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다시 월요일이었다. 입맛이 없단 이유로 근처 유명한 매운탕 집에서 다 같이 점심을 먹자는 제안을 거절한 다정이 허기나 대충 때울 생각에 편의점에서 우유와 삼각김밥을 샀다. 가벼운 비닐봉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랑거렸다. 아무 생각 없이 눈이 마주치는 이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막 문이 닫힐 때쯤,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발이 쑥 들어온다. 누가 저런 오윤하 같은 짓을, 생각하던 다정이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상무님 안녕하십니까.”
이크, 오윤하. 안면만 있고 이름은 모르겠는, 윤하에게 씩씩한 인사를 건넨 어떤 남자 뒤에 다정이 재빨리 숨었다. 벽에 너무 바짝 붙어 벽에 달린 긴 손잡이에 허리가 배길 지경이었다. 괜히 땀이 뻘뻘 나는 기분에 숨마저 죽였다.
술에 취했던 건 맞지만 기억이 날아간 건 아니었다. 윤하에게 개새끼라고 한 것도 기억나고, 은지수 이야기를 꺼낸 것도 기억하는 데다, 심지어는. 다정이 소리 없이 침을 삼킨다. 비닐봉지가 부산히 바스락거렸다.
다행히 오윤하는 다정을 못 봤는지, 자기도 모르는 새에 다정을 숨겨 주고 있는 이의 인사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흠, 흠!”
다정이 진땀 나는 기분으로 자기 바로 옆에 붙어선 윤하를 노려보듯 쳐다본다. 얼떨결에 자기 등 뒤에 두 사람이나 숨겨 주는 모양새가 된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깐 돌아보다 윤하와 눈이 마주치고 얼른 고개를 바로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매운탕 집 따라가는 건데. 후회해 봤자 엘리베이터 문은 이미 닫혔다. 다정은 차오르는 창피함과 어색함에 죽을 맛이었다. 정확히는 다정만.
열다섯 명은 충분히 탈 수 있는 넓은 엘리베이터에서 굳이, 그것도 구석에 바짝 붙은 다정의 옆을 차지해 놓고도 굳이 윤하는 별말 하지 않았다. 대신 다정이 소리 없이 놀란다.
엘리베이터 손잡이에 올려놓은 다정의 손을 윤하가 쿡쿡 찔렀다. 다정이 앞에 선 사람의 눈치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데친 문어 따위를 가늠하듯 사람 손을 쿡쿡 찌르는 것도 별로지만,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다정이 재빨리 손을 거두다 제 앞에 선 사람의 등을 퍽 쳤다.
“죄송합니다.”
등을 얻어맞은 사람이 뭐야, 하는 얼굴로 돌아본다. 다정이 빠르게 사과하자 언짢은 표정으로 괜찮다고 하고 만다. 남자가 다시 고개를 돌린 사이, 윤하가 이번엔 다정의 어깨를 찔렀다. 어머 진짜 왜 이래. 기어코 다정이 왜 이러냔 얼굴로 윤하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던진다. 얼른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윤하의 얼굴을 본 순간에 깨지고 만다.
눈을 내리깐 채 다정의 얼굴을 보고 있던 윤하가 입매를 움직여 웃었다. 그러곤 다정의 손을 붙잡는다. 반사적으로 밀어낸다. 다시 윤하가 손을 뻗고 다정은 쳐 내고. 제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투덕거림을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소외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 회사 사원 A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4층에서 내렸다. 그리고 5층에서 사람이 셋 탔다.
4층에서 사람이 내렸다고 대놓고 다정의 손을 붙잡고 있던 윤하가 재빨리 등 뒤로 다정과 제 손을 감췄다. 진짜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니. 묻고 싶어도 사람들이 있어서 그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다정이 재밌어, 윤하가 순간 킥, 소리를 냈다. 엘리베이터에 타 있던 사람들이 윤하와 다정을 돌아봤다. 미소를 거둔 윤하가 이내 제가 제일 잘하는 짓을 했다. 인상을 쓰며 뭘 봐, 하는 표정을 지었단 뜻이다. 떫은 표정으로 다시 사람들이 고개를 돌린다. 그 틈에 손을 빼낸 다정이 윤하의 팔을 슬쩍 꼬집는다.
“아!”
혼자 웃고, 혼자 소리 내고. 오윤하가 미쳤나. 사내 유명 인사 오윤하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각자 그런 생각 중이다. 다정에게 꼬집힌 팔을 연신 문지르던 윤하가 다정을 쏘아본다. 다정의 입술이 움찔거린다, 싶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8층에서 윤하와 다정이 먼저 내렸다. 점심시간이라 복도엔 사람이 없었다. 고개를 까닥이고 먼저 가려는 다정의 앞에 윤하가 슬쩍 발을 내민다.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한 다정이 윤하의 손길에 중심을 다시 잡는다. 사람 붙잡는 것도 이렇게 양아치처럼 하다니. 다정의 속을 모르는 윤하가 품에서 뭔갈 꺼낸다.
“윤 대리님.”
잔뜩 폼 잡고 말을 꺼내기에 일 얘긴가, 하던 다정의 눈이 동그래진다.
“나랑 영화 보러 갈래요?”
선서라도 하듯 진지하게 말하던 윤하가 놀란 다정의 얼굴을 보며, 이내 히죽 웃었다.
“내가 여자 친구가 없어서 그런데.”
눈을 깜박이며 윤하를 올려다보던 다정이 순간, 피식 웃으며 주먹을 말아 입가에 댔다. 분위기가 따뜻하다. 이상하게 어색한데, 그게 싫지 않다. 계속 웃음을 흘리던 다정이 큼큼, 헛기침했다. 윤하는 다정에게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잘 안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내 웃음기를 거둔 다정이 묻는다.
“무슨 영화인데요?”
