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크리스마스 때 뭐 해?”
요새 얼굴 보기 힘들다며 투덜거리던 승연이 윤하에게 불쑥 물었다. 장소는 역시 석현의 바. 술은 안 마시겠다고 하는 윤하에게 석현이 얼린 요구르트를 꺼내 준다. 놀리려고 꺼내 준 거였지만 윤하는 곧잘 받아먹었다. 옛날에 석현에게 배운 대로 요구르트 똥꼬를 따서 쭉쭉.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인 데다 하는 짓거리가 좀 양아치 같긴 해도 생김새가 어디 가서 빠질 위인도 아닌데, 없어 보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승연이 대신 쪽팔려 한다.
“벌써 크리스마스야?”
승연이 그러거나 말거나 요구르트를 이런 식으로 먹는 게 왜 쪽팔린 줄 모르는 윤하는 대충 대꾸하며 냅킨 위로 요구르트를 굴렸다. 덜 녹아서 잘 안 나왔다.
“너는 시간관념이 없니?”
승연이 한심하다는 듯 면박을 준다. 석현이 돌아와 나이프로 껍질을 깐 뒤, 접시에 부순 요구르트를 담아 줬다. 한입에 털어 넣으니 없다.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시는데, 자꾸 승연이 옆에서 귀찮게 굴었다. 요지는 그거였다. 나 크리스마스 때 강원도에 있는 네 별장 놀러 갈래. 놀러 가도 돼? 가 아니라 놀러 갈래, 다. 다소 뻔뻔하지만, 승연의 성격엔 이골이 난 터라 윤하는 깊은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기분이 좋아진 승연이 제 손톱을 매만지며 웃었다. 저번부터 계속 살구색 매니큐어를 바르는 중이었다. 토요일 밤이라 손님이 많았다. 석현과 직원들이 바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승연은 윤하의 옆에서 위스키를 다섯 잔 비웠다. 최근 인터뷰에선 맥주도 못 마신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 따지면 거짓말은 아니다. 승연은 맥주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머리 잘랐네?”
윤하가 불쑥 물었다. 오윤하가 자기 인터뷰 따윌 챙겨 볼 위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인터뷰에서 흘린 말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코가 빠져 있던 승연이 뒤늦게 반응한다. 콧등을 찡그리고 윤하에게 눈을 부라린다. 한 달 전에 잘랐거든 개새끼야, 하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참는다. 드라마 때문에 잘랐다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윤하가 다시 묻는다.
“근데 거긴 누구랑 가게?”
“뭐?”
“별장 빌려 달라며.”
날카로운 승연의 반응에 윤하가 왜, 하고 쳐다본다.
“네 별장인데, 네가 아니면 누구랑 가.”
“내가? 너랑 왜?”
윤하는 딱히 남을 상처 주기 위해 발화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눈 돌 때면 가끔 그러긴 하는데 눈이 돌 정도로 화를 내는 건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게 드물었다. 성격이 까칠하긴 해도 한 꺼풀 벗겨 내면 그냥 생각 없이 그러는 거라는 건 윤하를 조금만 겪어 보면 아는 사실이었다. 승연이 희석도 안 된 위스키를 단번에 목구멍에 넘겼다.
“어차피 만나는 여자도 없잖아. 나랑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윤하가 어릴 때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컸다는 것쯤은 승연도 알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머물 땐 강원도에 있는 아기자기한 별장에서 지냈다는 것도. 다섯 번 정도 갔었고 마지막에 갔을 때 남겨 두었던 제 원피스며 코트 따위가 옷장 가득 남아 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말을 쏘아붙이는 동안 어쩐지 혼자 열 내는 게 머쓱해져서 승연이 중얼거렸다.
“나도, 뭐, 너 좋아서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조용히 보낼 곳이 필요한데 너랑 같이 안 가면 거기 별장지기들하고 연락하기도 좀 뭐하고 그래서.”
승연과 마지막으로 그 별장을 찾았을 때를 윤하도 기억하고 있다. 딱히 화끈한 밤을 보내서가 아니라, 어린 나이에 스타 반열에 들며 예의 없음이 절정에 달았던 승연의 태도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전까진 군말 없이 승연의 성질머리를 받아 줬던 윤하지만, 어릴 때부터 자길 보살펴 준 별장지기 부부를 하인 다루는 듯 대하는 태도에 완전히 학을 뗐었다.
윤하가 제 그런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를 승연이 불쑥 윤하의 넥타이를 당겼다. 승연의 짧은 단발머리가 윤하의 얼굴을 살짝 가릴 정도로 거리가 바짝 가까워졌다. 넥타이를 쥔 손가락을 살살 움직이던 승연이 이내 턱을 치켜들며 예쁜 손톱으로 윤하의 입술을 훑었다. 섹시하고 유혹적인 모습이었다.
“나랑 가면 이런 거 할 텐데?”
승연이 돌려 말하지 않은 만큼 윤하도 돌려 말하지 않는다.
“별로……?”
그로부터 삼 분 뒤, 씩씩거리며 승연이 자리를 떴다. 화장실에 다녀오다 승연과 부딪힐 뻔한 석현이 돌아왔을 땐, 얼굴에 뿌려진 위스키를 냅킨으로 닦는 윤하만 남아 있었다. 승연이 아직 윤하에게 마음이 남았다는 걸 아는 석현이 눈치 빠르게 상황을 짐작했다. 주위 직원들을 물리고 윤하 앞에 선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걸 보니 오윤하도 서승연이 자길 아직 좋아한다는 걸 이제 눈치챘는가, 싶은데.
“야.”
“말해.”
고민하다 꺼낸 말이 참으로 골이 때려, 석현은 할 말을 잃는다.
“여자들은 얼굴에 싸는 거 싫어하냐?”
위로 형제가 다섯이 있고 그중 셋이 누나라, 일찌감치 이런 식의 맥락 없는 문장 해석하는 방법을 터득한 석현이 정신을 차리고 묻는다.
“누구 얘긴데?”
윤하는 어떤 생각에 코가 빠져 동문서답이다.
“얼굴에 쌌다가 허벅지 물렸어.”
어젯밤에 물렸는데 아직도 이 자국이 남아 있어. 시무룩한 말에 석현만 정신이 없다. 그래도 능란하게 답을 내준다.
