리 손을 뺐다. 문이 닫히기 전 틈새에 서 팀장이 말을 넣는다.

“다정 씨 못 봤어?”

문이 잠깐 멈칫.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서 팀장이 윤하를 빤히 쳐다보다 괜히 윤하의 방을 기웃거린다. 다정이 여기 있을 리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상하네. 산책갔나. 전화도 안 받고. 방에도 없는 것 같던데.”

마른 침을 한번 삼킨 윤하가 묻는다.

“지금 몇 신데.”

“지금? 열두 시 좀 넘었지. 왜?”

잠깐 아득해진다. 이내 정신을 차린 윤하가 서 팀장을 쫓아내듯 밀어버리고 방문을 닫는다. 룸에 딸린 전화를 들고 버튼을 누르자 바로 로비가 연결됐다. 서비스직 특유의 기계적인 친절한 음성이 넘어왔다.

―저희 호텔에선 오후 열 시 이후로는 리무진 운영을 하지 않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는다. 재킷을 챙길 정신도 없이 차 키만 두서없이 쥐었다. 신발도 발에 꿰이는 대로 신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도 못하겠어서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어떻게 주차했는지 기억도 없는 차에 다시 올라탔을 때야 제 한쪽 발엔 뒤축이 구겨진 구두, 한쪽엔 실내화가 꿰여있다는 걸 알았다. 그걸 어떻게 바꿔 신고 와야겠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윤하가 탄 차가 막 호텔을 빠져나와 도로로 진입할 때였다. 윤하의 눈에 뭐가 걸렸다.

아무래도 괜히 걸어오는 걸 선택했나. 다리도 욱신거리고 몸도 으슬으슬하고. 그래도 호텔까지 걸어서 잘 찾아왔으니 스스로 기특하다며 나름의 칭찬으로 무릎을 툭툭 두드리고 있던 다정이 갑자기 제 옆에서 멈추는 차에 놀라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그 차에서 내리는 운전자를 보고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가슴팍을 들썩이며 다정을 보는 눈매가 매섭다. 원래 눈이 찢어져서 저렇겠지. 그렇게 생각해도 다시금 다정이 떠올리는 건 화를 내던 윤하의 얼굴. 눈물은 한참 전에 그쳤는데 괜히 코를 훌쩍거린다. 그러다 차 문을 닫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윤하에 어쩔 수 없이 다정이 반사적으로 물러난다. 하지만 윤하가 손을 낚아채는 게 더 빨랐다. 다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정아.”

생각과 달리 닿은 건, 윤하의 입술.

몸을 기울인 윤하가 다정의 두 손을 조심스레 그러모은다. 손등에 닿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번졌다.

“나 불쌍해하지 마.”

“…….”

“그러지 마.”

다른 사람들이 그러면 얼마든지 개지랄할 수 있는데, 너한테는 그 짓거리 다신 못 하겠어. 내가 그걸 못 견디겠어.

“나 불쌍해하지 마.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해 줘.”

네 말대로 그게 아무렇지 않은 거라면, 아무렇지 않게 대해 줘야 하는 거잖아.

“응? 다정아. 대답 좀 해 봐. 응…….?”

걸음으로 두 시간쯤 되는 거리를 걸으며 다정도 생각하고 있었다.

발을 빼려면 오윤하 이 미친 난봉꾼 바람둥이 자식. 하고 생각했을 때 뺐어야 했다고. 그때라면 혼란스럽긴 해도 지금보단 덜 아팠을 것 같다. 사실 만나면 소리라도 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코를 훌쩍인 다정이 조심스레 윤하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불쌍해서 사람 좋아하는 게 어딨어.”

그건 웃긴 거잖아. 다들 비웃어. 동정심하고 사랑도 구분 못 하는 등신 머저리라고.

“난 네가 헤퍼서 좋았어.”

회사 부하직원한테 하는 거라고 하기엔 너무 뻔뻔했고 복장 뒤집힐 만큼 짜증도 났지만, 그보단 네가 어렵지 않게 하는 행동들이 좋았어. 감추는 것 없이 솔직한 것도 좋아하게 되니까 되게 좋더라. 나는 그러질 못해서.