윤하가 선선히 표를 내민다. 슬쩍 보는데, 제목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다정의 의문은 윤하가 해결한다.
“금요일에 그 포스터 열심히 보던데.”
“아.”
보고 싶어서 보고 있던 건 아닌데. 말을 속으로 삼키던 다정이 영화표에 찍힌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다 멈칫했다. 이내 윤하를 올려다본다. 좀 민망한 표정으로.
“오늘은 안 되는데…….”
“뭐? 왜?”
다정이 당연히 승낙할 줄 알았던 윤하가 펄쩍 뛴다. 그 모습에 괜히 더 미안해진 다정이 제 목덜미를 열심히 쓸었다.
“라라 정기 검진 날이라서요.”
이내 윤하의 표정이 뚱해진다. 미안하게 됐다며 표를 돌려준 다정이 슬쩍 걸음을 물렸다. 가만히 서서 표를 들여다보던 윤하가 대충 구겨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곤 어느새 저 멀리 간 다정을 바짝 쫓았다.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걷던 다정이 놀라 윤하를 돌아본다.
“진짜 왜 그래. 누가 보면 어쩌려고.”
“내가 좋아, 그 뚱뚱이가 좋아.”
불쑥 뱉은 유치한 질문. 유치하지만 다정이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걸 지켜보는 윤하만 어이가 없다.
“진짜로, 고민을 한다고?”
“그렇지만.”
“그렇지만이고 뭐고. 나랑 걔랑 물에 빠졌어. 그럼 누구 살릴 거야.”
기어코 유치함의 최고봉인 질문까지 나오고 만다. 다정의 말문이 막힌다. 사람들 언제 올지 모르는 복도라는 것도 까먹은 다정이 윤하를 어떻게 쫓아내야 하나 고민한다. 한참 고민하는 와중에 윤하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다정을 당겨 입을 막는다. 다정의 눈이 더 커졌다.
“됐어. 나 수영 잘해.”
그러곤 다정의 비닐봉지를 확 가로챈다. 비닐봉지를 들여다보던 윤하가 두리번거리다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에 확 그걸 쑤셔 넣는다. 점심이 순식간에 쓰레기로 전락한 다정이 황당함에 입을 벙긋거린다.
“나도 점심 먹어야 해, 잘됐네. 같이 먹어.”
상대 의견은 묻지도 않고 잡아끄는데, 그게 영 싫지 않다.
점심을 먹으며 윤하가 묻는다. 걔는 새끼 때부터 키운 거야? 라라에 대한 질문에 다정이 간단히 라라의 내력을 읊는다. 얼마 뒤엔 다정이 묻는다. 수영은 몇 살 때 배웠어요? 윤하가 대답한다. 학교에서 배웠어, 수영 선생이 가슴에 털이 있어서 별명이 스펀지밥이었는데…….
되게 이상하지.
남들은 어색하게 서로를 알아 간 다음에 섹스를 하는데.
우리는 이 짓 저 짓 다 한 뒤에야 어색해지고, 서로를 알아 간다.
남들과 달리, 거꾸로 가는 관계.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 온 다정이 벤치로 다가갔다. 평일 낮이라 외부 면회실에 딸린 벤치는 한산했다. 바닥에 카펫처럼 깔린 벚꽃 잎을 밟으며 다정이 걸음을 옮긴다. 아빠는 병원 입구에 드나드는 군인 몇 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재원이는?”
“곧 나온대.”
같이 차를 타고 올 때부터 표정이 좋지 못했던 아빠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다정의 표정도 그다지 좋진 못했다.
“덩치는 산만 한 놈이 무슨 넘어졌다고 발가락이 부러져.”
다시 한숨을 쉰 아빠가 중얼거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아빠가 꽤 놀랐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다정은 말없이 아빠의 어깨를 토닥인다.
“치킨 따뜻할 때 먹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안 나와.”
식어 가는 치킨을 아빠가 힐끔거릴 때, 드디어 병원복을 입은 재원이가 등장했다. 어릴 때 애들하고 싸우고 들어와도 멍이나 좀 들고 말았지, 그 흔한 맹장 수술도 해본 적 없는 재원인지라 목발을 짚은 모습에 다정의 눈시울이 잠깐 시큰했다. 아빠도 그런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등장한 재원이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한다.
“와, 치킨. 대박.”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제 누나한테만 잠깐 치댄 재원이 아빠는 아는 척도 안 하고 홀랑 치킨 상자부터 열자 아빠의 입에서 이놈 자식,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빠의 두꺼운 손이 재원의 등을 퍽퍽 친다. 제일 좋아하는 목부터 찾아 입에 문 재원이 어깨를 꿈틀거렸다.
“이 자식아, 아빠는 보이지도 않냐.”
“아우, 아빠 나 환자야.”
“환자는 무슨, 주둥이는 멀쩡하구먼.”
재원이 억울하다며 발을 들어 테이블에 발을 떡, 얹었다. 수술까지 했다더니 두툼한 붕대를 둘둘 감아 놔 사람 발이 아니라 북극곰의 발 같다.
“멀쩡한데 뭣 하러 왔는지 몰라.”
그래도 아픈 부위를 보자 좀 누그러졌는지 아빠는 투덜거리면서도 재원이가 먹고 싶다고 했던 음식들을 치킨 옆에 부랴부랴 꺼냈다. 걔 중엔 3월에 있는 재원의 생일을 못 챙겨 준 게 마음에 걸렸는지 보온병에 담긴 미역국도 있어, 재원과 다정이 눈을 마주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누나 회사는?”
“연차 냈지. 천천히 먹어.”
원래도 식욕이 왕성한 재원이지만, 바깥 음식이 그립긴 했는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우걱우걱 먹는 게 안쓰러워 다정이 등을 두드려 주며 밥 위에 반찬을 올려 준다. 누나가 먹여 달라며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를 떨던 재원이 아빠의 손길에 다시 어깨를 부르르 떤다.