“미안하다 그래. 다신 안 그러겠다고. 선물을 사 줘도 좋고 아니면 이벤트 같은 걸 해 주든가.”
말을 마친 석현이 괜히 제 말을 곱씹는다. 선물을 사 주는 건 그렇다고 치는데, 오윤하가 여자한테 이벤트 같은 걸 해 줄 위인이 아니라서 그런다. 받아 주는 건 잘하지만 내주는 건 방법도 모르고 할 생각도 없다는 걸 아는데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 아니나 다를까. 윤하가 짜증 난 표정으로 석현을 쏘아본다.
“선물 사 줬는데 욕만 먹었어.”
“뭐 사 줬는데?”
“내가 블라우스 찢어 먹어서 블라우스랑 속옷.”
명품 사 달라는 여자는 많았지만, 명품 선물 거절하는 여자는 겪어 보지 못한, 더욱이 여자가 거절하는 이유에 관해 깊은 고찰을 가져 본 적도 없는 부잣집 도련님들의 철없는 대화는 고착 상태에 빠진다.
“브랜드가 마음에 안 든대? 아니면 지난 시즌 거 사 준 거 아니야?”
“아니거든.”
“취향이 아닐 수도 있고.”
“옷장 열어 보고 비슷한 옷으로 사다 준 거야.”
도둑도 아니고 남의 옷장 훔쳐봤다는데 말하는 놈이나 듣는 놈이나 그걸 지적할 생각은 없다. 다정이 이게 그냥 천 쪼가리지 속옷이냐며 펄쩍 뛰었던 건 기억도 못 하고 그냥 선물 사 줬는데 화냈다는 것만 기억하는 윤하의 입술만 삐죽거렸다.
“야.”
“또, 왜.”
“크리스마스 때 놀러 가자고 하는 것도 이벤트에 속하나?”
잠깐 석현이 윤하를 쳐다본다.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윤하는 턱을 괸 채 구겨진 냅킨만 만지작거렸다. 윤하가 그동안 별장에 놀러 가고 싶고 옆에 여자 친구들이 있으면 별생각 없이 데려갔었단 사실을 안다. 하지만 석현이 알기로 윤하는 어떤 감정이 들어간 제안을 여자 친구들에게 건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체 누군데? 여기 한번 데려오지 그래.”
석현이 슬쩍 떠봤다. 미간을 찡그린 윤하가 고개를 저었다.
“여길 왜 데려와?”
“나한테 소개도 해 주고. 뭐 그런 거지.”
지금까지랑은 양상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하고. 허벅지를 물었다면 서승연만큼, 아니면 그보다 더 괄괄하고 터프한 여자인 것 같은데. 아무튼, 여자를 봐야 오윤하가 그 여자와 섹스만 하는 건지 ‘제대로 된’ 연애를 하는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석현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석현의 말을 이상하게 해석한 윤하가 버럭 성질을 냈다.
“내가 왜 윤다정을 너한테 소개해? 자자고 꼬시는 데만 얼마나 걸린 줄 알아?”
순식간에 사람을 파렴치한으로 몰고 간 윤하가 벌떡 일어났다. 요구르트값이라며 만 원짜리 한 장 툭 던져 주고 떠나가는 행태엔 어떤 말도 못 붙였다. 그러다 이내, 윤하의 빈자리를 치우며 피식 웃는다. 얼린 요구르트로 만 원을 벌다니 쏠쏠한 장사라고 생각하며.
건물 뒤편에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가며 윤하는 좀 더 뭔갈 고민했다. 머릿속에선 여러 가지 입장이 뒤엉켜 싸우는 중이다. 내가 얼굴에 싸도 되냐고 했을 땐 된다고 했으면서. 블라우스나 속옷이 아니라 가방을 사 줬어야 했나. 섹스할 땐 그렇게 고분고분하면서 섹스만 끝나면 왜 그렇게 성질을 부리지……. 어쨌든 화를 냈으니 미안하다고 해야겠지?
“옷 좀 사서 별장에 가져다 둬야겠네.”
다정에겐 아직 말도 안 꺼냈건만 일단 김칫국부터 신나게 마신다. 거기 가면 라라인지 라라랜드인지 삵같이 포악한 고양이가 없을 거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석현은 윤하의 유일한 친구였다. 외할머니들끼리 친구라 어릴 적부터 어울려 놀았고, 윤하가 프랑스와 한국을 왔다 갔다 할 때도 곧잘 강원도에 있는 윤하 외조부 소유의 별장에서 윤하의 형과 함께 어울려 셋이 잘 놀았다. 윤하가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연락이 끊겼었지만, 한국에 들어왔을 때부턴 다시 연락을 시작했다.
반면 윤하에게 친한 친구가 석현뿐이라면, 석현은 친한 친구들이 많았다. 승연도 그중 하나로, 고등학교 때 친구가 됐다. 그때도 예쁘긴 예쁜데 성격이 장난 아니라 맞춰 줄 수 있는 남자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석현이 승연과 아직 친한 친구로 지내는 이유는 석현이 승연의 말도 안 되는 성깔을 유들유들하게 받아넘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석현은 작정하고 독하게 찌르는 말도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성품이야말로 미덕이라 생각하는 남자였다.
어쨌든, 윤하와 친하지만, 승연과도 친한 입장에서. 석현은 승연이 좀 안쓰러웠다.
“네가 먼저 차 놓고, 이제 와서 왜 그래?”
“내가 뭐?”
윤하가 오는지 안 오는지 자꾸만 돌아보던 승연이 지레 찔려 목소리를 높인다. 석현이 혀를 끌끌 차며 승연 앞에 위스키를 놓아줬다.
“솔직해지자. 너 윤하 사랑하는 거 아니야. 데리고 다니면 폼 좀 날 남자 중에 네 성격 받아 줄 만한 녀석이 오윤하밖에 없어서 미련 남는 거지.”
내심 오윤하와 특별한 관계라는 자만심을 스스로도 알고 있던 터라 승연이 적당한 대꾸를 찾지 못하고 입술을 삐죽인다. 말린 장미색 립스틱이 곱게 발린 입술을 꾹꾹 깨물던 승연이 석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알잖아.”