“그러니까 나는 너 안 불쌍해.”

불쌍해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건 웃긴 거. 하지만 사랑이 안쓰럽기까지 하면, 그건 어떻게 하지.

이미 그렇게 돼 버렸는데.

“진심 같은 거 안 줘도 돼. 그래도 돼. 이제 진짜 그런 말 안 할게.”

이성으로 밀어내기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다정이 윤하의 뺨을 붙잡고 조심스레 입을 맞춘다.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데 키스가 짭조름했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선 연인들이 박 터지게 싸운 뒤엔 애틋하게 섹스도 하고 사이도 무척 좋아지는 게 보통이라지만,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와는 조금 다르다.

하긴, 박 터지게 싸웠다고 하기도 뭐하지. 어깨를 으쓱한 다정이 기지개를 쭉 켠다. 기지개도 켜고 왼쪽, 오른쪽, 허리를 비틀어도 영 개운하지 않은 건 며칠 전 옷 얇게 입고 바닷바람 내내 맞은 탓인 것 같다. 어젯밤엔 이불을 아무리 덮고 여며도 으슬으슬한 게 이상해 로비까지 가서 감기약을 받아먹었다. 그래도 어째 몸 상태가 나아진 것 같진 않다.

거울 속 영 까슬한 얼굴을 지켜보던 다정이 제 눈 밑을 한번 훑는다. 거무죽죽한 눈 아래가 파운데이션으로 덮인다. 부르튼 입술에도 립스틱을 바르니 그럭저럭 볼만한 모습이 완성된다. 그러고도 한참 거울 속 자신을 쳐다보던 다정이 노크 소리에 정신 차렸다.

“다정 씨 준비 다 했어요?”

“네.”

거창한 프리젠테이션, 뭐 이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오윤하가 몰디브 쪽에 한 어필이 성공하긴 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남은 이틀 내내 전화를 붙들고 날밤 꼬박 샜다. 윤하와 같이 몰디브 쪽을 만나기로 한 서 팀장은 좀 긴장한 기색이었다. 계속 자기 괜찮냐, 얼굴이 별로 같지 않냐, 묻는 것에 다정이 가볍게 웃으며 잘하실 거라 응원의 문구를 날린다.

먼저 서 팀장이 앞서서 로비를 벗어났다. 다정이 로비에 멈춰서 체크아웃을 진행했다. 그러다 깜박, 현기증에 몸이 비틀거린다. 로비 직원이 놀랐다.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정 몸이 안 좋으면 어제 받아 온 약이 두 개니 하나 더 먹으면 된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자마자 병원에 가면 되겠지. 아니, 라라를 데려오는 걸 먼저 해야 할까? 고민하며 주차장으로 걷던 다정이 잠깐 걸음을 멈춘다.

트렁크에 짐을 싣는 서 팀장 옆에 오윤하가 서 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윤하의 어깨가 다정에 눈에 보일 정도로 움찔했다. 그날 밤 이후로 처음 보는 얼굴이다. 일부러 피한 건 아닐 거다. 다정은 서 팀장과 내도록 노트북을 두드렸고 윤하는 몰디브 쪽에 어필하느라 바빴으니까. 다정이 먼저 걸음을 뗐다.

“좋은 아침입니다. 상무님.”

윤하 앞에 멈춰선 다정이 환하게 웃었다.

“어젯밤엔 잘 주무셨어요?”

흔한 인사말이다. 말없이 다정의 얼굴을 보던 윤하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어렵게 대답한다.

“……좋은 아침이에요.”

점심은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고, 저녁은 일을 마친 뒤 서울에 가서 먹기로 했다. 비행기 시간이 애매하기도 하고 공항 자체에 괜찮게 먹을 만한 음식점도 없다고 하니까. 뒷자리에 앉은 윤하가 조수석에 앉은 다정의 옆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다 이내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사람이 되게 어렵고 어색하네.

반면 다정은 그동안 눈에 담지 않았던 제주도 풍경을 열심히 구경 중이다. 이르게 핀 수국 무더기를 발견한 다정이 눈을 휘며 그걸 마음에 담는다.