“징그럽게, 다 큰 놈이 누나한테 아직도 저렇게 매달려.”
재원이 따끔따끔한 등을 어떻게든 어루만지려 애쓰며 퉁명스레 대답한다.
“퇴소식 때 누나는 안 왔으니까, 섭섭해서 그래.”
다정이 못내 미안해진다. 금세 시무룩해진 다정을 대신해 아빠가 재원의 등을 다시 쓰다듬는다. 아프게.
“누나 회사 일 때문에 바쁜데, 퇴소식에 아빠가 갔으면 됐지. 군대가 아주 벼슬이냐? 벼슬이야?”
시끄럽게 떠들어서 누나 괜히 미안하게 만들지 말고 밥이나 먹으라며 한술 크게 뜬 밥을 재원이 입에 넣는다. 밥을 냠냠 씹던 재원이 손가락으로 치킨을 가리키자 아빠가 투덜거리며 입에 살을 발라낸 양념치킨도 넣어 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재원이에게 약한 건 다정뿐이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밥을 다 먹은 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다정이 일어났다. 제 것은 배터리가 다 됐다며 다정의 핸드폰으로 SNS를 하던 재원이 화장실을 대강 알려 줬다. 병원 쪽으로 다가가는 다정을 보며 재원이 과자를 집어 먹는다. 그러곤 요즘 군대는 어떠냐, 묻는 아빠의 말에 대충 대답하다 멈칫한다. 바쁘게 움직이던 재원의 손이 그만 걸려온 전화를 냉큼 받아 버린 탓이다. 어떻게 할까, 재원이 망설이다 핸드폰을 귀에 댔다.
―어디 아파? 오늘 왜 회사에 없어.
눈을 깜박이던 재원이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화면을 다시 본다. 저장된 이름은 오윤하 ‘상무’인데……. 목소리가 젊네? 재원이 대꾸를 하지 않자 상대방이 다시 말한다.
―왜 전화 받아 놓고 대답이 없어? 진짜 어디 아파?
어리둥절하던 재원이 뭔가 슬슬 감을 잡기 시작했다. 안 좋은 쪽으로. 저장된 이름은 상무인데 목소리는 젊고, 연차 낸 직원한테 이 시간에 전화해서 아프니 안 아프니, 묻는다? 이건 뭔가 불쾌한 일임이 틀림없다. 아빠를 슬쩍 보고 의자 끝으로 궁둥이를 옮긴 재원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누구십니까.”
굵직한 재원의 목소리에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묻는다.
―그러는 그쪽은 누굽니까?
까칠한 게 말투가 영 재수 없다. 슬슬 열받기 시작한 재원이 대뜸 말을 뱉었다. 하여간, 누나한테는 항상 이상한 놈들이 꼬인단 말이야 생각하며.
“윤다정 남자 친구인데요.”
이번엔 좀 더 긴 정적이 흘렀다. 당신 누군지 몰라도 왜 쉬는 직원한테 전화하냐고 뭐라 하려던 재원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다정을 발견했다. 다정이 알면 재원이한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랬지, 하고 뭐라 할 게 분명해서 재원은 그쯤 해서 전화를 끊기로 한다.
“지금은 좀 바쁘니 급한 일 아니라면 회사에서 말씀하시죠. 그럼.”
막 전화를 끊고 테이블 멀리 핸드폰을 밀어 놓으니 다정이 재원의 옆에 앉는다. 뭐 하고 있었어? 누나의 부드러운 질문에 재원이 불쑥 묻는다.
“누나 혹시 남자 친구 있어?”
“뭐?”
조금 당황한 표정의 다정을 두고 누나 남자 친구를 사귀어도 꼭 저한테 보여 주고 사귀라는 둥, 재원이 말을 늘어놓는다. 외부 음식물은 반입이 안 된다는 말에도 군 병원용 카디건 주머니에 초콜릿 따위를 넣어 주고 있던 아빠가 기어코 적당히 하라며 재원의 등을 한 번 더 쥐어박는다.
“뭐야?”
끊긴 전화를 노려보던 윤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뱉었다. 남자 친구? 뭐야 이 자식? 혹시 자기가 다른 사람한테 전화를 걸었나 싶지만, 번호도 맞고 무엇보다 윤다정 남자 친구라고 목소리 느끼하게 깔고 똑똑히 말했다. 게다가 바쁘다고? 대체 뭐 하느라 바쁜 건데? 윤하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 보려 할 때, 회장실 문이 열렸다.
“들어오시랍니다.”
하는 수 없이 전화를 품에 넣은 윤하가 못마땅한 얼굴로 장 실장을 흘겨본 뒤, 회장실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회장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커피 테이블에 놓인 봉투를 힐끔 쳐다본 윤하가 건성으로 고개를 숙인다. 회장의 미간이 즉시 구겨지지만, 구태여 말을 꺼내진 않는다.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거니까. 앉으라는 말에 윤하가 회장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좀 바쁜데요.”
“애비하고 차 한잔할 시간도 없어.”
그 말에 윤하가 속으로 코웃음을 친다. 언제부터 부자 사이가 차 한잔 나눠 마실 정도로 좋았단 말인가. 윤하도 그걸 구태여 말로 꺼내진 않았다.
“꺼내 봐라.”
우아한 파도 무늬가 새겨진 찻잔을 내려놓으며 회장이 봉투를 가리켰다. 뭔데 보자고 했대, 성의 없이 봉투를 열고 안에 든 것을 테이블에 쏟아내던 윤하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미술품 전시 팸플릿이었다. 프랑스어로 뭐라 뭐라 쓰여 있는 전시 명엔 관심이 없었다. 돈깨나 들여 인쇄했을 까슬까슬한 표면을 쓸던 윤하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젊고, 예쁘게 생긴 여자의 사진이 하단에 박혀 있다. 사진 옆에 쓰인, 돈을 바른 이력이 심상치 않다. 유명 여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에서 유학했다는 문구를 읽던 윤하가 고개를 들었다.