위스키랑 같이 먹으라고 초콜릿을 내준 석현이 조용히 말한다.
“윤하 세상엔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거. 걘 누구 좋아해서 울고불고 무릎 꿇고, 이럴 만한 놈 아니야. 너 좋아해서 성격 받아 주는 거 아니라는 것도 알면서. 걘 그냥 상관이 없는 거야. 상관할 만큼 관심도 없는 거고.”
뭐라 말하려던 승연이 입을 꾹 다문다. 위스키를 한 번에 들이키고 초콜릿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자존심이 가시처럼 세워진다. 가방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난다.
“무슨 소리야? 네 말 들으면 내가 무슨 윤하 기다리고 있는 줄 알겠다. 그리고 나 결혼할 거야. 결혼할 사람 있어.”
“그래? 그럼 말고.”
고개를 끄덕인 석현이 혼잣말을 무심코 흘렸다. 말 그대로 무심코.
“뭐, 하긴. 오윤하 그 녀석도 요즘 만나는 여자한테 열심이던데.”
그 말에 거침없이 출구로 향하던 승연이 바람같이 돌아왔다.
“뭐? 오윤하 요즘 만나는 여자 있어? 누군데?”
“나도 몰라.”
“네가 모르는 게 말이 돼? 오윤하 여자라면 보통 여기서 만나잖아. 눈길 몇 번만 주고받으면 바로 다리 벌리는 헤픈 애들!”
운명과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을 그렇게 매도하는 승연을 석현이 오래 봤다. 굳이 따지진 않는다. 가치관 토론하자고 친구 하는 거 아니니까.
“진짜야. 나도 잘 몰라.”
“…….여기서 만난 여자가 아니야?”
석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걸. 나도 이름밖에 몰라. 윤다정이라든가, 윤가영이라든가.”
그리하여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선을 본 승연이 청첩장을 들고 윤하를 찾아가는 계기가 마련된다. 우리 사귀었던 거 세상 사람 다 아는데 결혼식 가면 좀 그렇지 않겠냐는, 청첩장을 받아든 윤하가 생각 외로 상식적인 말만 들먹였을 땐 솔직히 충격받았다.
이유는 많다. 오윤하를 스쳐 간 여자 중 자기가 제일 예쁘니까, 제일 오래 사귀었으니까. 그런데도 오윤하 곁에서 친구란 이름으로 있었으니까. 눈길 몇 번 주고받고 다리 벌린다고 매도했던 여자들보다 오히려 자기가 운명과 기적에 목매고 있었다는 걸 승연은 깨닫는다.
어쨌든 수확은 있었다. 오윤하가 만난다는 윤다정이 경영지원팀 윤다정 대리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회사를 벗어나며 승연이 이를 간다. 저 윤다정에게 오윤하의 실체를 찔러 주겠노라고.
반면 윤하는 오후가 되자마자 청첩장을 들고 온 승연을 바로 까먹었다. 퇴근하자마자 다정과 놀러 갈 생각에 신났던 덕분인데, 그 즐겁던 기분은 서승연이 대체 회사에 왜 찾아왔냐며 졸졸 따라와 따지는 정수 때문에 조금 깎였다. TV에 나오는 여자는 죄다 창녀 아니면 준창녀쯤으로 생각하는 윤하의 아버지는 연예인 며느리를 본다는 생각만으로도 바로 윤하의 뺨따귀를 날릴 게 분명했다. 영감 때문에 승연과 더 이상 엮이려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참 고리타분하다 못해 썩어 빠진 가치관이다. 타들어 가는 정수의 속도 모르고 윤하는 대강대강 대답한다. 퇴근하고 길게 운전해야 하니 커피나 마셔 둘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즐거운 기분은 아직 남아 있었다.
“윤다정이 제일 사랑했던 건 나야!”
“웃기지 마!”
이상하게 커피숍에 사람이 바글거리네, 하는 생각과 동시에 이상한 말이 들리기 전까지는 분명. 윤다정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지. 사람을 헤치고 들어선 윤하가 목격한 건 유치원생들처럼 주먹을 방방거리며 싸우는 면상 떡판인 새끼 둘과 넋을 놓은 것처럼 그걸 지켜보는 다정이었다. 하얗게 질린 다정의 얼굴에 걸음을 떼기도 전에 주먹을 방방거리던 둘 중 하나가 윤하에게 밀려와 부딪혔다. 짜증이 팍 났다. 이 새낀 뭔데 윤다정 이름을 마구 부르지?
“뭐야? 이건.”
냅다 발로 까자 옆에 서 있던 정수의 얼굴이 허옇게 변한다. 짜증은 났지만, 지금 다정이 곤란한 상황이란 걸 알아챌 만한 눈치와 상식은 있었다. 사람들을 쫓아내는 데 주먹 방방이2가 이번엔 윤하한테 와서 으름장이었다.
여자에게 항상 매너를 지켜야 함은 물론 성질은 받아 주고 맞아 주기도 해야 하는 법이라는 외할머니의 가르침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윤하의 성격은 인내, 친절,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자의 같잖은 아르릉거림을 참아 줄 위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드름 난 치와와같이 생긴 새끼가 까부네. 심지어는 그 끝에 이런 생각도 든다. 윤다정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당뇨병 걸린 마시멜로같이 생긴 놈이랑 씹다 뱉은 치와와처럼 생긴 놈들하곤 사귀기도 했으면서 이렇게 잘생긴 나한테는 왜 좋아할 일 없다고 그래? 자꾸 곱씹으니 기분이 배로 안 좋아진다.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당뇨병 걸린 마시멜로가 다시 씹다 뱉은 치와와에게 덤벼들었다. 얼른 다정을 끌어당긴다. 그런데, 다정이 좀처럼 가만히 제품에 숨어있지 않는다. 윤하는 잠자코 받아 온 커피를 제 전 애인들에게 쏟아붓는 다정을 지켜봤다.
솔직해지자. 윤다정이 저를 제일 좋아했다느니 뭐니 하는 저 둘의 말들을 들었을 때 짜증이 나긴 했지만, 엄연히 그건 질투가 아니었다. 내가 침 발라 놓은 물건에 어떤 잡놈이 나타나 집적거릴 때 기분을 질투라고는 할 수는 없는 거였다. 하지만 윤하는 제 기분이 이상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업무엔 지장 없도록 하겠습니다.”