거리낄 게 생긴 사람과 거리낄 게 없어진 사람의 차이.

“저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몰디브 쪽에서 머문다는 프라이빗 리조트 앞에서 차가 섰다. 두 사람을 배웅하며 다정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비공식적인 회의는 리조트에서 대여해주는 프레젠테이션 룸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다정을 붙잡고 나 잘할 수 있겠죠, 호들갑을 떨던 서 팀장이 윤하의 눈총에 못 이겨 이내 걸음을 뗐다. 아까처럼 말없이 다정을 보던 윤하가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다정의 손이 윤하의 팔에 닿는다. 조금 놀란 표정이 된 윤하가 다정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이내 다정의 손이 올라와 윤하의 넥타이에 닿았다.

“잘하고 와.”

“…….”

“아니.”

말을 바꾸며 다정이 잠깐 또 미소지었다.

“못해도 돼.”

넥타이를 만져 주던 손이 이번엔 윤하의 뺨을 찾았다.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부드러움에 윤하가 무심코 눈을 내리깔았다.

“열심히 하고 와.”

마음 같아선 뽀뽀도 해 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제게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으니까. 얼른 뒷짐 지고 물러난 다정이 윤하를 보며 조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서 팀장 쪽을 눈짓한다. 무심코 시키는 대로 돌아본 윤하가 저를 기다리는 듯 가만히 멈춰있는 서 팀장을 확인하고, 다시 다정을 봤다. 입을 열었지만, 딱히 나오는 말은 없다.

결국, 적당한 대꾸를 찾지 못한 윤하가 그대로 뒤돌았다. 윤하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다정이 그제야 어깨에서 힘을 뺐다. 오래간만에 해가 쨍쨍한 탓인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고였다. 일단 재킷까지 껴입은 몸이 더우니 시원할 로비에 걸음을 디디는데, 어디서 소리 없이 나타난 직원이 다정에게 투숙 손님이시냐, 아니면 누군갈 방문하러 오셨냐, 묻는다. 별생각 없이 비즈니스 차원에서 방문했으며 상사를 기다리는 중이라 말한 다정이 얼마 뒤, 로비와는 좀 동떨어진 바깥으로 안내되었다.

비서나 운전기사가 기다리는 곳이 따로 있다니. 그것도 저렇게 넓은 로비를 두고 유리로 세워둔 칸막이와 드문드문 떨어진 벤치가 전부다. 너무 돈이 많은 사람은 제 재산에 무감각해져서 다른 이와 차별대우를 받는 것으로 위치를 확인한다는 말이 정말인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백화점마다 VIP, VVIP가 따로 있지. 딱히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라 다정이 얌전히 벤치에 앉는다. 그리고 잠깐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십오 분밖에 안 지났네. 다정은 천천히 제가 초조해지는 걸 느낀다. 윤하 앞에서 내색은 안 했지만, 걱정이 산더미였다. 일단은 실패했다는 가정부터. 특정된 일이 있을 때만 오윤하를 때리는지 아니면 그냥 그게 일상인지 모르겠는 회장부터, 이 일이 만약 실패하면 그러니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돌아다니냐며 또 때릴까 하는 마음.

그리고 앞으로 오윤하는 어떻게 될까. 그게 제일 크다.

잘 못 잤다고 하는 걸 보면 약을 안 먹었거나 약에 내성이 생겼거나 같은데. 다정은 여전히 하루라도 빨리 윤하가 제대로 직접 진단을 받고 약이든 상담이든 처방을 받길 바랐다. 그런데 그날 말 한번 꺼내 봤다가 윤하에게 된통 당했으니…….

내가 알고 싶던 건 오윤하의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알면 알수록 정떨어지게 나쁜 남자이기를 내심 바랐던 것 같다. 전 남자 친구들처럼 질린다고 뒷말이나 하고 다니거나 아니면 웬 여자랑 쿵떡 쿵떡 열심히 놀아나길. 그래서 지켜보는 자기 마음이 확 식어 버리길. 정 붙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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