“내 은사님 손녀다. 가서 애비 대신 인사하고 와. 좋은 식당도 하나 잡아 놨으니 이야기도 좀 하고. 네 또래 아가씨라 말이 좀 통할 게야.”
헛웃음이 나온다. 선을 본 적은 없지만, 이게 선 자리라는 걸 윤하가 모를 리 없었다. 요즘 트렌드가 전시회나 음악회에서 만나는 거라고 했던가. 석현이 선 자리에 나갔다 온 제 친구들 이야기를 종종하던 것을 떠올리던 윤하가 팸플릿을 밀었다.
“싫습니다.”
말 끝나기 무섭게 회장이 윤하를 노려봤다. 윤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만나 보라는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 전부터 노려보고 있었다.
“두 번 말 안 해. 가 보라고 할 때 얌전히 가. 가서 식사하고, 정중하게 집에 데려다줘.”
그 말에 윤하가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회장이 눈을 부릅떴지만, 윤하는 제 아버지가 무섭지 않았다. 옛날에나 무서웠지. 다 늙어 빠진 영감이 뭐라고.
“……이 여자, 형이랑 선봤던 여자죠?”
윤하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회장이 불편한 침음성을 내며 몸을 조금 비틀었다. 윤하는 멈추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대학교수에, 아버지는 정치인. 위로 딸린 오빠 둘은 검사. 졸부인 처가 덕 본 사업가라는 말 대신, 이젠 명예도 좀 챙기면서 살고 싶으신가 봐요.”
“뭐?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면 다 말인 줄 알아?”
벌떡 일어난 회장이 윤하를 노려봤다. 윤하도 일어나 회장을 마주했다.
“왜요. 후계자로 점찍어 놓은 아들 일찌감치 죽인 인간한테 손녀를 며느리로 보내고 싶답니까? 이 집 돈이 궁하대요? 선거 자금 좀 필요하답니까?”
“이 새끼가!”
저 점잖은 척이 얼마나 가나 했더니 성질이 나오는 건 금방이었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윤하를 노려보던 회장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회장이 눈을 반쯤 떴다.
“네 형 일은, 사고였어. 그쪽도 그거 알고 있고.”
“…….”
“죽은 아들놈 두고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배짱도 없고 유약한 놈이었고. 그동안은 내 지켜만 봤지만, 이제 너도 슬슬 정신 차린 것 같으니 자리를 잡아야지.”
제 형과 저를 비교하며 추켜세운다. 오히려 윤하의 입매가 비틀린다. 말이 없는 윤하를 한참 쳐다보던 회장이 품에서 뭔갈 꺼냈다. 툭 던지는 손길에 윤하의 시선이 움직였다. 순간, 윤하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네 집에서 나온 거다.”
서 팀장, 정수가 받아다 주는 정신과 약이다. 윤하의 꼭 쥔 주먹이 바들바들 흔들리기 시작했다. 회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정신과 같은 덴 정신머리 썩은, 약해 빠진 새끼들이나 드나드는 곳이야! 그깟 것도 혼자 이겨내지 못하면 내 뒤를 이을 자격이 없다. 네가 네 형과 달리 배짱 좀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회장이 몰아붙인다.
“한심한 네 형 꼴이 날 셈이야!”
거기서, 윤하의 눈이 돈다. 윤하의 발에 걷어차인 테이블이 쭉 밀렸다. 말리러 온 장 실장을 밀친 윤하가 회장 앞에 섰다. 윤하의 눈이 번들거리며 회장을 쏘아봤다. 목덜미에 열이 잔뜩 올라 터질 것처럼 핏줄까지 불거졌다.
“형이 진짜 사고였다고 믿으세요?”
정말 우습게도, 별다른 애정이 오간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곁에서 애정을 주는 조부모가 있었음에도 열여덟의 윤하는 미디어가 학습하는 대로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에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식물인간 판정을 받은 형을 포기한 아버지가 윤하에게 손을 뻗었을 때, 윤하가 피아노를 포기하고 한국행을 선택했던 이유는.
“형은 자살했어, 바로 당신 때문에!”
어릴 땐 나름 친했지만. 머리가 크면서 형과 데면데면해졌다. 만날 일도 없었고 문득 떠올린다고 해도 형이 자기가 받을 부모의 애정을 다 받아 간다고 잠깐씩 질투했던 게 전부였다. 그래서 형의 사고 소식에 크게 슬퍼함 없이 처음으로 저를 원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았었다. ‘처음으로’ 그게 전부였다. 윤하의 얼굴이 철썩, 소리와 함께 돌아갔다.
“입 안 닥쳐!”
지금 제 뺨을 때린 저 손이 혹시 칭찬해 주고 아껴 주려는 걸까. 싶어서. 그땐 그랬다.
“형은 이런 적이 없겠지.”
하지만 윤하는 아등바등 노력하던 끝에 깨달았다. 저 인간은 절대 그럴 인물이 아님을. 회사 직원들도, 하다못해 제 피가 이어진 아들들도 그저 부품일 뿐이었다. 아버지란 사람은 다른 이에게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위인이 아니라는 걸 형도 저도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당신이 주는 모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겠지. 그렇게 버티다.”
끽, 소리를 내며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한 윤하가 이내 키득키득 웃었다.
“나였으면 차라리 당신을 한 번 패기라도 했을 텐데.”
기어코 참지 못한 회장이 윤하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밀려 넘어진 윤하의 위로 발길질도 날아온다. 주저앉은 채 회장을 올려다보던 윤하가 이내 회장이 뽑아 가져오는 골프채를 보고 픽, 웃었다. 에이 씨, 이젠 무섭진 않은데 여전히 맞는 거 하나는 아프네.