윤다정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난리가 전부 제 탓이라도 되는 것처럼 죄송하다고 하는데, 순간 윤하의 눈이 다정의 어깨를 본다. 한 번도 여자한테 가져 본 적 없는 감정이 생겨난다.
안쓰러웠다.
태연한 척하려 하지만 바들바들 떨고 있는 어깨가, 겨우 감정이 드러나는 게 어깨뿐이라는 게. 엉엉 울거나 욕을 한 사발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반차를 내고 먼저 들어간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텐데 꿋꿋하게 버티는 모습이.
“……헤어질 때도 배려심 있는 헤어짐은 아니었어요. 배려 있는 이별이 어디 있겠냐마는.”
몇 번의 잠자리와 잠자리까지 이어지기까지의 일들을 통해 다정이 하고 싶은 거 다 해야 하는 못돼 먹은 윤하의 성격을 파악하는 사이, 윤하도 다정의 성격을 어렴풋하게 느껴 가고 있었다. 다정은 감정의 역치가 높은 여자였다. 말로는 하지 말라고, 싫다고 하는데 언성을 높이는 일도 없이 차분하니 윤하로선 그냥 해 보는 말인가 싶어 더 들이밀면 그때야 반응을 보이는데, 그마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거칠지 않았다. 물론 윤하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을 때나 얼굴에 쌌다고 허벅지 물어뜯었을 때는 제 잘못은 쏙 빼고 성격이 왜 저러냐고 투덜거린 적은 있지만…….
“하나는 바람을 피웠고, 하나는 잠수를 탔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내 얘기 안 좋게 떠드는 거 정통으로 걸렸었거든요.”
윤하가 딴생각하는 사이에도 다정의 말은 이어졌다.
“근데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하더라고요. 싫다, 좋다, 그런 것도 없이 좋아만 해 주니까 질린다고.”
덤덤하고 차분하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도 물어뜯고 씹어 너덜너덜해졌을 문장이 매끄럽게도 나왔다. 거기서 윤하의 기분이 상했다. 나한텐 얼굴에 좀 쌌다고 허벅지 물어뜯고 선물을 줬을 땐 소리까지 질러 놓고 저런 짓한 놈들한텐 그렇게까지 잘해 줬다니.
“아직 사랑해서 슬퍼요?”
그렇게 좋으면 내려 줄 테니까 따라가지 그래,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는다. 요금소를 막 지난 참이라 이미 차를 돌리기엔 늦었다. 그러나 한순간 윤하의 성질이 팍 죽는다. 다정의 눈물을 발견한 것이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깨물면서, 그나마도 몇 방울이 전부인.
흥분하면 눈물부터 흘리는 다정의 모습을 안다. 어찌나 많이 우는지 섹스 한 번 할 때마다 베개가 젖을 정도였다. 밑에서 싼 것보다 위로 싸는 게 더 많냐고 한번 농담했다가 입술을 꼬집힌 전적도 있다. 어쨌든,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과연 안쓰러움. 그거 하나뿐일까? 조금만 더 가면 알 것 같은데.
윤하가 뭐라 이름 붙여야 몰라 방황하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려 할 때, 갑자기 다정이 윤하에게 따졌다. 남잔 다 그러냐느니, 바람둥이는 원래 그러냐느니. 황당함에 윤하는 이름 모를 작은 감정을 그냥 떠나보내고 만다. 가벼운 말다툼 끝에 다정이 툭 던진 내려 달라는 말에 윤하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틀어지고 만다. 누가 보내 준대?
“그럼 기분 전환하는 셈 치면 되겠네.”
그러니까 입 닫고 따라오라고. 조금 전엔 전 남자 친구 따라가 버리라고 구시렁댔던 남자가 혼자 생각한다. 가면 분위기 잡고 별장에 있는 노천탕에서 한번 해 보자고 살살 꾀어 보려고 했는데, 벌써 분위기가 이게 뭐야. 은근슬쩍 다정에게 책임 전가하던 윤하가 깜짝 놀란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던 다정이 갑자기 어엉, 울음을 터트린 까닭이다.
윤하는 기본적으로 여자의 눈물엔 좀 약한 편이었다. 헤어지자고 했다가도 여자가 울면서 매달리면 얼결에 넘어가 좀 더 사귀는 경우도 있었다. 고개를 모로 비틀고 진주 같은 눈물을 흘리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청순하고 가련했는데, 다정의 눈물은 좀 남달랐다. 옆에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는데 코도 드르릉, 팡팡 풀고 심지어 코 푼 휴지를 윤하의 얼굴에 던지기도 한다.
휴게소에 들려 물티슈와 다정에게 줄 커피를 산 윤하가 뒤늦게 혼자 구시렁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코 푼 휴지를 사람 얼굴에 던지는 게 어딨어. 한참 혼자 입술을 삐죽이는데 앞에 웬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가 알짱거린다. 윤하의 취향대로 머리 긴 미인이었다. 여자가 생긋 웃으며 윤하에게 미소를 던졌다. 윤하는 속으로 생각한다.
윤다정도 저렇게 나한테 살살거리면 얼마나 좋아.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다며 제 옆구리에서 살랑거리는 다정을 생각하자 흐뭇해져서 실실 웃음이 샌다. 근데, 물티슈도 사 주고 커피도 사 줬는데 다정에게 돌아온 건?
“방금 그 여자 커피는 왜 안 받았어요? 예쁘고, 어리고. 커피 잔에 번호 써넣은 거 보니까 마음 있어 보이던데.”
하도 코를 풀어 딸기코가 된 다정이 살랑거리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말하자 짜증이 난다. 저런 말을 하면서도 눈물은 아직 못 그쳐서 계속 훌쩍거리는 중이다. 옆구리에서 살랑거리는 다정은 꿈에도 생각 못 할 일이구나. 체념하며 다정을 쏘아본다.
“계속 울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
라디오도 틀지 않아 차 안은 적막했다. 나름대로 기분 상했다고 티 팍팍 내는데 다정은 옆에서 뭘 하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낸다. 힐끔 보니 핸드폰도 만지작거리고 휴지도 뽑아 아직 마르지 않은 눈가만 콕콕 찍고. 자기가 안 그래도 불난 집에 부채질해 다정의 눈물 바람을 만들었다고는 손톱만큼도 생각 안 하는 윤하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끼어든다.
그렇게 걔들이 좋았나?
한 시간 넘게 내내 울 만큼?
점점 윤하의 기분이 시무룩해진다. 익숙한 길이 슬슬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십오 분 정도만 더 들어가면 목적지에 도착이지만, 도저히 집중이 안 돼 중간에 차를 세웠다. 윤하가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지만, 눈물에 전부 접고 넘어가 주는 건 또 아니었다. 울려서 미안한데, 그래도 그만 만나자고 하면 다들 어디서 배워 오기라도 했는지 윤하의 뺨을 아프게 갈기고 알아서 울음을 뚝 그쳤다. 그래서 자기 뺨이라도 때리라고 내줬다. 그러나 이번에도 다정은?
“그냥 집에 보내 줘요. 피곤해.”
성질이 팍 난다. 다정에게도 내리라고 하며 먼저 내린 다음 눈덩이를 꼼꼼하게 뭉쳤다. 눈덩이를 좀 던지자 내내 시무룩하던 다정이 슬슬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며 주저앉길래 또 우나 덜컥 겁이 나서 다가갔더니, 제 얼굴에 정통으로 눈을 먹인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서로 신나게 눈을 주고받다가, 어쩐 일인지 슬슬 봐주면서 던지는 자기와 달리 다정은 던지는 족족 자기 얼굴을 맞힌다.
윤하는 치사하지만, 힘을 좀 쓰기로 한다. 다정의 허리를 끌어안고 데굴데굴 굴렀다. 사실. 눈싸움했더니 기분이 다 풀렸다. 다정의 눈물도 이제 그친 거 같고. 여전히 딸기코를 한 채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는 다정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제 눈물 그쳤네.”
서서히 미소를 거둔 윤하는 다정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곤 아까 했던 생각의 연장선을 그었다. 그 새끼들이 그렇게 좋았나? 그러면, 이 여자는 사랑에 빠지면 얼마나 잘해 주는 거지?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팀장님은……. 사랑할 때 어떤 얼굴을 해요?”
윤다정이 사랑에 빠진 얼굴이 궁금해. 다정의 질문에 깜짝 놀라고 만다. 이 여자가 독심술을 하나? 서둘러 입을 맞춘다. 하도 씹어 퉁퉁 부은 입술을 핥자 아, 하고 나지막한 신음을 흘린다. 자연스럽게 다정의 흥분한 얼굴이 떠오르며, 방금 한 생각은 잊는다.
별장에 가면 윤하가 꼭 하는 일이 있다. 별장 뒤로 이어진 산책로가 있는데, 산책로에서 좀 더 들어가면 가파른 길만 있기 때문에, 겨울에 돌아다니기 좋은 길은 아니었다. 그래도 윤하는 겨울마다 별장에 와, 산을 올랐다. 사십 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매서운 바람에 귀가 떨어질 것 같던 추위 대신 후덥지근한 더위가 차올랐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윤하는 이내 사람 다니라고 내놓은 길 대신 멧돼지나 다닐법한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왔다고 길이 좀 헷갈렸는데 다행히 헛걸음을 두어 번 한끝에 목적지를 찾았다. 윤하는 물끄러미, 세 발짝 정도 떨어진 바위를 봤다. 장정 둘이 끌어안아도 못 들 것 같은 바위 위에도 눈이 쌓여 있어, 손으로 대충 털고 앉았다. 아래는 절벽이다. 밑이 안 보일 정도로 까마득한 건 아니지만 분명 즉사하거나 운이 좋아 살았지만, 앉은뱅이가 되든가. 둘 중 하나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높이였다.
꼭 괴물과 사람의 경계 같군.
설경을 보며 엉뚱한 생각이나 한다. 손이 땡땡하게 얼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 될 때까지 윤하는 앉아서 절벽을 내려다봤다. 짧은 겨울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할 때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무 생각 없이 자거나, 또는 탈진할 때까지 섹스하고 싶었다. 잠은 자기가 자고 싶다고 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침 별장에 섹스하려고 데려온 여자가 있으니 계획은 섹스 쪽으로 세워졌다.
평소 주관이 뚜렷한 성격에 비해 다정은 침실에 들면 얌전했다. 그건 무던함이랑은 또 다른 거였다. 섹스가 끝난 후에 따지는 일이 있긴 해도, 일단은 어쩔 줄 모르고 윤하가 바라는 대로 움직였고, 제대로는 못하지만 어쨌든 시키는 대로 다 하는 편이었다. 윤하는 침실에서 윤다정이란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알아 간다. 생각할 틈 없이 몰아치면, 생각을 먼저 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이 여자는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끌려온다. 윤하는 그게 무척 재밌었다.
머리를 만져 주고 말려 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 의미 없단 뜻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밤을 함께 보낸 남자가 머리를 말려 주는 걸 로맨틱한 신호로 받아들이는 여자도 있었고, 당연한 시중을 받는 여왕님처럼 구는 여자들도 있었다. 다정은 둘 다 아니었다.
누군가가 머리를 말려 주는 게 어색하다는 듯 무척이나 서먹해 하는 표정이었다. 거기엔 낯부끄러움도 한 스푼 있었는데, 자기랑 홀딱 다 벗고 이 짓 저 짓 다 한 여자가 아직도 그런 표정을 짓는 게 놀랍고 재밌었다. 그래서 오늘 윤하의 목적은, 다정을 발끝까지 빨개질 정도로 부끄럽게 만들자는 쪽으로 정해진다. 그때까지만 해도 윤하의 머리엔 생각이 많았다. 섹스와는 무관한.