막 회장이 윤하에게 골프채를 내려치려 할 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윤하가 손을 뻗었다. 골프채를 빼앗긴 회장이 조금 당황한다. 회장을 휘갈겨 버릴 듯 골프채를 높이 들었지만, 내려치진 못한다. 말없이 회장을 쏘아보던 윤하가 제 코밑을 만져 보고 인상을 썼다. 검붉은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 대충 옷에 문질러 닦은 윤하가 그대로 골프채를 구석 어딘가로 휙 던졌다.
밀린 테이블에서 떨어진 찻잔을 주운 윤하가 뚜벅뚜벅 걸어가 장 실장 앞에서 멈춰 섰다. 윤하가 찻잔을 내밀자 장 실장이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회장을 돌아보며 눈썹을 까닥거린 윤하가 그대로 회장실을 나간다. 바깥에 앉아 있던 비서가 윤하의 몰골을 확인하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지만, 소리를 지르진 않는다. 어차피 최측근들이야 회장이 아들이고 뭐고 성질나는 대로 사람 팬다는 건 잘 알았다.
“씨발, 눈썹 움직이는 거도 아프네.”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에 탄 윤하가 망설이지 않고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버튼을 누른다.
저녁 먹고 가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다정이 뒤늦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분명 윤하와 전화한 기억이 없는데, 통화 기록에 윤하의 이름이 있다. 주머니에 넣어 놨다가 실수로 받고 끊었나? 버스에서 내리며 가방을 추켜올린 다정이 윤하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길어진다. 바쁜가, 하고 핸드폰을 귀에서 떼려던 다정이 다시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상무님?”
대답 대신 끙, 앓는 소리가 난다. 이상한 영상이라도 보고 있었나 싶어 다정이 뚱한 표정을 짓는데, 윤하가 대뜸 그런다.
―어디야?
“집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집이니까. 걸어가며 대꾸한 다정이 집이라는 말에 침묵만 치키는 전화기를 한번 들여다본다. 심심해서 전화했나?
“전화하셨길래 연락해 봤어요.”
할 말이 없으면 끊겠다고 다정이 말하려는 찰나. 윤하가 대뜸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정을 추궁했다.
―진짜 집이야? 숨겨 둔 남자 친구 만나고 있는 게 아니고?
이 양반이 미쳤나. 하는 얼굴로 다정이 다시 핸드폰을 떼고 화면을 들여다본다. 이내 의문은 ‘뭐 오윤하야 원래도 자주 기분이 왔다 갔다 하니까.’ 정도로 결론을 맺었다. 다정이 미처 그 이상한 짜증에 대꾸하기 전, 윤하가 됐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됐고. 우리 집에 좀 와. 먹을 거 사서.
벌써 세 번째 반복이다.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들여다보는 짓. 코로 한숨을 쉰 다정이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집이라면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있을 테니 존댓말은 곱게 접어 넣어 둔다. 다정의 물음에 코웃음을 친 윤하가 아무거나 사 오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는다. 얼마 뒤, 윤하의 오피스텔 주소가 적힌 메시지가 날아왔다. 메시지와 아빠가 싸 준 반찬을 번갈아 보던 다정이 집에 들렀다가 가야지. 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집에 들러 반찬도 정리하고 라라의 밥도 챙겨 주고 나오니 삼십 분쯤 흘렀다. 택시 정류장 쪽으로 가려다 예보도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 우산을 챙겨 나오는데 십 분이 더 흘렀다. 미리 전화를 넣어 놨던 보쌈집에서 포장을 찾아오는 데는 십오 분.
애매하게 퇴근 시간에 껴서 택시가 느리게 굴러간다. 다정이 오피스텔에 도착한 시간은 윤하가 전화하고 약 두 시간이 흐른 뒤였다. 거기에 경비원에게 붙잡혀 방문 호수와 목적을 적는데 오 분을 또 까먹었다.
오윤하가 혹시 화내는 게 아닐까. 많이 기다린 건 아니겠지? 하고 벨을 누르던 다정이 반응 없는 문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고 무심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바로 들어오라고 열어 놨는지 문이 스르르 열린다. 두리번거리며 깜깜한 집 안에 들어선 다정이 거울 붙은 신발장 위에 윤하가 빼둔 잠금장치의 건전지를 짚었다. 다시 끼우고 문을 닫자 삑, 소리와 함께 문이 잠긴다.
“불 좀 켜고 있지…….”
비도 오는데, 어둠의 자식도 아니고. 고등학교 시절 담임이 즐겨 쓰던 언어를 되새긴 다정이 보쌈 봉투를 들썩이며 더듬더듬 부엌으로 갔다. 이쯤 어디에 스위치가 있던 것 같은데. 더듬거리던 다정의 손이 스위치를 찾았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걸 보면 씻는 모양이었다. 별생각 없이 보쌈 봉투를 아일랜드 식탁에 올려놓던 다정이 문득, 제가 오늘 어떤 속옷을 입었는지 상기했다.
“왜 이제 와?”
일단 짝짝이는 아닌 것 같은데, 손이 가는 대로 입은지라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인다. 욕실 문이 열리며 윤하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린다. 속옷 걱정에 여전히 코가 빠진 다정이 보쌈을 꺼내며 느리게 뒤돌았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그러곤 한동안 멍하니 투덜거리는 윤하의 얼굴을 쳐다봤다. 다정이 집에 온 건 소리로 알고 있었다. 속옷만 입고 나가면 변태니 뭐니 질색할 것 같아서 바지만이라도 챙겨 입고 나왔는데 왜 저러지, 하던 윤하가 뒤늦게 제 상태를 깨달았다. 머리를 대충 말린 수건을 휙 던진 윤하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뭐 사 왔어?”
서 팀장을 부를까 말까 하다 마침 다정에게 전화가 왔고, 아까 그 새끼 뭐냐고 따질 심산으로 오라고 했다. 근데 일단 배부터 채우고. 다정이 가져온 봉투가 묵직해 보여서 그쪽으로 발을 뗀다. 윤하가 다정의 옆에 설 때까지도 다정은 말이 없었다. 하지 못했다.
“술도 사 왔네.”
보쌈을 확인한 윤하가 봉투를 뒤적이다 히죽 웃었다. 소주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특별히 사 왔으니 먹어 주겠다고, 근데 왜 한 병뿐이냐고 면박도 잊지 않는다.
“……얼굴이 왜 그래?”
거실에서 먹자고 봉투를 움켜쥔 윤하가 대충 대답하며 바닥에 앉았다. 주말마다 가사 도우미가 오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깨끗했다. 근데 그 아줌마가 회장 끄나풀일 줄이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바닥을 두드린다.
“맞았어. 앉아.”
그런데 다정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다정에게 따지려고 분위기 좀 심각하게 조성해 볼까 하는데, 순간 바닥에 양반다리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렇게 있어 보이진 않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헛기침한 윤하가 이내 소파에 앉았다. 팔은 소파 헤드에 걸쳤다.
“오라니까?”
그런데 다정은 영 딴소리다.
“누구한테?”
거기서 윤하는 조금 짜증이 났지만, 꾹 눌렀다. 앞으로 다정에게 오늘 낮에 아버지한테 했던 것 같은 좆같은 짓거리는 안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러나 사람 몸에 밴 태도는 금방 변하지 않는 법이라, 강아지한테나 할 법한 방식으로 다정에게 손가락을 튕긴다. 딱히 윤하의 이런 태도를 지적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안 오냐고 고개를 까닥이던 윤하가 순간 내리치는 천둥에 깜짝 놀란다. 뭐야, 비와? 씻으러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어둑어둑하긴 해도 꽤 괜찮았던 야경에 빗방울이 잔뜩 섞였음을 이제야 안다.
눈은 좋아하지만, 비는 별로 안 좋아하는 윤하가 못마땅하게 인상을 쓰다, 뺨을 붙잡는다. 비가 오면 추적추적한 게 기분도 안 좋아지기 때문이다. 고개를 틀고 소파 뒤로 펼쳐진 비를 구경하던 윤하가 순간 제 뺨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뭔지 확인도 안 하고 일단 내쳤다.
어느새 윤하 앞에 다가와 있던 다정이 내쳐진 얼음주머니를 조용히 주워 들었다. 다정이 다시 주워 드는 게 얼음주머니라는 걸 확인한 윤하가 입을 뗐다.
“필요 없어, 어차피 당분간 회사는 못 나갈…….”
그러다 입을 닫는다. 밀어내려던 손이 얌전히 윤하의 무릎 위에 놓였다.
“아버지가 그랬어?”
다정이 코를 제대로 훌쩍이지도 못하며 물었다. 다정의 잔뜩 일그러진 입매가 밑으로 축 처져 있다. 손으로 대충 제 눈가를 문지른 다정이 훌쩍거리며 윤하의 얼굴에 연신 얼음주머니를 문질렀다. 모양이 제대로 생성되기도 전에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거친데, 부어오른 눈가며 뺨을 만지는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왜 울어?”
다정이 왜 우는지 몰라 윤하가 묻는다. 그런데, 되레 다정은 윤하의 질문에 눈물을 힘껏 떨어트린다. 윤하가 다정의 손을 붙잡았다. 좋아한다고, 하지만 부담은 주지 않겠다고. 여태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없는 고백을 해 놓고도 틈만 나면 튕기기 바쁜 다정이지만, 우느라 정신이 없는지 손을 빼지 않는다.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잠깐 놀라고 말 것 같은 여자가 자기 때문에 몇 번이나 운다. 그리고 이번엔 잘못도 안 했는데 운다. 윤하의 기분이 슬슬 이상해졌다. 다정의 눈물에 너무 놀라서 다정에게 따지려던 것도 홀랑 까먹었다.
“왜 우는데, 응?”
얻어터진 건 난데 왜 네가 울어. 열심히 머리를 굴린 윤하가 재빨리 덧붙인다. 다정의 눈머리를 엄지로 살살 쓸면서.
“저번에도 때리는 거 봤으면서 뭐. 자주 그래.”
오히려 그 말에 다정의 입에서 히끅, 하는 요란한 숨소리가 난다. 창밖에는 비가 요란하게 오고, 다정은 윤하의 얼굴을 보며 장마철 하늘처럼 운다. 윤하의 손길을 받으며 다정이 얼음주머니를 다시 조심스레 윤하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미친 영감이, 자기 아들을 이렇게, 때려.”
윤하의 기분이 묘해지는 순간이다. 아버지라고 느끼는 감정은 옛날 옛적에 화장실 변기에 넣어 버렸지만, 어쨌든 아버지고 다정은 그런 윤하와 회장의 관계를 모르니까. 그런데 좀 때렸다고 바로 미친 영감 소리 나오는 게 재밌기도 하고, 여전히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다정이 턱 좀 들어 보라며 손을 가져다 댄다. 거기서부턴 윤하가 입을 다문다.
“빌어, 먹을, 노친네.”
연신 욕설을 뱉던 다정이 눈을 찡그렸다.
서둘러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는데, 문지른 보람도 없이 새로운 눈물이 생겨난다. 마음 같아선 회장이고 오윤하네 아버지고 당장 쫓아가서 따지고 싶다. 영감쟁이 노망났냐고. 조용히 다정을 지켜보던 윤하가 천천히 속삭였다.
“내가 잘못해서 맞은 거면 어쩌려고.”