윤하의 채근에 못 이긴 다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페니스를 쥔다. 누가 봐도 조선 시대 아녀자가 길목에서 낯선 사내를 만나 눈길을 피하는 얼굴이다. 정숙하고 음전해서, 품 안엔 은장도까지 쥐고 있을 것 같은데 막상 다정이 쥐고 있는 건 자기 페니스. 반쯤 발기한 것이 완전히 서버렸다. 거기까지 안 갔어도 이미 충분한데, 심지어 다정이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 기대했던 모습이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붙잡고, 눈을 내리깔고. 몇 번 입에 앙, 담으려다 실패하고는 피가 몰린 선단만 할짝할짝 핥는다. 기특하게도 기둥은 붙잡은 손은 처음 시켰던 대로 착실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오랄이 어설프니 가끔 이가 닿았다.
내 좆이 무슨 깨물어 먹는 막대 사탕인가?
다른 애들이 그랬다면 당장 그런 생각에 어이가 없었을 텐데. 어이없게도 이가 닿을 때마다 처음 야동을 틀고 딸딸이 치는 중학생처럼 흥분한다. 손을 뻗어 다정을 붙잡는다. 어디라도 상관은 없었다. 머리채를 쥐었다. 악력이 불쾌할 만도 한데 다정은 얌전히 제 얼굴을 모로 누이고 윤하에게 노출했다. 허벅지에 뺨을 기대며 열심히 기둥을 적신다. 애써 차분해지려 속을 다독인다. 머리채를 쥔 채 다정의 입에 흉악한 마음을 처박는 대신, 뺨을 매만지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진짜로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다신 섹스 안 한다며 홀랑 도망갈지 모르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이를 꽉 물었다. 이렇게 야한 얼굴로 펜을 줍고 다닌다니. 당장 다정에게 어디 가서든 절대 펜을 줍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싶다. 아니나 다를까. 다정이 너는 대체 무슨 생각 하면서 사니? 같은 표정을 짓는다. 웃겼는데, 웃음은 안 나왔다.
팔을 붙잡고 끌어당긴다. 갑자기 그런 확신이 들었다. 윤다정은 내가 여기서 뭔 짓을 해도 도망 안 갈 거라는 확신. 손이 가는 대로 억세게 주무르고 입이 가는 대로 전부 빨았다. 입술, 뺨, 눈가, 귀. 벌써 버거워하는 게 한눈에 보이지만 봐주고 싶지 않다. 바지만 벗은 다정의 아랫도리에 빳빳하게 발기한 것을 바로 처박았다. 어떻게 콘돔 씌울 이성은 있던 게 용했다.
뜯어내듯 티셔츠를 벗겼을 때만 제외하고는 한 번도 다정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얼굴을 가리면 치워 낸다. 다시 얼굴을 가리면 쳐 냈다. 숨길 생각 하지 마. 아니, 아예 어떤 생각도 하지 마. 나도 안 하고 있으니까. 자세를 바꿔 다정을 내리누른다. 쳐올릴 때마다 다정의 머리가 침대 헤드에 쿵쿵 부딪혔다. 베개를 끼워 주려 그때까지 붙잡고 있던 어깨를 놓는데, 순간 머리가 아찔해진다.
가슴을 세게 쥐었다가 놓으니 하얗게 변했던 살덩이에 곧 빨갛게 자국이 남는다. 허벅지도 마찬가지였다. 불을 켜고 하는 게 이래서 싫었던 건가? 손이 닿는 곳마다 눈을 밟은 것처럼 자국이 생겼다. 짜증과 비슷한 마음이 확 올라와 속을 뒤집었다.
다정에겐 최악의 신호.
도시를 불태우고 어떤 눈물을 짓밟는다고 해도, 이렇게 사람이 흉악하게 될 순 없는 거다. 잡아당기면 따라오고, 누르면 짓눌리고, 박아 넣으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할딱거리고. 글쎄 그걸 윤다정이 다 한다. 그 윤다정이.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쓸데없이 우울한 생각 대신 눈에 잔뜩 벌어진 다리 사이만 들어온다. 그래서 윤하 스스로도 제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몰랐다.
“나 앞으로 펜만 봐도 설 거 같아.”
그 새끼들은 절대 윤다정이 이러는 거 본 적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캐묻는다. 그렇다고,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채근한다.
“그 새끼들하고 할 땐 이렇게 질질 싼 적 없지. 어.”
다정이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린다. 멋대로 답을 해석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그렇지. 당연한 거다.
나였으면 절대 안 놔줬을 테니까.
너무 몰아붙였는지 다정은 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콘돔 세 개를 다 쓰자마자 기절하듯 늘어졌다. 정신을 못 차리고 고개만 까닥거리는 얼굴에 들이대고 한 상자 더 쓰자고 말해 봤다가 이마만 얻어맞았다. 맞았는데도 윤하는 좋다고 웃는다. 이런 다정이 재밌기 때문이다. 죽었다 살아나 놓고도 윤하를 말 안 듣는 똥개 다루듯 한다. 수건을 적셔와 다정의 몸을 닦아 주다 말고 윤하가 다정의 팔을 한번 세워 봤다. 놓자마자 바로 툭 떨어진다. 그걸 네 번 정도 했는데도 다정은 반응이 없었다. 진짜 죽었나. 다행히 귀를 기울이니 숨은 쉬고 있다. 난폭하게 굴었던 게 뒤늦게 미안해졌다.
수건을 치우고 저도 씻고 나온 뒤 다정의 옆구리에 딱 달라붙었다. 다정의 머리맡에서 베개를 쏙 빼고 대신 제 팔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어깨를 살짝 물었다. 다정이 잘 때 옆에서 이렇게 치대면 항상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가슴팍을 토닥여 줬다. 잠결에 무심코 보이는 다정함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반응이 느리네. 어깨를 몇 번 더 깨물어 보던 윤하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너무 괴롭혔는지 잠결에도 반응할 여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괜히 골이 나서 코를 막아 본다. 어째 그래도 미간만 조금 찡그릴 뿐, 생각한 반응이 없다. 진짜 다정의 숨이 넘어가기 전에 코를 놓아줬다. 질펀하게 섹스를 했는데도 잠이 오기는커녕 눈만 말똥말똥하다. 어떻게든 눈을 감고 버티던 윤하가 일어났다. 목적지는 2층이다. 별장지기 부부가 깨끗하게 관리해 피아노 위엔 먼지 하나 없었다.
장난치듯 건반을 눌러보다 이내 생각나는 곡을 친다. 섹스가 아니면 피아노를 치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유이한 일. 유려한 곡조를 타고 과거에 갇힌 아름다움이 피어난다.
크앙, 난 괴물이다.
형, 괴물이 뭐야?
그때 형이 뭐라고 했더라. 손을 멈추지 않으며 생각한다.
윤하의 유년기와 형의 소년기는 맞물려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형은 윤하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 준다.
사람들하고 의사소통 못 하는 게 괴물이지. 사람을 해치고, 이해받지 못하고.
어렴풋이 해가 뜨고 있었다. 뒤늦게 추위를 느끼며 침실로 돌아간 윤하가 다정의 옆에 누웠다. 좀 잤다고 괜찮아졌는지 다정이 살짝 눈을 뜨고, 이내 윤하라는 걸 알았는지 코로 한숨을 쉰다. 다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게 쉬는 것에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다정의 손이 윤하의 뺨이며 머리를 토닥였다.
얼마 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를 만큼 윤하는 빠르게 잠에 빠진다.
크리스마스 연휴도 다정과 질펀하게 뒹굴며 보냈겠다. 출근하자마자 다정의 기분 좀 나아지라고 승연까지 불러 자기도 제물로 바쳤겠다. 남은 건 다정이 감동했다며 옆구리에 붙어 뽀뽀를 쪽쪽 해 주는 거였지만, 애석하게도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왜 화가 났는지 병원에서 내내 눈도 안 마주치는 다정을 떠올리던 윤하가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 끝에 승연이 전화를 받았다.
“야, 너 회사에서 무슨 말 지껄이고 갔냐.”
보통 여자에게 쓰지 않는 단어가 들어갔다. 그걸 승연도 눈치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눈을 잘 마주치던 다정이 이러는 걸 보면 원인은 승연에게 있는 게 분명했다.
“대답 안 해?”
갑작스레 옆 차가 끼어들어 윤하가 잠깐 욕설을 퍼부었다. 내내 말이 없던 승연이 그것에 반응했다. 어쩌라고개새끼야목소리도듣기싫으니까앞으로전화하지마!
숨도 쉬지 않고 욕설을 퍼부은 승연이 전화를 뚝 끊었다. 신호에 멈춰선 윤하는 멀뚱멀뚱 전화만 내려다봤다. 황당함이 옆자리에 남았다. 이건 또 왜 나한테 화를 내? 어이가 없으니 코웃음을 한 번 쳐본다. 에이 씨.
“그래서 윤다정은 왜 화가 난 건데?”
신호가 바뀌자마자 출발을 안 한다고 빵빵거리는 뒤차에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며 윤하도 짜증을 냈다.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화가 난 사람만 셋. 웃기는 상황이었다.
회장실에 있는 나무는 죄다 마호가니로 짜 맞춰 있다. 책상부터 유리를 위에 올린 테이블, 책장, 하다못해 문까지. 겉으론 검소함을 표방하는 아버지가 속으론 얼마나 속물인지 아는 윤하는 여기에 올 때마다 코웃음만 쳤다.
심미안은 보통 돈과 시간으로 기르는 건데, 윤하는 어릴 때부터 두 개 다 충분했다. 물결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져 특히나 비쌀 게 분명한 책장은 물론 소파에 앉으면 바로 보이는 거대한 그림은 일억을 훌쩍 넘는 작품이었다. 그림이 또 바뀌었네, 하고 훑어보던 윤하의 뺨이 철썩, 하고 돌아갔다.
“네가 생각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책상 옆엔 아버지가 수족처럼 부리는 장 실장이 있다. 아버지가 딱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시키면 시키는 거 다하고, 그런데도 문제가 생기면 능동적으로 대처할 줄 아는데 그게 또 눈에는 안 거슬릴 만큼이어야 하고. 영감탱이 비위 맞추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며 윤하는 속으로 한숨을 쉰다.
“얌전히 굴라고 했더니, 이젠 천박하게 배우 짓이나 하는 계집애를 아예 회사로 불러들여? 그것도 두 번씩이나?”
“이제 안 부르겠습니다.”
윤하의 대답에 아버지의 손이 다시 치켜 올라갔다. 오늘은 피를 볼 셈인가. 무감각하게 생각하는데 장 실장이 아버지를 말렸다. 회장님, 오늘 신년 행사가 어쩌고저쩌고…….
“쓰레기 같은 자식. 바닥까지 내려간 네 놈 평판 끌어올리기도 모자랄 판인데, 계집애들 끼고 한심한 짓거리나 하고 돌아다녀!”
장 실장의 만류에 뺨을 더 얻어맞는 일은 없었지만 대신 폭언이 쏟아졌다. 다른 때 비하면 그래도 약과라 윤하는 그냥 흘려버렸다. 그러다 불쑥, 말한다.
“기획실에 사람 하나 데려갈 겁니다.”
“뭐?”
장 실장이 재빨리 회장에게 속닥인다. 말이 길어지는 게 지루해 윤하가 뚝 잘랐다.
“이제 낮에 일 안 하면 뭐 할 것도 없고. 나랑 같이 일할 사람은 내가 골라요.”
“네 놈이 사람 볼 줄 알기나 해?”
아버지한테 있어서 어차피 윤하는 똥오줌도 제대로 못 가리는 천치, 머저리. 그 이상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땐 저 성에 차 보려고 얼마나 바동바동 노력했던가. 윤하의 머릿속에 잠시 코피 줄줄 흘리며 노력하던 때가 지나갔다. 그게 왜 이렇게 꿈처럼 느껴지지. 졸려서 그런가.
“아버지보단 잘 보겠죠. 적어도 전 사람을 사람으로 보거든요.”
참지 못하고 윤하가 비웃음을 내비쳤다. 철썩, 기어이 뺨이 한 번 더 돌아간다. 덕분에 잠을 못 자 멍하던 게 좀 깼다. 나가라는 말이 없었지만 알아서 나온다. 누구도 붙잡진 않았다. 감기가 걸렸나, 코가 막힌 것 같아서 킁킁거리다 잠깐 인상을 썼다. 늦어지던 걸음이 모습을 바꿔 가벼워진다. 평소처럼. 섹스뿐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척, 금세 다른 것에 신경을 두는 행동도 잘했다. 윤하는.