눈물을 닦던 다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답한다.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처음 윤하가 맞는 걸 봤을 때는 많이 놀랐었고, 윤하가 미운 상태였기 때문에 별말 없이 넘어갔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벌써 두 번째다. 이런 윤하를 보는 게. 회장이 열받을 때마다 윤하를 이렇게 만든단 소리였다.
어제까진 멀쩡했으니 오늘 맞았단 소린데, 얼마나 있는 힘껏 때린 건지 벌써 부어오른 뺨이며 눈가에 시퍼런 기운이 맴돈다. 얼음주머니를 내려놓고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윤하가 잠시 인상을 썼다.
“진짜 왜 울어?”
너는 씻고 나오기까지 했으면서, 자기 얼굴이 어떤지도 모르냐고 따지고 싶던 다정이 입을 다문다. 윤하의 표정이 애매하다.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한 얼굴.
“궁금해서 그래. 진짜로.”
윤하가 다정의 손을 잡아당긴다. 얌전히 윤하의 무릎 위에 앉은 다정이 입을 뗐다. 여전히 윤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속상해. 속상해서 그래.”
“한심해서?”
윤하가 시무룩하게 묻는다. 슬슬 괜히 다정을 불렀다는 생각이 든다. 윤하의 계획은 다정에게 아까 전화 받은 남자 뭐냐 따진 뒤, 아니라는 확답을 받고 배도 채운 뒤 키스도 좀 하는 데 있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맞은 자리가 욱신거리긴 하지만 혀가 잘린 건 아니니까.
“누가 한심해.”
한편 다정은 속상한 마음에 머리까지 지끈거린다. 짜증 날 때마다 윤하를 쥐어뜯었던 것도 생각나고, 이런 줄 모르고 미적거리다 두 시간 뒤에나 윤하 앞에 나타난 자기 자신도 싫었다. 그중에서 제일 속상한 건, 얼굴이 이렇게 될 정도로 맞아 놓고도 대수롭지 않게 구는 오윤하.
“때린 인간이 한심한 거지. 네가 뭐 잘못했다고 한심해.”
어루만지고 있던 손을 떨어트린 다정이 고개까지 숙인 채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윤하가 다정의 마음을 파고든다. 다정이 깨닫는다. 오윤하를 좋아하면 어쩌면 이보다 더 속상할 일이 더 많겠다는 걸.
“그만 울어, 나 쪽팔려.”
별일 아닌데 다정이 이렇게 온 힘을 다해 우니, 윤하도 어쩐지 면목이 없어진다. 이름만 다정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네. 이래서 윤다정 전 애인들이 그 난리를 쳤던 거구나. 윤하도 여러 가지를 깨닫는다.
“은근 눈물 많다니까. 그동안 시큰둥하던 거 죄다 연기였지?”
얌전히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알아 가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텐데. 우리는 달갑지 않은 방식으로 서로를 알아 간다.
“일어나서 먹으라니까.”
병원에 가자는 말을 거절한 윤하가 다정의 무릎을 벤 채 입을 쩍 벌린다. 배고프다니까 주긴 주는데, 손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오윤하한테 먹여 주고 있지. 일어나서 직접 먹으라는 말이 지나가는 익명의 A가 뀐 방귀도 아닌데 그냥 흘러가고 만다. 윤하의 채근에 못 이긴 다정이 작게 찢어 낸 고기를 새우젓에 콕 찍어 입에 넣어 준다.
“짜.”
기껏 먹여 줬더니 새우젓을 많이 찍었다고 앙탈이다. 얼굴 이렇게 얻어터져서는 다정을 구박할 때마다 재밌다고 히죽거리는데, 뭐라 하지도 못하고 다정이 윤하의 이마만 쓸어 준다. 쩝쩝 입맛을 다신 윤하가 다시 다정을 채근한다.
“이번엔 쌈.”
눈을 흘긴 다정이 상추를 반으로 찢는다. 그래도 군소리 없이 제가 시키는 대로 다 해 주는 다정이 흐뭇해서 윤하가 잠깐 고개를 돌려 다정의 배에 바람을 훅 분다. 간지럽다고 허리를 비틀기에 슬쩍 옷 안쪽으로 손을 넣어 보다 된통 손등을 얻어맞았다.
“얼굴은 그 꼴을 해서, 그 생각이 나?”
“누가 섹스하쟀나.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물론 다정의 가슴을 만질 생각이었지만, 윤하가 얼른 발뺌한다. 다정은 또 그 말에 속아 내가 너무 과민 반응했나, 고민하는 중이다. 잘게 썬 청양고추와 쌈장을 올린 보쌈을 싼 다정이 쌈을 윤하의 입에 넣어 준다.
맵지도 않으면서 청양고추가 맵다고 옆구리 쿡쿡 찌르는 윤하의 닦달에 못 이겨 다정이 잠깐 일어났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윤하가 냉장고로 가는 다정의 뒷모습을 오래 쳐다본다. 완전히 발가벗겼을 때도 몰랐던 모습, 윤다정의 다정함. 딱딱하게만 보일 뿐 제게 확 쏠려 있는 마음.
“다정아.”
그 끝이 어딜까.
“우리 사귈까?”
시험해 보고 싶어. 놀란 다정이 생수병 떨어트리는 모습을 윤하가 지켜본다.
“……대답은 천천히 해도 돼.”
윤다정의 끝을 알면, 제 감정도 좀 더 명확해질 것 같았다.
다정의 예상대로 윤하의 얼굴은 다음 날부터 땡땡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윤하는 재택근무를 시작했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비서한테 이런 꼴 보이기 쪽팔리다는 말에 서 팀장과 다정이 일감을 부지런히 물어 날랐다. 윤하의 얼굴이 간단한 메이크업 정도로 가려질 정도가 된 건 그로부터 삼 주가 지났을 때였다. 케이마이엔 매각 공고가 뜨고, 2차 경매가 신정 회계 법인 본사에서 진행되던 어느 날.