오늘은 윤다정이 왜 화가 났는지 꼭 들어야겠어.
그러나 그날의 상황은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한심하게 살면 좋아요?”
언제는 다정과 관련된 상황이 마음대로 돌아갔냐마는. 사람들 있는 데서 대놓고 아버지가 한심하니 어쩌니, 떠든 건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헛웃음을 삼키며 다정의 말을 듣는다. 아버지가 하는 말과 비슷했다. 그렇게 살고 싶냐는 둥, 정신 차려라, 부끄럽지도 않느냐. 윤하는 과연 자기가 누구한테 뭘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지 궁금했다.
“이게 무슨 약인진 몰라도. 먹고 정신 좀 차리세요.”
무심코 약봉지를 내려다봤다. 겉봉엔 아무것도 안 써 있었다.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것도 그냥 흔해 빠진 약국 이름이 전부였다. 때문에 무슨 약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이라는 한 글자에 윤하의 목덜미가 뻣뻣해진다. 다정이 약봉지를 쥐여 주고 옆을 스쳐 지나간다.
떨리는 손가락이 약봉지를 벌리고, 안에 자리한 약을 꺼냈다. 약봉지엔 제대로 된 출처가 적혀 있었다. 제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하지만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건 윤하에게 정신과 이야기를 꺼냈었던 정수였다. 억지로 입을 벌린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혀가 이를 가르고 움직인다. 다정의 어깨를 붙잡고 벽에 밀쳤다는 것조차 인지할 수 없다. 여자한테 이딴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선수를 쳐야 했다. 들키면 안 돼.
또 다른 오윤하가 고개를 들이민다.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인다. 마음에 박힌 가시를 누군가 건드렸을 때면 항상 그랬듯이. 섹스하고 같이 잠드는 사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 다정도 예외는 되지 못한다.
숨겨야 해.
뭐를?
전부.
화살을 빗맞아 날뛰는 짐승처럼 손에 잡히는 모든 걸 할퀴고 상처 낸다. 짐승과 다른 점은, 날카로운 발톱이 없다는 것. 짐승보다 나쁜 점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말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싫어.
왜?
내가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들추지 마.
윤하가 생각하기에 그건 누가 보듬어 줘야 할 상처가 아니라 눈치라도 채면 바로 손가락질받고 외면당할 쓰레기였다. 추악해서 존재만으로도 썩은 냄새가 나는. 이런 걸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야 마땅할.
“형.”
화를 낸 장소는 호텔의 복도인데, 깨끗하게 정리된 집이 폐허처럼 느껴진다. 전화를 걸어 허하게 뱉은 말에 정수가 조심스레 대답한다. 응, 윤하야. 화는 이미 아까 다 냈다. 약봉지를 만지작거리며 묻는다.
“이거 뭐야?”
숨 한번 크게 들이켠 정수가 대답한다. 별거는 아니고. 내가 가서 내 이름으로 처방받은 거니까 회장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을 거야. 그냥 잠 좀 자게 도와준대. 다른 건 정말 없으니까. 먹어 봐. 버리지 말고, 응? 조심스러운 걱정이 핸드폰을 타고 넘어온다.
자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게 싫다.
“형.”
겁에 질린 다정의 눈동자를 떠올리는 순간, 입술을 억세게 씹는다. 얼얼한 통증을 넘어 피 맛이 번질 때까지 뭔갈 꾹꾹 집어삼키다 겨우 말한다. 그 한 마디에 온몸에서 힘이 빠진다.
“나, 병원 가 볼까?”
정수가 반색하는 건 들리지도 않는다. 그럴래? 그럼 월요일에 바로 가. 시간 끌어서 좋을 거 없잖아. 같이 가 줄까? 보이지도 않을 테니 필요 없는 반응임에도 윤하는 고개를 저었다. 자꾸만 두려움에 떨던 다정의 얼굴이 떠오른다. 동화에서 끔찍한 괴물을 맞닥트렸던 소녀가 그런 표정을 지었겠지.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전화를 끊고 소파에 누운 채 숨만 쉬다가 약을 하나 꺼냈다. 가벼운 종이가 찢겨 나가고, 알약이 손바닥 위에 굴러 나온다. 물도 없이 그걸 씹어 삼킨다. 전에도 몇 번 먹어 봐서 알고 있다. 먹는다고 바로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몽롱하니 짧은 문장도 몇 번 읽어야 이해가 될 만큼, 짜증이 치밀어오를 정도로 멍청해지면 그때가 돼서야 까무룩 잠이 쏟아진다. 그토록 원했는데도, 불쾌한 느낌만 남기고.
“저기, 팀장님. 다녀…… 오셨어요? 어떻게, 그.”
월요일엔 점심이 좀 지난 시간에 출근했다. 뒤따라 들어온 정수가 제대로 된 단어를 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윤하는 덤덤한 얼굴로 인사하던 다정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던. 정수가 왜 대답을 안 하냐며 윤하의 재킷을 잡아당길 때야 회상에서 벗어났다.
“안 갔어.”
정확히 말하자면,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마음속 쓰레기를 제 손으로 꺼내는 일은 누군가가 입을 억지로 벌리고 팔을 집어넣은 채 휘젓는 거랑 비슷하게 불쾌했다. 다시 생각해 봤는데, 역시 잠 좀 못 잔다고 수선떨 듯 병원에 찾아가는 건 바보짓 같다. 비록 잠을 좀 못 자는 그 정도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도. 정수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윤하의 어깨를 토닥였다. 일부러 눈을 마주하지 않고 말한다.
“당분간 형이 좀 도와줘.”
조금 뒤 정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약을 처방받는 행동이 불법이라는 건 둘 다 알지만 구태여 꼬집지 않는다.
다정을 석현의 바에 데려간 건 절대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얘기할 곳이 필요했고, 택시에 타서 생각난 게 석현의 바였을 뿐이었다. 어쩐 일인지 가게 문은 열려 있는데 구둣발 소리가 울릴 정도로 가게가 조용했다. 뒤늦게 튀어나온 석현의 말에 잠깐 가게 문을 닫았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여길 안 왔지. 윤하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석현은 빠르게 다정을 훑었다. 이 여자가 윤다정인가?
“동행이 있네?”
생각보다 터프하게 생기진