“제주도 갈 거야.”
서 팀장을 앞에 두고 윤하가 뜬금없이 말을 뱉었다. 서 팀장이 가만히 머리를 굴린다. 아직 기분이 안 좋아서 놀러 가고 싶다는 뜻인가? 머뭇거리는 다정의 말을 듣고 처음 윤하를 찾았을 때 제가 놀랐던 걸 생각하면 아직 윤하의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휴가는 나중에 가는 게 어때? 케이마이엔 인수만 마무리되는 거 보고…….”
그래도 일단은 윤하의 아는 형이 아닌 회사원의 입장에 입각한 말을 꺼내 본다. 그 말에 윤하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냔 표정을 짓는다.
“휴가? 누가 휴가를 제주도로 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하는 부잣집 도련님의 표정이 아주 무고해서, 서 팀장의 표정이 조금 구려진다.
“그럼 제주도는 왜…….”
흠, 소리를 내며 다리의 방향을 바꿔 꼰 윤하가 커피를 홀짝였다.
“몰디브 리조트 계약할 거야.”
엉? 서 팀장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무슨 소리야?”
“케이마이엔 쭉 살펴보니까 계약한 리조트가 거진 핫바지던데. 리조트 리스트 싹 다 물갈이할 거야.”
“아직 본 경매는 한참 남았는데?”
그 말에 윤하의 입매가 짜증스럽게 비틀린다.
“본 경매까지 안 갈 거야. 그러니까 자꾸 시끄럽게 쫑알대지 좀 마.”
서 팀장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싸가지는 그때도 없었지만 나름 순진했던 윤하를 좋다고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저와 제 친구들이 물들인 탓에 윤하의 언어가 저렇게 저렴한 쪽으로 다채로워진 게 아닐까 생각 중이다.
“몰디브 리조트 계약을 왜 제주도 가서 해?”
케이마이엔이 확실히 인수되고 말고는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왜 몰디브를 제주도 가서 찾는지. 혹시 윤하가 머리를 맞아서 몰디브와 모히토를 헷갈리는 게 아닐까, 하는 섣부른 의심을 삼키며 묻는다. 커피를 한 번 더 홀짝거린 윤하가 왜 자꾸 당연한 걸 캐묻느냔 의미로 미간을 찡그린다.
“몰디브 리조트 재벌, 알지? 그 그룹 상무가 지금 제주도 와 있대.”
윤하가 훅 던져 주는 서류를 무심코 주워 든다. 차근차근 종이를 넘겨 보던 서 팀장의 표정이 더 시무룩해진다. 하나같이 당월 예약하기도 어려운 초호화 리조트다. 그것도 기업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만나는 것도 아니고 맨투맨으로 만나 사업을 따내겠단다. 오윤하의 생각은 도통 따라갈 수 없다 여기며 서 팀장이 한숨을 쉰다.
“그 양반이 제주도 와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윤하의 어깨가 들썩였다.
“뭐…….”
윤하의 입이 다시 떨어진 건 커피를 다 비우고 찻잔을 내려놓은 뒤였다.
“차민영이 이번엔 스폰으로 그쪽 물었다던데.”
대수롭지 않은 투의 대답을 들으며 서 팀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땀이 뻘뻘 흘러내리는 데 이게 눈물인지 땀인지. 그동안 여자들이랑 허투루 놀아난 게 아니었구나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이 대책 없는 자식아 하고 엉엉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열심히 땀을 닦는다. 그러다 이내 나오는 건.
“출장 준비하겠습니다…….”
하겠다면 하는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뭔가 묘안이 있겠지. 윤하와 몇 마디 나눈 거로 기가 쪽 빨린 서 팀장이 비슬거리며 꾸벅 인사한다. 그런 서 팀장은 쳐다보지도 않고 커피를 한 잔 더 마실까, 아니면 오랜만에 석현을 불러 밥이나 먹을까. 생각하던 윤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형이 왜?”
“내가 안 가면 누가 가니.”
둘 다 눈을 껌벅거린다. 윤하가 뚱하게 말했다.
“윤 대리만 데려갈 건데?”
이번 일정이 비공식적인 출장이긴 하지만, 기왕 가는 거 윤다정 옆구리에 끼고 일도 하고 밤엔 맛있는 거 먹고 해변도 구경 다니면 좋을 거란 생각에 혼자 좋아하고 있었는데, 뭐?
“누구만 데려가?”
반면 서 팀장은 다른 생각 중이다. 워낙 남녀 관계 쪽으론 순진한 사람이라 다정과 윤하의 관계를 의심하는 데는 털끝도 못 미쳤고, 다정이 차분하고 침착한 사람이긴 하지만 저 오윤하의 성격을 혼자 감당하다 보면 출장 끝나는 길로 사직서 제출할지도 모른다. 당장 펄쩍 뛰며 말한다.
“윤 대리만 어떻게 보내? 절대 안 돼!”
그래서 출장 인원이 셋으로 정해졌다.
비행기가 뜨기 전, 마지막으로 라라를 맡긴 고양이 호텔 CCTV를 체크하고 있던 다정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잠깐 화장실에 간다던 서 팀장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곧 비행기 뜰 텐데. 고개를 갸웃거린 다정이 이내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화질이 썩 좋지 못한 CCTV에 대고 울적하게 손을 흔든다. 라라를 호텔에 맡기고 나올 때 라라가 하도 구슬프게 울었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뒤지다 못해 다니는 동물 병원에 연락해 평도 좋고 24시간 고양이 케이지에 달린 CCTV를 볼 수 있는 업체를 찾긴 했지만, 그래도 닷새나 떨어져 있던 적은 없던지라. 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